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중호 전 (6.21-8.10, 하이트컬렉션)

 

예의를 잃지 맙시다라는 다소 어리둥절한 제목은 전시의 출발이 된 염중호의 사진을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인간은 자연, 특히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인 나무에게 예의를 상실한지 오래다. 인간은 차 몇 대 더 세우겠다고 수 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내고, 초록빛 자연을 존중할 때조차도 유행 따라서 수시로 조경을 바꾸곤 한다. 염중호는 도시 속에 존재하는 식물에 주목했는데, 식물들은 대부분 인간에게 착취되고 방치되어 도시 한 귀퉁이에서 거의 빈사 상태로 자리를 지킨다. 그의 작품에서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비유기적 요소를 유기적 요소로 전환시킴으로서 지구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유일한 생명체로서의 위상이나 지상과 천상을 잇는 우주적 축으로서의 상징성은 간데없다. 그의 초췌한 식물들은 야생이 거세된 채 인간의 변덕스런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속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식물들은 버려진 물건같이 볼썽사납다. 그러나 사진 특유의 즉물적 시점은 구체적 발언이나 강한 표현 보다는 중성적 여백을 남겨둔다. 이 여백, 또는 조화를 이루지 않은 채 맞부딪히는 사물들의 틈새에서 해석이 번성하고, 새로운 텍스트가 중첩될 수 있다. 염중호의 사진은 완성된 의미를 관객(소비자)에게 투명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다시 씌여질 것을 요구한다. 식물에 내재된 다산과 재생의 이미지는 대화적 상상력이 발현된 텍스트 생산을 통해 풍요롭게 개화되고 열매 맺는다. 그는 2012타인의 취향전에 이어, 닫힌 작품이 아니라, 열린 텍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일곱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진전시켰다. 른 텍스트로부터 직조된 텍스트에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 있다. 

  

 

염중호, 잉크젯 프린트, 2012년.




염중호의 사진은 전시의 출발이 되었지만, 참여 작가들은 그의 한 작품을, 또는 전반적인 그의 작품을, 때로는 사진이 아니라 드로잉 서신교환을 통해 새로운 작업을 진행했다. 강석호와 권경환은 칙칙한 주변 환경에 존재감 없이 매몰된 식생의 면모를 보여준다. 주변과 구별되지 않음, 그것은 바로 죽음의 특성이다. 김수영은 수직적 구조물인 나무와 근대건축물 사이에서 유비적 관계를 도출한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인간과 마주한 나무의 수직성은 나무와 인간을 비유시켜왔는데, 숲을 밀어내고 구축된 도시 역시 수직적이다. 그러나 이 인공 구조물은 나무처럼 호혜적인 것이 아니라, 집중을 통해 성장하고 더 많은 타자들을 생산하는 억압적 체계이다. 염중호의 사진에 체계에 의해 타자화 된 자연이 있다면, 자연을 대체하는 김수영의 새로운 자연에는 감옥 같은 패턴이 있다. 로와정은 축소모델을 통해 문명에 완전히 복속된 자연을 보여준다.  

 

이리저리 비틀려 고목을 흉내 내는 모습, 현대적 주방에 자리한 화분은 사라져 버린 원초적 자연을 대체하는 초라한 모사물이다. 최대진의 작품에는 문명에 의해 가장자리까지 몰린 식물의 역습이 있다. 그의 벽화에서 어디선가 이식된 나무는 조그만 홍수에도 쓰러져 자동차를 부순다. 벌목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확성기가 보행기에 걸려 있는 입체작품은, 쓰러지는 나무만큼이나 취약해질 인간의 존재 조건을 상징한다. 리오넬 샤바테는 몸에서 배출된 손톱, 각질 같은 비체(abject)로 꽃이나 나비 인간을 형상화한다. 위생과 건강을 위한 배려로 몸에서 분리되어도 다시 생겨나곤 하는 그 역겨운 것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예술작품으로 재생된다. 박진아는 사진 대신에 끝말잇기 같은 드로잉 서신으로 교감했다. 이들의 협업처럼, 자아의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은 소외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월간미술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