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선, 열대우림을 꿈꾸는 빈 의자 


미술사에는 마르셀 뒤샹의 변기나 세잔의 사과만큼이나 유명한 의자가 나온다. 조셉 코주스의 의자와 요셉 보이스의 의자가 그것이다. 개념미술가 조셉 코주스의 의자는 실물 의자와 의자를 찍은 사진 그리고 사전에서 의자에 해당하는 항목을 확대 복사한 복사물 등 세 가지 다른 유형으로 제안된다. 장르를 규정하는 용어로 치자면 하나의 의자가 각 레디메이드와 사진 그리고 개념(사전적 정의)으로 변주된 것이다. 그렇게 세 가지 유형의 의자를 제시하면서 작가는 당신이 알고 있는 의자는 무엇이며 또한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물어온다(사실상 같은 의미지만, 여하튼). 이로써 이미지란 보는 것인가 아님 읽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건드리면서 하나의 이미지란 결국 의미론적인 문제이며, 그 의미가 결정되는 맥락의 문제라는 답안을 암시한다. 하나의 이미지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언제나 특정의 맥락 속에서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맥락을 옮겨 다니고, 그때마다 그 의미는 달라진다. 맥락 밖에는 다만 추상이 있을 뿐이다(롤랑 바르트는 모든 것은 텍스트 안에서의 일이며,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화용론과도 물리는 문제이다. 


그리고 요셉 보이스는 그 표면에 지방을 덧바른 딱딱한 나무의자를 제안한다. 여기서 딱딱한 나무의자는 이성을 상징한다. 알다시피 딱딱한 나무의자에는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다. 그처럼 이성적인 삶이며 사고를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나무의자에 덧바른 지방 덩어리는 이성의 부패를 방지하는 자각 내지 각성의 계기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요셉 보이스는 자신을 무당에다 비유했다. 예술을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본 것이며, 의식을 건드리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술정치의 실천논리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오브제는 오브제(다르게는 개념 오브제)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주물이기도 한 것이다. 조셉 코주스의 의자가 미술은 결국 의미론적인 문제라는 답안으로 이끈다면, 요셉 보이스의 의자는 주술과 주문의 문제라는 해법으로 유도한다. 어느 경우이든 의자는 그저 의자가 아니다. 맥락을 옮겨 다니면서 자기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다른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렇게 사람들의 의식에 주문을 걸고, 사회적 의식(에피스테메 아님 패러다임)을 매개하고 간섭한다. 


조셉 코주스와 요셉 보이스의 의자는 이미지란 그저 하나의 이미지이기 이전에 일종의 의미론적 대상이며 기호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여기에 또 다른 의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빈 의자지만 의미론적으로 텅 빈 의자는 아니다. 전미선은 줄곧 빈 의자를 그린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린 빈 의자 그림은 어떤 의미를 탑재하고 있고, 어떤 기호를 표상하는가. 다만 그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그림은 어떤 식으로든 주체를 투영하고 투사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빈 의자 그림은 작가의 주체를 암시하고 상징할 수 있다. 작가의 주체를 대리 수행하는 일종의 비유적인 초상화이며, 사물에 빗대어 자기를 상징하는 사물 초상화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그림 속의 빈 의자 주변으로 작가의 존재가 느껴지고 작가의 숨결이 감지되는가. 빈 의자에 앉아 있거나 주변을 서성거리는 작가의 설레임이며 기다림이 전해지는가. 


작가의 의자는 말하자면 일종의 프루스트 효과를 실현해주는 매개체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 화자는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물 때 나는 미세한 소리와 미묘한 향기에 이끌려 추억 속으로 그리고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소설 제목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짚는다?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부재하는 것들을 다시금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자기암시며 자기주술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 행위 속에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함축돼 있다. 현재를 과거 속으로 밀어 넣는, 아님 과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시간 사용법이 탑재돼 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 개념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의자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타임머신과도 같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에, 아님 그 소리와 향기에 해당하는 매개 내지 계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빈 의자와 더불어 자기 삶의 지점 지점들을 탐색하고 되새김질하고 추억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빈 의자는 자기를 대리하는 사물초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의 순간순간들을 응축하고 있는 삶의 메타포일 수 있겠다. 


그런가하면 빈 의자는 왠지 결여와 결핍 그리고 부재를 떠올리게 하고, 무한정한 기다림을 떠올리게 한다. 하릴없이 흐르는, 아님 그렇게 흘려보낸 무심한 시간들에 대한 상실감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결여와 결핍, 부재와 상실감은 유별난 경험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밑바닥에 흐르는 보편적인, 존재론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삶은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부재하는 것들을 되새김질하면서 아직 온 적이 없는, 아님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를 어떤 도래를 무작정 기다리는 연속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 속 의자에 덧대진 데커레이션처럼 화려했던 날은 가고, 다만 그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씁쓸한 반성만 남은 회한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빈 의자 그림은 그렇게 삶의 반성이며 존재의 비의를 열어놓고 있었다. 


내친 김에 작가가 그린 의자를 보면, 비록 아무런 장식도 없는 무미건조한 의자가 없지 않지만, 대개의 의자는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이며 패턴들로 정치하게 장식돼 있다. 일일이 그려 넣기도 하고, 그 표면에 패턴이 부가된 기왕의 천 조각을 하나하나 덧붙여나간 꽃 장식이며 추상 문양들이다. 무미한 의자를 아기자기하게 수놓고 있는 이 문양이며 패턴들은 그저 문양이며 패턴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 자체를 의자에 투사된 작가의 인격으로, 아이덴티티의 표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이를테면 여성적 감수성이며 미의식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의자에 자기만의 감수성이며 미의식을 구현해놓고 있었고, 의자 주변에 회상이며 추억의 계기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호출된 소재들을 보면, 대개는 식물들이지만, 때로 어슬렁거리는 동물들도 보인다. 식물들은 우연하게 의자 곁에 놓인, 아님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화분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추억과 회상, 꿈과 이상을 보조하고 부연하기 위해 호명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특히 동물들이 그렇지만, 굳이 열대가 아니더라도 열대로 상징되는 어떤 휴가와 휴식 같은 이상향의 표상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나는 비록 의자처럼 현실에 붙박인 삶을 살지만, 의식만큼은 빈 의자처럼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불러 올 수가 있다. 빈 의자에 앉은 채 의식을 세상의 끝까지 보낼 수가 있고, 미지의 세계를 꿈꿀 수가 있다. 작가의 그림엔 유독 청색 계조가 많은데, 이런 청색이 상기시키는 상징적 의미며 분위기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서 청색은 일종의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색깔이다. 


그렇게 작가는 적어도 그림 속에서만큼은 마치 꿈으로 현실을 대체하는 초현실주의자처럼 자신의 현실을 열대우림과 휴양림, 이상향과 영원한 휴식의 계기로, 막연한 그리움과 향수의 계기로 바꿔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