유기적이지 않은 유기체
이선영(미술평론가)
박문희의 작품에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수수께끼처럼 한 겹, 또는 여러 겹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렇다고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추측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로 푹 씌워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뜻언뜻 감지되는 굴곡 면과 표면은 지시대상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작가는 지시대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투명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관객은 여러 우회로와 매개를 거쳐야 한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이구나’ 하면서 대상을 가상적으로 소유하는 대신에, ‘이게 뭔가’하는 추리력을 발동시켜야 한다.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은 그가 생명체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한다는 것에서 온다. 지구 생태계를 가득 채우는 생명체들은 자명하게 다가오는 듯하지만, 여전히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심지어는 강아지도 마찬가지이다.

[숨겨진 만찬], 92x215x161cm, FRP, 2011년.
여러 사물의 복합체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미지의 생명체들은 그것이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여러 관계의 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예시한다. 그의 작품은 단일한 물질로 만들어진 작품조차, 이것저것이 동원되어 짜 맞춰 진 설치물이라는 느낌을 준다. 여러 작품에 나타나는 포장 막 같은 형태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불일치를 조성한다. 껍데기는 알맹이의 외부가 아니라, 덧씌워진 것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틈과 간격은 비판적인 거리감과 유희를 위한 장이다. 그의 작품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생명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며 관객은 재구성을 통해 작가가 제안한 인식론적 게임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관계란, 대상(동일성) 자체를 이루고 있는 이질성(타자) 간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 등을 포함한다. 대상이 아닌 관계가 중요한 이상, 상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대상은 괄호 쳐지고 유보된다.
대상에 이르는 길에 방해물을 놓고 대상의 진면목과 만나려는 시도인 낯설게 하기는 일상과 구별되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장치이기도 하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많이 활용된 소격효과는 손쉽게 총체화 된 세계를 가정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모더니즘의 반대급부였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더니즘]에서 ‘아마도 진정한 실재는 방해(interruption)’(블로흐)임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파악한 세계가 또 다른 총체적 형태로 단순히 재생산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오히려 세계를 소외시켜야 한다고 본다. 세계와 맺는 우리의 상상적 관계는 방해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실제 세계의 존재조건과 개인이 맺는 상상적인 관계를 재현’(알튀세)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완결되고 총체적인 세계관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실제 조건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리얼리즘에서 손쉽게 가정되는 바의 현실에 대한 유기적 완전성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아이스테인손에 의하면 리얼리즘 담론이 실증주의자들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며 상징적인 반영이라는 점으로 보아, 과학 기술주의적이고 도구화되고 억압적인 사회체제가 계속 사용하는 바로 그 언어와 관련된다. 그래서 비판적인 예술은 이 언어 자체를 통째로 파문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문희의 작품은 유기체를 다루지만 유기적이지 않다. 그의 작업은 선택된 대상의 부재나 변형을 암시하는 장치들의 고안에 집중된다. 그것들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탐닉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탐구를 시작하고 이끌어나가는 유혹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모순과 역설어법은 자주 사용된다. 작가는 이렇게 인식론적인 게임을 시작하지만, 이를 위해 매우 특이한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젖소, 낙타, 숲, 여자, 아이, 강아지, 심지어는 여자 목욕 바구니까지에 이른다.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가 중시되는 한,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소재일수록 더 효과적인 것이다.
아주 평범한 것일지라도 색다른 물음을 하는 순간 색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은 물론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박문희가 탐구하는 생명체는 과학과 예술의 공통된 주제이다. 생명체는 양 분야에 다양성의 모델을 제공하면서, 끝없는 탐구의 원인제공자이다.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뿐 아니라, 때로 예술품은 자율적인 생명체로 고양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은 자명한 출발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미지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의 분석철학이 말하는 식으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미지의 것을 말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을 제안한다. 사물은 사물을 연출하는 방식만큼이나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다. 박문희의 작품은 생명의 기원과 목적 같은 관념론적이고 신학적인 가설, 즉 대답될 수 없는 추상적 질문이 아니라, 생명체로 인지되기 위한 현실적 조건을 제시하려 한다. 우리가 관념론적인 질문과 대답에 몰두할 때 궁극적으로는 어떤 초월을 요구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초월적 자세는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의거한 근대적 사고에 전형적이다. 이분법자체가 초월을 내포한다.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듯한 이원 항은 반대 항으로 환원되거나 어쭙잖은 화해를 하거나 하는 식이다. 예술작품이 진리로 가득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야생성을 거세한 채 관념론에 경도되곤 한다. 재현주의는 관념론과 예술이 결탁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 이후, 이념과 예술에서 몸과 사물로 방점을 찍어온 현대미술은 이러한 관념론적 방식을 지양한다. 의미, 상징, 정의, 미 등 그자체로도 정의되기 힘든 무거운 단어들이 어떤 공식으로 제시된 작품 [무언가를 위한 가설]은 박문희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나타낸다. 이 부조리한 공식은 작가가 명확한 답이 아니라, 가설을 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은 선험적 가정에 의해 중심과 주변의 합리적 관계를 명시하는 투명한 구조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되풀이하여 해석해야 하는 불투명한 사물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가림 막은 이러한 불투명성을 높인다. 작품에 드리워진 가림 막 뒤에는 어떤 핵심이나 본질이 바로 나타나기 보다는 또 다른 가림막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불투명성은 불가지론이나 신비주의로 귀결될 수 있는 무지나 맹목은 아니다. 그것은 직면해 있는 대상에 대한 단순한 앎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명하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도 대놓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공시적 명료성이 아니라, 시간의 추이를 따르는 경험의 축적, 그 과정이 중요하다. 생명체 자체가 오랜 시간이 축적된 과정의 결과물이기에 시간성(temporality)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간성은 단칼에 베어진 듯 명료한 공간성과 달리, 불확실성(변수)을 늘린다. 가장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분야인 수학이나 물리학도 현대로 올수록 진리 그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무한히 가까워지려는 점근선만을 인정할 뿐이다.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여겨질 지라도, 예술은 물론 자연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이다.
작품 [어떤 동물]는 농장에 직접 가서 사실적으로 만든 젖소를 뒤집어씌운 천 자체를 캐스팅하는 기법을 통해, 얼룩덜룩한 이 덩어리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작품 [숨겨진 만찬]에서 카펫 위의 식탁을 낙타다리처럼 보이게 한 것은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을 뒤집어씌운 천이다. 여러 오브제가 동원된 이작품은 ‘생명체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시각적 유사에 의해 전혀 다른 사물들을 연결하는 유희가 있다. 작품 [숲 속에서의 질문]에서는 숲이라는 생태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이것저것 나타나는 와중에, 숲 속의 동물을 인조잔디로 씌워 자연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것들을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관계로 묶는다. 이 작품에 동원된 것은 모두 인조의 것으로, 그의 작품이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 즉 표상의 세계 내에서 작동하는 구분’(들뢰즈)에 기초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시뮬라크르)임을 예시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시뮬라크르를, 복사물의 복사물, 무한히 떨어진 도상, 무한히 느슨해진 유사성이라고 정의한다.

[금발 여인], 44x32x178cm, 2010년.
털로 뒤덮인 동물과 사람들은 가림막이 대상의 속성과 보다 가까운 경우이다. 이 또한 시각적 유사로 엮여진다. 그것들은 대걸레나 가발 등이 사용되었지만, 털은 피부의 연장이기 때문에 전신이 털로 뒤덮인 생명체들은 표면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다. 털은 이슬람 문명권의 여성 복장처럼 전신을 뒤덮고 있지만, 성별과 인종, 나이까지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대상을 가리고 있지만 동시에 드러낸다. 그것이 드러내고 있는 진실 중의 하나는 인간 또한 털 복숭이 동물이라는 점이다. 털은 문명사회에서는 억압--여성은 제모를 하고 남성은 면도를 한다--되지만, 이렇게 한계를 모르는 과도한 양상에 의해 인간에게 숨어 있는 동물적 느낌이 들추어진다. 피부의 연장인 털은 표면을 극대화하면서 숨겨진 욕망을 폭로한다. 머리털에 내재한 힘이나 유혹의 힘은 삼손이나 사이렌 같은 전설과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다니엘라 마이어의 [털]에 의하면 ‘곱슬곱슬하다(locken)’라는 말에는 오늘날에도 ‘꼬시다(anlocken)’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박문희의 [금발 여인]이나 [갈색머리 아이]는 매끈해야 하는 여성, 그리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를 뒤덮은 털의 물결을 통해 인간과 동물, 그리고 욕망의 관계를 질문한다. 그의 작품에서 무언가를 가리는 막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접면을 더욱 확장하고, 대상과의 관계망을 활성화시켜 결과적으로 유희의 공간을 만든다. 생명체는 소재일 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 또한 생명의 과정을 따른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체는 여러 구조들의 결절점 내지 교차점이 있으며, 결코 완결되어 있지 않다. 원래의 형태에 부가시켜 놓은 듯한 장치는 고정이 아닌 과정을 강조한다. 소를 덮는 얼룩무늬 천, 낙타의 등을 이루는 식탁보, 인체를 뒤덮은 털 등은 모두 사물의 표면에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것들은 사물의 윤곽과 굴곡을 다르게 형성하면서, 하나의 현실로 환원할 수 없는 편차와 간격을 만든다. 의미는 주체와 대상과의 완전한 일치가 아니라, 이러한 틈에서 발생한다.
특히 작품 [어떤 동물]같은 경우는 대상을 감싸는 천의 유동적 표면을 FRP로 떠내었기에, 내부와 외부라는 구별이 흐려진다. 관객은 젖소라는 유한한 대상을 넘어서 한계지어질 수 없는 표면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심층에서 표면으로의 이동은, 일자가 아닌 다양성을 향한다. 또는 일자가 바로 다양성이다. 플라톤주의에 도전함으로서, 철학을 심층에서 표면으로 끌어올린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자연의 산물들은 그들의 본질적 속성인 다양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자연은 총체화가 불가능한 합이다. 다양성의 원리는 그 고유한 요소들을 하나의 전체 속에 통합하지 않아야만 성립한다. 자연의 모든 요소들을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조합은 없으며, 유일한 세계나 총체적인 우주도 없다. 자연의 법칙들은 총체화 되지 않는 부분들을 분배한다. 박문희의 작품에서 자연은 감추어진 잠재력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이렇게 총체성의 가상을 벗어난다면, ‘존재, 일자, 전체를 믿는 것은 정신의 강박 관념들이자, 운명에 대한 믿음의 사변적인 형태들이고, 또한 그릇된 철학의 신학적인 형태들’(들뢰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문희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부가적 요소는 존재가 아닌, 상태로 전이 시킨다. 상태란 존재들, 즉 실체의 여러 종류들을 말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어법은 양식이 아닌, 역설이다. 철학자 이정우에 의하면 양식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 즉 ‘doxa’이다. 통념은 한 방향으로 간다. 이와 달리, 양쪽 방향으로 가는 것이 역설, 즉 ‘para-doxa’이다. 이정우는 들뢰즈가 독사에 대립하는 파라독사를, 양식과 상식에 대립하는 복수성을, 코드/권력에 대립하는 욕망/욕구를 사유한다고 풀이한다. 표면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있는 박문희의 역설 어법은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한다. 그의 작품에서 활성화된 표면들은 지고한 합목적성, 본질적인 실재, 나아가 역사의 의미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동일자의 모델을 전복하는 것이다. 동일성에 근거하는 사변철학은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유연해진 현대철학에 의해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숲속에서의 질문], 400x400x253cm, 2012년.
실재가 아닌 과정을 중시했던 철학자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사변철학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다. 본질이 아닌 현상을 중시했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의식의 철학 또는 반성의 철학은 세계의 유일성에 대한 지각적 신념을 세계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으로 환원시킨다.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형이상학은 합치로 머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존재의 단단한 핵과 우리 사이에는 살의 두께가 있다. 말과 살 사이에는 병행 관계나 유비관계가 아니라, 연대와 얽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각 단어의, 각 이미지의 명백한 의미가 아니라, 단어와 이미지의 선회와 교환 가운데 함유된 측면적, 근친적 관계들이다. 예술 또한 언어를 폐쇄하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간주한다. 표상적 사고를 넘어서는 현대 예술은 현대의 철학이나 과학과 더불어 ‘야생적 존재로서의 세계를 복원’(메를로 퐁티)함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효과적 방법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