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의 동시대성

드로잉, 생각의 시작 전(4.5-4.28, 갤러리 화이트 블록 外 헤이리 내 10개 전시장)

 

이선영(미술평론가)

  

갤러리 화이트 블럭을 비롯, 헤이리 지역 내의 미술관과 갤러리 10개 장소에서 43명의 작가가 참여한 ‘드로잉, 생각의 시작’ 전은 내년에 개최할 예정인 ‘드로잉 비엔날레 DMZ 헤이리’가 사전행사로 열린 프레 드로잉 비엔날레 공모전이다. 분단의 접경지역이면서 문화지구를 이루고 있는 지역성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출발하는 이 행사는 드로잉의 개념을 너무 확장하여, 전시제목을 뺀다면 드로잉 관련 전시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달랑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렸을 것이라 생각되는 드로잉에 대한 통상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다. 전시 서문에 의하면 ‘연필, 펜, 오일 페인팅, 아크릴, 파스텔, 섬유, 비디오, 금속조각, 도자기, 사진, 판화, 프레스코, 동양화, 애니메이션, 디자인, 개념, 설치 등 각 영역에서의 실험적 작품들’이 두루 출품되어 있다. 전시제목에 포함되어 있듯이, 드로잉은 ‘생각의 시작’이면서, 작업 전후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작업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변화시킨다. 중간과정을 넘어서는 드로잉에는 어떤 발상이 시작되는 여린 새순 같은 단계와 기본 뼈대 뿐 아니라, 살이 붙어있을 때의 모습을 함께 보는 즐거움이 있다. ‘생각의 시작’이라는 부제는 소박한 듯 하 면서도 넓은 범위를 아우르려는 전략이다. 

 


정효영, 설치, 2011년.

 

선으로 시작되는 드로잉은 보편적으로 경험된다. 소묘 뿐 아니라 글자를 쓸 때도 선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전면에 내세운 이 전시에서 선은 사고의 친숙한 수단일 뿐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에 대한 뛰어난 사상가이자 소묘가이기도 했던 파울 클레는 [현대미술을 찾아서]에서 자신은 완성된 형태 자체보다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힘에 더 큰 가치를 둔다고 말한 바 있다. 화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특정의 세계에 현재 외관상 나타나 보이는 모습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우연히 고착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며, 있을 수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작가의 자유는 위대한 자연처럼 저절로 자라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모든 것의 원천에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클레는 ‘요소, 대상, 의미, 스타일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진실로 폭넓은 작품을 꿈꾸는 때가 있다’고 토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이 전시가 목표로 하는 ‘생각의 출발’이자 확장된 의미의 드로잉의 개념에 가깝다. 확장된 개념과 관련하여, 전시가 가지는 넓은 범위는 공모전이라는 성격에서도 기인하는 것 같다. 물론 통상적인 비엔날레처럼, 전시감독이 따로 있다고 해서 전시의 일관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드로잉의 개념이 아무리 열려있다 할지라도 주최 측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방향타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특히 전시연출에서 불거졌다. 

 

드로잉은 말 그대로 미술 작품의 기본이기 때문에, 누구의 어떤 작품을 선정해도 두루 걸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전시공모를 통해 발굴한 작가의 작품을 (프레) 비엔날레라는 특화된 맥락에 맞춰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데, 그 부분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각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10개 전시장의 스텝들이 구체적으로 개입해야 할 부분이었겠지만, 각 전시장에 임의적으로 뿌려진 듯 한 출품작들은 작가의 자율성에만 맡긴 듯 들쭉날쭉 이다. 이 전시 자체가 본격 행사에 앞선 밑그림에 머물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기술적으로 완성될 작품의 밑그림 취급을 받던 고전주의에서 벗어나서, 작가의 직관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날 것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드로잉은 재현이 아니라 생성, 결과가 아닌 과정에 방점에 찍히는 현대미술의 핵심에 놓인다. 현대미술은 가장 기본적인 과정으로부터 첨단의 사고를 길어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기본으로부터 출발하는 조형 언어의 혁명이라는 현대미술의 정신과 다소간 거리감 있게, 어느 날부터 ‘비엔날레 스타일’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주어진 공간을 스펙터클하게 장악해가면서 관객을 압도하는 물량주의가 대표적이다. 많은 비엔날레가 있지만, 드로잉 비엔날레라는 것이 있어도 좋을 이유는, 적어도 구조보다는 발생을 중시하는 드로잉을 앞세웠을 때 겉포장에 힘을 쏟는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는 기대에서이다. 

 

‘생각의 시작’으로서의 드로잉은 개념이 드로잉을 통해 드러나는 작품들에서 분명하다. 갤러리 소소에서 전시된 박재환의 작품 [월식], [일식도]는 전시장의 조명, 작품, 관객사이의 관계를 우주적 현상과 비교했다. 드로잉은 미시적 일상과 거시적 구조 같이 차이가 큰 차원 사이의 유비를 가능하게 한다. 리 앤 박 갤러리의 강석호는 남과 북을 가르는 선 주변의 군사시실을 이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선 안팎에서 행해 진 작업과정을 사진에 담는다.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중의 하나가 글자이다. 송윤주는 상형문자인 한자 초기 서체를 차용한 작품을 통해 기의와 기표의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그 작품에서 그리기와 쓰기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백순실 미술관의 윤기언은 먹의 세필을 이용하여 미세한 표현으로서의 손의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여기에는 동양화의 선묘의 과정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갤러리 화이트 블록에 전시된 김명진의 작품은 거의 일획으로 그려진 듯 선이 활주하는 꼴라주 작품이다. 한지 꼴라주는 이질적인 것들이 복합되는 장이며, 어떤 풍경이 되자마자 그것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선의 힘이 있다.  

 


김명진, [land-eascape], 장지에 홍묵, 천연안료, 한지,  2011년.

 

공간 전체를 드로잉 하는 방식은 드로잉이 평면을 넘어 설치로 확장될 수 있게 한다. 리오 갤러리의 이윤미의 작품  [space drawing]은 강철이나 실 같은 여러 종류의 선들을 이용하여 화이트 큐브 전체를 캔버스 삼아 그린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환영에 머물지 않는다. 다양한 굵기의 선들은 조금씩 원근법으로부터 어긋나 있다. 백순실 미술관의 모준석은 금속선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하여 건축적 공간을 구축한다. 동 파이프나 동 선은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허의 공간 또한 마련하고 이 빈자리에 타자를 초대한다. 보라리는 뜨개질로 만든 선적 구조물로 공간을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다소간 낮은 천장에 설치된 작품은 마치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을 듯이 굼실거린다. 재료들이 덩어리째 얼기설기 붙어있는 듯한 엄익훈의 구조물은 그림자라는 허의 공간에서 분명한 도상으로 완성된다. 각도에 따른 관객의 착시까지 함께 계산한 이 독특한 공간 드로잉은 존재가 아니라, 되기에 방점을 찍는다. 

 

드로잉에 포함된 잠재적 움직임은 실제 움직임으로 전화되는데, 전시 오픈 날 갤러리 화이트 블록에서 행해진 유목연의 [드로잉 박스]는 관객이 넣는 동전에 반응하여 드로잉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박스와 결합된 작가의 몸은 자판기 같은 드로잉 생산 기계가 된다. 드로잉이 아니라면 결코 그렇게 순발력 있게 그려질 수 없을 것이다. 박미라의 [발굴의 현장]이나 [변화의 현장]은 싱글 채널 비디오와 프로젝터 등을 동원하여 재현의 결과물이 아닌, 사건이 생성되는 현장을 포착한다. 정효영은 지각과 기억 사이의 시공간을 드로잉과 인조가죽 손바느질로 표현한다. 살덩어리같은 오브제를 움직이는 가느다란 실이나 와이어는 공간적 지각과 시간적 기억을 잇는 선이 된다. 한계를 짓는 선은 동시에 넘기 위한 경계이다. 논밭예술학교의 한지민은 리노 컷 기법으로 새와 인간이 합체된 괴물을 표현한다. 갈 곳을 정해놓지 않은 선의 흐름은 종의 한계를 넘은 괴물을 창조한다. 

 

경계선 상에 있는 존재는 한지민처럼 신화적 형상을 할 수 도 있지만, 김철환처럼 비체(abject)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이나 털 같은 것을 고풍스런 진열장 안에 안치하는데, 신체라는 민감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 애매모호한 것들은 가장 밑바닥 정서부터 숭고에 이르는 감정의 진폭이 있다. 아트 팩토리의 전희수의 작품은 잡다한 이질적인 것들이 복합되어 형상을 이룬다. 그것은 동일자를 몸통을 이루는 타자를 드러내는데, 무엇으로도 변형될 수 있고 무엇과도 결합될 수 있는 선적 흐름은 이러한 이질적 접합을 자연스럽게 수행한다. 드로잉은 자기 안의 타자 뿐 아니라, 타자들 간의 동질성 또한 표현할 수 있다. 백순실 미술관의 장양희의 작품 [anonymous face]는 기둥이나 블라인드처럼 갈라진 투명 구조물에 출력된 익명의 얼굴을 통해서 그 사이를 배회하는 관객의 얼굴 또한 비춘다.

 

여러 전시장에서 선보인 43명의 작품들은 제각각 다양했지만, ‘주체에서 사건으로’, ‘재현에서 생성으로’, ‘존재에서 되기로’, ‘현실성 이전의 잠재성으로’(들뢰즈) 방점이 이동하는 현대철학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작가의 의식이나 의도가 그럴 수 있지만, 드로잉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를 자연스럽고도 넉넉히 품을 수 있다. 자연 발생을 굳이 제어하지 않는 날것의 움직임은 드로잉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에서의 확고한 근대적 주체 대신에, 나를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먼지 같은 점으로 시작된 정처 없는 선은 생각과 감정을 눈덩이처럼 덧붙여, 주체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한다. 드로잉은 확고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드로잉은 재현의 바탕이며, 바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의 들끓음으로 요동친다. 드로잉은 예술작품은 현실성보다는 어떤 잠재성 안에 잠겨 있음을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듯이 예술작품은 자신의 발생적인 미분적 요소들, 잠재화된 요소들, 배아적 요소들을 통해 형성되는 어떤 완결된 구조를 끌어들인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생각의 발생은 바로 이러한 발산하는 선으로부터 비롯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