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축을 따라 발생하는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전통 매듭을 변주해 독특한 기하학적 공간(space)을 만든 정소원 전의 출발점은 자기 자리(place)에 대한 관심이다. 일련의 형태를 만드는 매듭을 하나의 단위로 삼아 엮여지는 공간은 구조적 규칙성을 가지면서도, 발생과 소멸을 암시하는 잠재적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전통공예의 기법을 활용한 수공적 섬세함은 구조와 잠재적 운동감이 공존하는 패턴을 만든다. 이 규칙 바른 공간들이 원초적 혼돈의 상징인 물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이 전시의 대표작은 짙은 남색으로, 남태평양의 이국적 섬에서 있었던 스킨 스쿠버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실재에 대한 원초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넓고 깊은 바다는 공간의 원형적 모델이 되며, 갖가지 다양한 공간들을 품고 있다. 가령 물고기 떼들이 움직이는 타원형의 궤적이나 산호초 무리가 만들어내는 솟은 형태, 발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물속의 깊은 어둠의 공간이 그러하다.

작품의 주제를 공간으로 설정했을 때,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바다를 먼저 떠올린 것은 시사적이다. 인간이 최초로 기거한 공간은 양수로 채워진 모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을 깨고 나온 개체는 자신의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개체가 속할 또 다른 공간 만들기의 과제는 개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만드는 공간의 원천이며, 물이라는 무정형의 실체에서 추출한 다양한 구조는 형태화된 삶 그 자체와 중첩된다. 매듭으로 이루어진 단위구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공간의 출발인 물은 무정형에 머물지 않는다. 무정형적 측면에 주목할 때,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물은 탄생만큼이나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깊은 바다 속에서 수초들이나 머리카락의 불규칙적 움직임 보다는, 화학식 H2O로 표기될 법한 규칙성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수소와 산소가 자연 법칙에 의해 결합되고, 분자들이 운동하기 위해 빈 공간이 필요한 관계적 실체 말이다. 이 우주는 소립자들의 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타원형, 또는 선형의 움직임조차 작가가 정한 규칙에 충실하게 따른다.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공간에 대한 비유는 자연의 법칙에 상응하는 예술의 규칙으로 전환된다. 규칙성이 극단에 이르면 하나의 공간에 붙박힌 무생물과 다를 바 없지만, 생명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어떤 공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양한 비유로 확장될 공간에 대한 상상의 출발은 바다라는 결코 고갈될 수 없는 거대한 실재계였지만, 그것을 실체화하기 위한 방법과 재료는 전통 매듭에서 왔다.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전통 매듭은 한국 전통매듭협회까지 가서 기법을 배우도록 했으며, 전시된 작품은 그것을 응용한 것이다. 하나의 기법이자 유닛은 3차원으로 확장되었으며, 삶에 대한 구체적 비유가 되었다. 하나의 선이 얽히고설켜 그자체로 조밀한 공간을 형성하는 매듭은 시간과 결합하여 다양한 상황을 비유하게 된다.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매듭지어야 하며, 매듭을 풀어야 하며, 매듭을 끊어야 하는가. 매듭과의 관계 속에서 생과 사, 성공적인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결정된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정소원의 작품은 기하학적 공간과 삶의 자리가 유비적 관계로 엮이면서, 단지 기발한 형태들의 조합을 넘어서 풍부한 서사로 거듭난다. 이 전시의 가장 큰 작품은 타원형인데, 원과 달리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그것은 행성의 궤도를 떠오르게 하면서 우주적 스케일로 고양된다. 도넛 형태의 타원은 유한하면서도 복합적이다. 타원의 하단부 중앙에 8쪽 잎 새의 형태가 양쪽으로 조금씩 중첩되면서 밀도를 높여가서 맞은편에서 최대로 높아진다. 벽에서 약간 떨어져 설치되어 벽면에 떨어지는 그림자도 복잡한 선의 흐름에 가세한다. 허공에다가 막 그어댄 것 같은 형태지만, 엄격한 규칙이 관철된 복잡 구조이다. 밝은 파랑색 매듭실에 본드를 입혀서 만든 짙은 바다색은 이 작품이 물고기들의 무리지은 유영에 영감을 받았음을 예시한다. 철새나 물고기 등, 떼를 지은 이동의 궤적은 삶 자체가 어떤 공간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전유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여러 개의 선으로 중첩된 8개의 꽃잎 형태가 겹쳐지는 작품은 전진 뿐 아니라, 회전 움직임의 환영을 연출한다. 8개의 잎은 무수한 선의 다발로 진전하면서 중심을 이동시킨다. 그것은 차츰 깊어지는 공간을 표현한다. 벽에 떨어지는 선의 그림자는 물의 일렁임도 연상시킨다. 벽면에서 쌍으로 솟은 작품들은 산호초 뿐 아니라, 우산이나 마늘의 형태와도 비슷하다. 바다 속 산호초뿐 아니라, 우산도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며, 마늘도 그 독특한 향을 통해 공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산호초처럼 다채로운 색 또는 무채색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시장 천정에서 내려오는 푸른색 계열의 끈이 엮여 만들어진 원기둥은 물기둥을 이룬다. 액자 한 쌍은 작품이 기원한 형식적, 내용적 기원을 알려준다. 하나는 패턴을 가늠할 수 없는 매듭 그 자체의 면모를 예시하며, 다른 하나는 가운데가 불룩한 물고기의 눈 같은 어안의 시점을 매듭으로 표현했다.
전통 공예 기법에 존재하는 4개의 잎 모양을 8개로 확장하면서 만들어진 공간구조는 꽃처럼 중심이 있다. 그러나 정소원의 작품에서 그 중심은 항상 이동 중이다. 작품들은 공간의 구조적 측면 뿐 아니라, 발생적 측면도 강조한다. 신화나 종교, 정치와 건축 등에서 두드러진 중심의 상징은 안정감을 주지만, 현대인은 극단의 보수주의자들 빼놓고는 더 이상 그러한 정적인 우주에 살지 않는다. 중심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중심의 상징은 향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중심은 불가피하게 주변을 만들어내고, 차이가 차별이 되곤 하는 인간 사회에서 주변화란 배제와 소외를 의미한다. 현대는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중심이 상실된’(제들 마이어) 사회이다. 현대의 철학 역시 ‘기존의 절대적인 근원, 중심, 현존(presence) 등의 존재’(데리다)를 부정한다. 중심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중심의 상징을 강조하는 기존의 종교적 가설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면서, 중심의 상실이 꼭 불화, 타락, 비존재라는 카오스로의 침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소원의 작품은 대칭을 이루는 단위구조의 중첩을 통해, 중심 대신에 중심의 흔적들과 궤적들을 드러낸다. 변화는 미묘하게 조율 된다. 고정된 중심에서 자리를 벗어난(displace) 그것들은 신의 자리 대신에 타자, 즉 사물, 사람, 혹은 표지 안에 자리 잡음으로서 영속성을 성취한다. 여기에서 시간적 체계와 공간적 체계는 겹치게 된다. 시간의 축을 따라 변화하는 작품 공간은, 스미스의 가설처럼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중심 대신에 중심의 이동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주장에서, 행위의 의미는 제작(making)의 문제보다는 표시(marking)의 문제이며, 건설의 문제보다는 기억의 문제이다. 그것은 건축의 언어가 아니라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이다. 바닥 보다는 벽에 의지하는 정소원의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보다는 회화적인데, 그것은 [자리잡기]의 구별을 따르자면, ‘제작’보다는 ‘표시’라는 맥락에 놓여있다. 어떤 형태와 지형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 요소들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형태 보다는, 차이를 두는 반복,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동의 부산물이다.

그것은 주어진 자리보다는 자리를 만드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스미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이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다양한 기원을 가진 것들을 세계시장화와 정보화로 동질화함으로서, 클론화 된 개체들에게 정해진 자리를 강요하는 체계화는 모든 공간을 레드 오션화 한다. 이러한 체계의 음험한 기도와 예술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또는 달라야할 것인가. 예술은 종교처럼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서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리는 물리적일 뿐 아니라, 의미의 공간이다. 정소원은 무의미한 추상적 공간 대신에, 의미로 가득한 자리로의 변모를 추구한다. 이 변모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 차이나는 기호들의 중첩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적이기 보다는 구조적이다. 이 기하학적 작품들은 구조를 통해서 인간이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기성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을 통해 현대 사상의 근간을 만들었던 구조주의 역시 그러했다. 일반적이고 비인간적(impersonal)인 구조주의는 ‘주체의 자연발생적이고 지적인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해방되는데 필수적인 연속적 탈중심화’(장 피아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구조는 선험적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다라는 원초적 공간에서 출발한 정소원의 작품 구조 역시 발생적 요소가 강조된다. 구조는 구성과정 상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동적인 의미에서 이해된 구조와 주체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냥 구조주의가 아니라, ‘발생학적’ 구조주의자인 장 피아제는 [구조주의]에서 살아있는 유기체 역시 물리 화학적 체계이며, 주체 활동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구조가 자율 통제적 변형의 체계라면, 유기체는 전형적인 구조이다. 선과 마디들로 이루어진 유전자의 체계는 생물학적 구조주의를 보여준다. 변이의 기본적 기제는 유전자의 재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구조와 유기체(주체)는 기존의 종(種)개념처럼 질적 차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료를 가지면서 연장과 운동이라는 양태로 환원’(라이프니츠) 될 수 있다. 우리의 몸 역시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구조의 궁극적인 결절 점 내지 교차점’(화이트헤드)이라는 구조로 충만하다.
정소원의 작품이 말하듯이, 주체와 공간(구조)는 중첩될 수 있다. 구조가 주체를 만들고, 주체 또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구조를 선험적이고 추상적이고 무중력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인간과 사회, 역사의 문제로 재해석함으로서, 의미 있는 형식을 만드는 것이 현대 예술의 과제이다. 정소원의 작품에는 조밀하게 옥죄는 듯한 매듭의 단위구조로부터 심해라는 거대한 실재계에 이르는 공간의 계열이 있으며, 이 구조적 공간과 함께 생성 소멸하는 주체의 운명을 말한다. 공간적 비유는 시간의 축을 따라 서사를 만든다. 하나의 단위구조로 형성된 구조는 자율성을 가지지만, 그것은 조건에 따라 변형된다. 공간과 시간은 상호보완적이다. 공간 구조는 닫혀 진 전체 속에서 어떤 본질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축을 따라 생멸한다. 정소원의 작품에서 공간, 또는 자리에 얽히고설킨 인간의 이야기는 시간이라는 축을 따라 펼쳐지고 접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