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 유적 앞에 서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세상은 다차원의 레이어로 포개져 있고, 그 레이어 중 일상의 층으로부터 이상이 속해져 있는 층으로 옮겨진 것 같다. 그렇게나 다르고 그만큼이나 생경한 느낌이다. 처음 봐서 생경하다기보다는 아주 오래 전 본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어서 생경하다. 친근해서 생경한 느낌? 바로 잊힌 전설처럼 아득해진, 흐릿해진, 희미해진 원형에 대한 느낌이고 감정이다. 존재에 원형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느낌이고 감정일 것이다. 그곳에 서면 바람도 다르고 공기도 다르고 시간도 다르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바람이며 공기며 시간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아마도 원형을 알아보는 세포가 따로 있을 것이고, 그 세포가 일깨워준 기억일 것이다.
유적이란 말은 의미심장하다. 정적이 흐르는? 적막감이 감도는? 흔적만 남겨진? 흔적으로 남은? 아마도 그 뉘앙스며 의미 모두를 아우를 것이다. 살다보면 그렇게 시간이 정지되고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들이 있다. 마치 세상을 등진 듯 숲속에 숨어있는 산사와 처음에는 꽤나 화려했을 꽃담의 빛바랜 색깔,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진 벽화와 그림에 상처처럼 아로 새겨진 균열과 스크래치, 원형을 상실한 채 다만 기억으로만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탑기단과 잡풀만 무성한 절터를 무심하게 지키고 있는 설핏 흔한 돌덩어리와 구별되지 않는 동자승, 멍해지는 순간과 순간적으로 아님 꽤나 지속적으로 현실이 잊힐 만큼 빠져드는 생각들, 흐르는 물에 동화된 나머지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키는 강물, 그리고 세상이 하얘지는 순간과 세상이 어둠 아님 침묵 속으로 함몰되는 순간, 이 모두가 유적이고 유적들이다.
그 유적들이 흔적을 상기시킨다. 무엇의 흔적인가. 한때 존재했었음으로 나타난 다만 과거형으로 기술될 수 있을 뿐인 것들의 흔적이며 부재가 자기 위로 밀어올린 존재의 흔적이다. 어쩌면 존재란 현재를 증언하기 위해 과거가 호출되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부재가 호명되는, 그리고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고 존재와 부재가 그 경계를 허무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박미화의 조각은 바로 이런 유적과 정적, 시간과 비시간(흐르지 않는 시간), 존재와 부재, 그리고 흔적의 언저리를 맴돈다. 없는 듯 있는, 어수룩한 듯 까칠한, 두루뭉술한 듯 정제된 조각으로 담담하게 말을 걸어오고 강력하게 파고들어 무의식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박미화_갤러리3 전시 전경
박미화의 조각은 각각 평면과 입체로 나뉜다. 그렇게 나뉘면서 하나로 통한다. 흙을 되는대로 주물 주물해서 만든 조각이나 흙을 덧바르고 긁어내 만든 회화나(도판회화?) 하나같이 현재를 증언하기보다는 과거로부터 호출된 듯 보이고, 발굴된 유적을 보는 것 같은 고답적인 느낌을 준다. 오랜 흑 벽에 난 알 수 없는 스크래치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색 바랜 벽화를 떠올려주고, 어둑한 성소에서 오랜 시간 시간을 잊고 있었을 성물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세속적이기보다는 성스러운 느낌에 가깝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인상에 가깝다. 분명 세속적인 소재며 현실적인 소재를 소재로 했음에도 이 도저한 성스러운 느낌이며 비현실적인 인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느낌이며 인상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그리고 특히 성스럽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
작가의 조각에는 그 흔한 드로잉이나 에스키스도 없다. 흙과의 직접대면으로 바로 시작된다. 그렇게 흙을 보고 있으면 발상이 떠오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흔히 직관으로 알려진 그 발상의 절반은 질료에서 건너온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작가에게서 건네진 것이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순간이며 사건이다. 질료의 의지와 상상력의 의도가 합치되는 것. 여기서 흙이라는 질료는 특이하다. 자기가 강해서 특이하기보다는 자기가 약해서 특이하다. 이를테면 조각가들이 다루는 재료들이 천차만별이지만, 그 중 흙은 가장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재료다. 외부로부터의 의도에 어떠한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않는, 마치 자기 에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재료다(어쩌면 에고 없음은 순수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스스로는 에고가 없으면서 다만 자기 외부로부터의 에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재료가 작가를 흥분시키기도 하고 난감하게도 한다. 질료의 의지라고 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수동적인 재료라고도 했다. 바로 흙의 이율배반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흙의 자기 없음은 사실은 가장 강력한 자기주장의 역설적 표현일지도 모르고, 이미 완성된 형태(에이도스)의 자기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이미 완성된 형태를 누가 어떻게 알랴. 작가의 조각에서처럼 질료에 직접 대면하는 작업이며 직관적인 작업은 그래서 어렵고 매력적이다.
그렇게 되는대로 주물주물 만든 것 같은데도 작가의 조각은 희한하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다. 어눌하면 어눌한 대로, 어수룩하면 어수룩한 대로 그 자체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어떤 형태의 정점처럼 보인다. 흙 속의 에고 아님 에이도스와의 지난한 소통의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마침내 사물이 자기를 내어주고 열어 보이는 때가 온다고 했다. 그리고 세계의 개시라는 말로써 그 시점이며 사건을 표현했다. 작가는 말하자면 그렇게 흙이 내어준 자기며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흙의 본성과 존재의 원형이 하나로 삼투되는 경지며 차원을 열어 보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어눌하고 어수룩한, 자연스럽고 편안한, 가식이 없으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형태 위로 얼굴이 부각된다. 그렇게 부각된 얼굴들은 평면이나 입체 할 것 없이 또렷한 게 하나도 없다. 저게 얼굴이지 싶은 선입견이 아니고선 쉽게 얼굴임을 알아볼 수가 없는 얼굴들이다. 혹 작가는 얼굴이 아닌 비얼굴을, 얼굴 뒤에 숨겨진 얼굴을, 얼굴에 포개진 얼굴을 그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가. 주체는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 그래서 주체를 대리 수행하는 주체가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그 가면 뒤에 숨은 주체가 아이덴티티다(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얼굴은 주체를 대리한다. 그러므로 가면 뒤에 숨은 얼굴, 얼굴 뒤편의 얼굴에 대해선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는 주체에게마저 낯설다. 이렇게 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설명이 되고 오리무중의 얼굴이 해명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마저 낯선? 바로 주체의 타자이며 주체인 타자이다(자기소외?). 나는 얼이다. 나는 나의 얼을 본적이 있고 서로 대면한 적이 있는가. 얼굴은 얼의 꼴이란 말이며, 얼이 거하는 굴이란 의미이다. 흔히 얼굴이 어둡다느니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말에서 어두운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얼이다. 이처럼 얼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도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작가는 바로 그런 얼의 꼴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예 목이 잘린 얼굴이 얼굴의 또 다른 지점을 지시한다. 바로 암시다. 예술은 어쩌면 암시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린 그림으로써 그리지 않은 그림을 암시하고, 만든 형상으로써 만들지 않은 형상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그림이란 그린 그림과 그리지 않은 그림이 어우러져서 완성되는 것인데,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그린 그림보다는 그리지 않은 그림 쪽이다. 그리고 그린 그림은 스킬로 잡을 수가 있지만, 그리지 않은 그림은 전적으로 감각의 몫이다. 없는 것을 붙잡는 일이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의 층위로 불러내는 일이다. 그렇게 알아볼 수 없는 얼굴 뒤로, 그림자 속에 숨은 얼굴 뒤로, 아예 잘려나가고 없는 목 뒤로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공허하고 텅 비고 꽉 찬 내면이다. 외면이 닫히면 내면이 열린다. 외부로 감긴 눈은 내부를 향해 열린다. 작가는 혹 이목구비가 생략되거나 약식 표현된 얼굴 같지 않은 얼굴을 매개로 사실은 심안과 혜안의 문제를 건드리고, 나아가 불교에서의 진아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 표면에 균열이 간 깨진 창틀이며 창문도 덩달아 이해될 수가 있다. 눈의 문제이며 보는 것의 문제이다. 그리고 보는 것은 삶의 문제(관점)이며 조형의 문제(감각)이기도 하다. 다시, 무슨 말인가. 흔히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마음이 창이란 말이며 창이 곧 마음이란 의미이다. 창은 말하자면 마음의 눈에 해당한다. 그 눈에 균열이 갔다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며, 그 상처는 지금까지 창이 향했던 외면을 통해선 치유되지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외면을 향하던 창이 닫히고 재차 내면으로 열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두루뭉술한 얼굴이 내면의 표상이 될 수 있었고, 목 잘린 얼굴(토르소)이 내면의 덩어리며 자의식의 덩어리가 될 수가 있었다.
공허하고 텅 비고 꽉 찬 내면이라고 했다. 자의식의 덩어리라고도 했다. 다시, 무슨 말인가. 여기서 작가의 피에타가 이해될 수가 있다. 작가가 껴안고 있는 피에타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며(알다시피 피에타는 연민이란 말이다), 공허하고 텅 비고 꽉 찬 내면이며, 자의식의 덩어리였다. 작가의 피에타는 전작에서의 선인장과 통한다. 전작에서 작가는 선인장을 피에타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인장을 피에타처럼 끌어안고 산다. 내 연민이어서 버릴 수도 없고, 가시가 돋쳐서 꼭 끌어안을 수도 없다. 그저 삶이 그런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껴안고 살 수 밖에. 서두에서 작가의 조각은 왠지 성스러운 느낌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 성스러운 느낌이 사실은 자기연민이었고, 내면의 덩어리였고, 부조리한 삶에 대한 자의식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성은 속 속에 숨겨져 있었고 잠자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속 속에 숨은 성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모든 추락하는 것들은 날개가 있다. 날개는 무엇인가. 바로 날고 싶은 욕망이며 자기(에고)를 벗고 싶은 욕망이며 거듭나고 싶은 욕망이다. 날개가 없으면 추락도 없다. 그러므로 추락하는 것들은 날개가 있다는 말은 추락하는 것들은 욕망(아님 이상)이 있다는 말로 고쳐 읽을 수 있고, 날개가 없으면 추락도 없다는 말은 에고가 없으면 추락도 없다는 말로 고쳐 읽을 수가 있다. 앞에서 어쩌면 순수란 에고 없음을 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불교에서의 진아와도 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결국 에고가 자긴데 없애고 말고 할 수가 있는가. 여기서 다시 딜레마에 빠진다. 버릴 수도 그렇다고 꼭 끌어안을 수도 없는 피에타(자기연민 아님 자기애 아님 자의식)처럼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날갯죽지를 참을 수밖에. 날아오르지도 그렇다고 정박하지도 못한 채 어중삥삥한 삶을 견딜 수밖에. 그렇게 작가의 날개는 날아오르기 위한 도구로서보다는 부조리한 삶의 표상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번 전시가 통로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자기를 벗고 거듭나는 계기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며 관문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가 그 통과의례를 잘 수행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추락하지 않고 비상할 수가 있을까. 설령 비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쓸모 없지만 자기를 증명해주고 존재를 증언해주는 날개를 쓰다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