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예술과 비평
이선영(미술평론가)
인천문화재단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진행하는 공공예술 사업인 ‘지역공동체 문화 만들기’는 추진단의 활동 외에, 비평 부분을 좀 더 보강 하여 후속 사업과 기획 사업을 포함한 12개 프로젝트를 미술계 현장에서 활동하는 비평가 및 기획자들이 평론을 맡게 되었다. 최종 결과물에 대해서 리뷰가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업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중간보고서 성격의 텍스트 생산이 예정되어 있어, 문화생산자와 재생산자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청년들에게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처음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신규 사업들이기에, 상호작용은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또한 공공영역에서 행해지는 예술적, 문화적 소통에 본격적인 비평이 참여하게 됨은 서로를 자극해줄 수 있을 것이다. 비평 역시 예술만큼이나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어 그 존재의 의미 자체가 문제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양자의 만남은 그 어떤 만남보다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대안의 공공예술은 자동화된 소통과 타성적 소통, 그리고 소통 병목 현상 같은 기성의 어떤 상황에 대한 일련의 사회 문화적 비평이다. 또한 이와 함께하는 비평이란 함께 생산(창조)하는 문제이다. 원래 근대의 ‘공공영역’(하버마스)--비판적 사회학 분야에서 나온 공공영역에 대한 담론은, 공공영역이 계몽주의와 더불어 근대에 태어난 후 귀족의 권위주의에 투쟁하는 중산층의 무기로 잠시 작용했다가, 얼마 안 있어서 유사 공공영역이라 할 수 있는 문화산업이나 대학제도에 침식된 이상적 개념으로 간주한다.--에서 탄생한 비평과 공공영역에서 행해지는 예술이 목적의식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현재 제도적 예술이 공공적인 소통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에 있어 공공부문은 수입업자처럼 소통보다는 시세차익을 노리는 거간꾼이나 타성적인 제도에 기생하는 ‘꾼’들의 세계이지, 온전하게 예술인이나 시민의 소통 마당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전횡이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에 있어 공공부문이 비평의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말들은 많았지만 공론화되기 힘들었다. 스스로를 갱신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하는 것은 예술 뿐 아니라, 비평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비평가의 참여는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좁은 도시를 더 숨 막히게 하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먼지만 뒤집어 쓴 채 자리만 차지하고서 우두커니 서있는 죽은 기념비로서의 공공미술을 지양하고, 실시간의 상징적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프로젝트 성격을 띈 대안의 공공예술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지역 여기저기에서 꾸준히 실행되고 있었지만, 그 과정과 성과가 프로젝트가 진행된 현장의 시공간을 넘어서 온전히 기록되고 평가되어 다수에게 공유되었는가의 문제는 남아있다. 그 과정이 부실할 때 오류는 반복되고, 기성의 공공미술만큼이나 대안의 공공예술에 대한 피로가 누적될 수 있다.


'내가 사는 섬' 중,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지속하는 프로젝트 [섬의 노래](고영택 外)에서 발간한 섬소식지.
작업실에서 완성한 것을 딱 갖다 놓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실시간 소통에 더 방점이 찍힌 열린 작업이야말로 더 완벽한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것은 확립된 매뉴얼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수에 대해 융통성 있고 창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참조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자의가 아니라, 필연과 함께 한다. 대안의 공공예술은 성공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실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만약에 실험이라면, 그 다음에는 단지 실험으로 끝나지 않게끔 비평을 통해 철저히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제대로 의미가 부여받고 알려지지 않으면 사업자체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예술이 공공적이면 좋을 것이다’라는 막연함이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식의 타성적인 기대를 지양하고, 죽어 있는 조직과 살아있는 세포를 감식하여 살릴 것은 계속 자라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지속가능성이 확보된다. 예술은 공공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 대의와 명분을 매번 되묻지 않으면 안 되는 실존적 사건이다.
대안의 공공예술은 건물 옆 귀퉁이나 벽면에 ‘물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어서, 담론적 생산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이때의 비평적 담론은 이미 무엇인가 다 생산되고 건립 된 이후에 따라붙는 부차적 과정이 아니라, 생산자와의 지속적인 대화의 결과물이며, 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라 작가와 시민의 뇌리 속에 의미심장한 기억을 남기는 중차대한 과정이다. 그것은 비평이 예술작품 비평을 넘어서 사회문화 비평으로 고양되고 확장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진정한 예술가가 예술제도라는 장벽을 넘고 싶어 하듯이, 비평가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평가 스스로 삶과 현장을 버릴 때, 또는 그것으로부터 소외될 때 그는 이해(interest)관계를 맺고 있는 극소수 전문가들이나 돌려보는 골치 아픈 글이나 써대는 무익한 존재로 치부될 것이다. 마침 현재의 비평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현실이 답답한 사람은 바깥에 한 번 서보는 것이 돌파의 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공공적인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는 비평가는 사적인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진정 할 말이 없는데 취약한 기성의 제도에 기대어 말하고 있자니 잉여의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의 언어란 대체로 자신이 포함된 기성의 제도를 재생산하는데 복무하는 자기지시적인 언어들이 대부분이다. 예술이나 비평은 그자체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자기지시성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불능에 빠져있다. 그쪽 분야 사람들의 나르시시즘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자신이 정작 복무하고 있는 것의 본질을 거스르곤 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가족과 사유재산을 가진 ‘자율적 개인’을 단위로 한다. 근대는 공적/사적 영역의 구별은 공고히 했지만,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안의 공공예술은 공적이기 때문에 사적일 수 있다. 거기에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공정치 못한 교환관계를 성립시킨 현대사회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포함된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고립된 작가의 음울한 독백, 또는 밀실에서 결정된 사안의 권위적인 공표로서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는 기성의 그 억압적인 소통이 아니라, 그 누구도 들러리로 만들지 않는 축제와 같은 사건으로서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이때의 소통은 꼭 예술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예술가들이 주도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청년신규 사업의 내용들을 보면 전기세를 걷는 문제, 함께 음식 만들어 먹기, 어르신들과 대화하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주민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 등의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기획사업의 경우 섬의 소리를 채취하는 것, 생활문화 협동조합이라는 대안의 공동체도 등장한다.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왜 예술(문화)이나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가의 문제를 파고들다보면, 근대에 예술이라는 제도로 확립되기 이전의 보다 폭넓은 사회 공동체 속에서의 상징적 소통의 문제로 소급된다.
꼭 공공예술이 아니다 할지라도, 진정한 예술은 예술 이전의 소통으로, 그리고 예술 이후의 소통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율적 제도로서의 예술이 가지는 생산성만큼이나 그 한계성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면, 보다 보편적인 소통의 방식 속에 예술(문화)를 재맥락화 하고, 삶과 예술(문화)의 접면을 확대하고 활성화시킴으로서 서로를 갱신시킬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하다. 삶을 예술의 방해꾼이나 적대자로 삼지 않고, 협력자로 삼을 수 있는 자야 말로 진정 성공하는 예술가가 아닐까. 그것은 예술을 단지 대중화하는 것, 대중이 소비하기 쉽게 잘 포장하는 것, 너무 짙은 농도를 묽게 하고 사탕발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장에서의 예술(문화)는 현상이 아닌 구조적 변모를 요구한다. 자기들끼리만 축조해왔던 언어만으로 소통하는 비좁은 판을 벗어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제도가 만들어놓은 층층의 과정들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을 용감하게 현실에 던져 놓아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를 둘러싼 층층의 미술계 제도들은 예술이나 예술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으로 양으로 착취하고 있는 형국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이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이 예술을 통해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를 세상으로부터의 소리를 들음으로서 구체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는 가상이 아니라, 실제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압도적이다. 만약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가 예술가가 아니라면, 그 또한 예술이라는 보고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소통 역시 예술이라는 특수한 소통에서 배울 것이 많다. 한 분야가 오랜 역사를 통해 자율적으로 쌓아온 역량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마을 벽화를 그린다면, 재주 있는 이야기꾼이 마을 전래의 이야기를 각색한다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어떤 형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떤 의미가 어떤 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자이기도 한 평론가도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
요컨대, 여기에 참여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그는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한 규정을 변모시켜야 하며, 예술가가 아니라면 소통에 있어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상호변모의 노력이 없다면, 삶과 예술(문화)의 상호적 갱신은커녕 이도저도 아닌 것이 나올 확률이 크다. 아마도 그것은 삶과 예술(문화)가 합작한 최악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 열정만 가지고 맨몸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술이라는 말이 너무 버겁다면, 소통, 또는 문화라고 해두자. ‘지역 공동체 문화 만들기’라는 사업 명을 보면, 그 어느 것도 가벼운 단어가 없다. 특히 ‘공동체’와 ‘만들기’라는 단어가 그러하다. 소비자로서만 규정되는 익명의 대중 시대에 '공동체'와 '만들기'라니, 이 얼마나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 역행하는 개념들인가. 다양한 분야에서 참여를 이끌어내는 이 프로젝트의 역행의 몸짓들이 현실에 뿌리를 둔 보다 힘 있는 소통 방식을 창출했으면 한다.
출전; 2013 지역 공동체 문화만들기 워크샵(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