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의 연금술
검은 사각형 전 (7.12-8.11, 갤러리 101)
검은 성자와 하얀 악마 전 (7.5-7.18, 쿤스트 독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검은 사각형’ 전과 ‘검은 성자와 하얀 악마’ 전은 중견 평론가가 기획하고 젊은 작가들이 참여했다는 점 외에, 블랙이라는 코드, 그리고 재현과 관련된 종교적 기원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시주제어와 연관된 유심론과 초월성은 요즘 시대에 낯선 것으로 다가오지만, 바로 그 점이 새롭다. 우리 미술계에서 전시의 기획 및 조직단계에서 본격적인 비평적 담론이 참여하게 됨은 어느 시점부터 드물어진 상황이라 더욱 흥미롭다. 두 전시는 대안적 성격을 띤 전시공간에서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기획자와 작가들이 자신들이 해왔던 작품을 바탕으로 탐구적인 작품을 선보인 전시였다. 검은 사각형 전은 평론가 이대범이 만든 공동체 ‘roundabout’의 기획전으로, 작가(팀 포함) 30여명이 참여하여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재해석했으며, 검은 성자와 하얀 악마 전은 평론가 김성호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두 작가를 대면시켜 색다른 울림을 만들었다.
하나는 어떤 구조를, 다른 하나는 어떤 주체를 전제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참여한 전자는 개별적 차이를 드러냈으며, 단 두 명이 참여한 후자는 두 구조라는 대조 항 사이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강렬하게 다가오면서도, 전시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작품일지 선뜻 예상할 수 없는 전시제목들에는 성상, 또는 성상파괴와 밀접한 현대미술의 한 자락이 포함된다. 현대미술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추구해온 예술의 원초성은 불가피하게 예술의 종교적 기원과 마주하게 한다. 두 전시에서 성자와 악마라는 대조 항은 물론이거니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역시 성상의 전통과 관련된다. 물론 관련이란 현대미술이 그 종교적 원형에서 얼마나 탈주했는가, 그러나 탈주를 통해서 얼마나 주류에 강력하게 복속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역설을 의미한다.
사각형의 기하학적 정의는 하나이겠지만, 색채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검정은 무려 50가지이다. 아무리 검은 사각형이라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 같은 화두가 던져졌다 할지라도 다양성은 열려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 전은 개성적인 다수의 작가들이 출발하는 최소한의 지점만을 제시할 뿐, 최초의 단서로 환원될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가 참여하는 기획전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이 왜 한자리에 모여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있다. 기획자가 참여 작가들에게 제안한 가이드라인에는 모든 작품 의 제목을 [검은 사각형: 000000]로 해달라는 주문이 있다.
예상과 달리, 참여 작가들의 면면은 평소에 사각형이나 검정을 작품의 주요소로 삼았던 이들과는 거리가 있고, 어떤 화두를 던졌을 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소화할 것 같은 이들이 선정되었다. 물론 홍수연처럼 이 기회에 자신의 원래 작품 스타일의 블랙 버전을 보여준 이도 있다. 말레비치의 그 문제의 작품은 기나긴 재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는 것으로, 조형예술가라면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작품/담론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100년 전 작품과의 대화를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자신의 작품으로 풀어낸다. 흰 바탕에 검은 연필로 칠해진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3)은 추상미술이 유럽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시작된 시기에 재현의 역사에 방점을 찍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재현의 역사를 다룬 책 [그림자의 역사]에서 그 작품의 출발을 1913년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 무대 디자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무대를 가리는 검은 휘장 막은 빛의 형이상학에 조응하는 시각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원근법적 무대장치를 전제하는 재현, 그것을 가리는 검은 막은 작은 그림이 되어 반(反)재현주의를 알리는 강력한 선언문이었다. [그림자의 역사]에 의하면, 재현의 체계는 동일성의 질서에 의해 고립된 공간으로, 초월적 가상의 장소가 된다. 재현적 공간은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오며 유기적인 질서로 조직된다.
그러나 검은 사각형은 동일성 대신에 타자를 존재 대신에 부재를 내세움으로서, 플라톤부터 시작된 오랜 재현의 역사에 분기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렇게 탄생한 추상미술 역시 주류 미술사의 역사주의적 담론에 포함됨으로서, 어떤 중심을 재현하게 된다. 말레비치가 죽은 뒤 그 머리 위의 벽에 검은 사각형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자리는 러시아의 전통에서 성상이 위치해야 할 자리였다. 현대미술가의 성상파괴적인 태도는 다시금 성상화 된다. 재현주의는 극적 반전을 통해 연장된 것이다. 재현이라 함은 어떤 중심(권력, 힘)을 체계적 장치를 통해 다시 나타냄(re-presentation)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검은 사각형을 권력으로 해석한다.
작가로도 참여한 이대범은 유력 일간지의 지면 일부를 검은 색으로 지움으로서 검열을 떠오르게 했다. 권력이 담론이라면 그 역도 가능하다. 그는 또 다른 작품에서 400자 원고지의 칸칸을 여러 명에게 검은색 필기구로 채우도록 하여 다양한 담론이 만들어낼 대안의 권력을 제시한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라는 전통적인 필기의 습관은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겹쳐 쓰기를 이끌어냈다. 정용국은 현재 핫이슈가 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겹쳐서 인쇄하였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무익한 당쟁으로 무화되고 있는 현실을 풍자한다. 베베와 꿀꿀은 시 5편을 검은색 A4 용지에서 검은색 연필로 적고 지우개로 지워버린다.
권경환의 작품에 등장하는 검은 007가방은 남자라면 한번쯤 꿈꿔볼 절대 권력을 예시한다. 노순택은 검은 사각형을 흩뿌려지는 삐라를 통해 표현했다. 이득영은 말레비치의 [날으는 비행기](1915)의 시점같이, 공중에서 본 도시의 비전을 통해 근대적 사각형들이 만들어낸 인공생태계를 표현한다. 정직성에게 검은 사각형은 작품이 들고날 수 없는 비좁은 주거환경으로 나타난다. 검은 사각형은 동시에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했다. 문명기는 전시장 입구 벽면에 그린 [검은 사각형: 입구는 크고, 출구는 작습니다]에서 전시 공간 자체를 언급했으며, 이광호는 자신의 대형 초상화 일부를 다시 프레이밍 한다.
정경심은 ‘셀카’를 찍고 있는 장면을 모니터로 보여주는데, 모니터야 말로 검은 사각형의 현대적 후예라 할 만하다. 오늘날 검은 사각 틀로 만들어진 인터페이스는 어디에나 있고, 내가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때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권력의 장치이다. 그것은 어느 각도에서 보든 수도자를 응시하는 것 같은 신의 초상을 통해, 신이 나를 봄으로서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했던 신학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의 정치학이다. 검은 사각형은 모듈화, 코드화 되어 정보혁명과 맞물리고 편재하는 권력이 된다.
현대의 검은 사각형은 제러미 벤섬의 판옵티콘처럼 상호감시망을 이룬다. 재소자들을 일망으로 감시하는 원형감옥은 스스로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개별자들을 보는 것으로 상상하게 하여 권력을 자동으로 작동시킨다. 이전의 성상처럼 신성한 권력이 된 검은 사각형은 하위문화의 불경한 코드로 전복되기도 한다. 김웅현에게 검은 사각형은 총쏘기 놀이의 과녁이 되었고, 이동기는 거리벽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검은 스프레이로 신성시된 고급문화의 상징을 지운다. 김하림은 관객의 발자국으로 더렵혀질 사각형을 전시장 바닥에 깔아놓았다.
검은 사각형 전에서 문성식과 김학량이 검은색을 통해 빛을 끌어들였듯이, 검은 성자와 하얀 악마 전 또한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이분법을 활용한다. 색채의 연상을 풍부하게 활용하는 전시 제목은 금욕, 억압, 부정, 우울, 잔혹, 종말, 신비, 관료주의, 파시즘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완성도 높은 작품의 면면은 블랙의 우아함과 화려함 또한 놓치지 않는다. 보통 흑은 악마이고 백이 성자인데, 자리가 바뀌었다. 이러한 교차어법은 동일자 속에 내포된 타자를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변형 패널에 흑연과 그을음, 돌가루 등을 이용하여 추상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김수철이 ‘검은 성자’ 편이고, 자신의 분신이라 할 만한 캐릭터 ‘Mr, 곰탱이’를 통해 연극의 무대를 연출하는 신원재가 ‘하얀 악마’의 편이다.
김수철의 작품은 검은 사각형 전의 원형이었던 작품처럼, 재현의 경계 위에서 숭고함에 호소한다. 그것은 ‘상상력은 스스로의 극한에 도달’(칸트)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장-뤽 낭시는 [숭고에 대하여-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에서 상상력이 저 스스로로부터 넘쳐나는 것을 숭고라고 말했다. 물결처럼 울렁거리는 변형 패널은 사각의 검은 표면을 확장한다. 저자는 숭고의 특출한 예로 이미지의 사용을 금하는 부분과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는 구절을 든다. 지상의 ‘더러운’ 재료들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독특한 연마기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검정 표면을 허연 반사면으로 출렁이게 한다.
그의 작품의 연금술적 표면은 물질적 암흑에서 빛을 길어 올리는 마술적 기술인 ‘검은 예술’--연금술(alchemie)의 chemi는 아랍어로 검정을 뜻한다—이다. 이 연금술적 블랙에는 ‘멜랑콜리의 검은 태양이 새겨져’(네르발의 시) 있다. 전시장의 높은 천정을 이용하여 십자가처럼 배치한 방식도 ‘검은 성자’ 역할을 맡기에 충분해 보인다. 신원재의 작품은 천진한 아이의 장난감 같은 도상을 가학피학적인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곰탱이 하나는 공기에 잔뜩 부풀려진 채 공중을 떠돌고 있고, 다른 곰탱이는 출입문에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다. 또 다른 곰탱이는 온몸에 채찍자국 가득한 채 전시장 귀퉁이에서 벌을 선다. 순진무구의 캐릭터가 잔혹극의 주인공이 되어 현대사회가 층층이 마련해 놓은 잔인한 통과제의의 하얀 희생양이 된다. 희생은 희생물을 면함으로서 가해자가 된 공동체의 결속력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사회적 선이다. 선은 검정이 흰색을 요구하듯이 악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Mr, 곰탱이’는 하얀 악마가 되었을 것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