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힘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론적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첫 개인전 [chain reaction-sound](2011)에서 권용철은 전시장 벽과 바닥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설치된 복잡한 철재구조물 위를 타고 굴러가는 구슬들을 통해, 시계장치처럼 짜여 져 돌아가는 우주를 보여준 바 있다. 모터, 기어, 체인, 스위치 등은 이 자동적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운동하는 구슬들과 이곳저곳에 장치된 스위치가 만나는 순간 또 다른 장치들이 연동되고, 그 연결선이 때로 악기와 연결되어 소리를 낸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불규칙적인 궤도를 도는 구슬의 철커덕 거리는 소음은 음악으로 귀결됨으로서, 이 인적 없는 공간이 나름의 자족성을 가지는 합목적적인 체계임을 증명한다. 그것은 숫자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천체의 음악을 상상했던 피타고라스 학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공감각적인 우주를 대변한다. 직선과 변곡이 교차되는 복잡한 구조들을 통과하는 구슬을 움직이는 힘은 기계설계자의 최초의 행위를 제외하면, 나머지 연쇄 반응은 중력에 의한 것이다. 그 시리즈의 일환으로 열린 [chain reaction-movement(gravity)](2013) 전은 이 우주를 작동하는 근본 법칙인 중력에 주목한다.

 



 

 [chain reaction_the sound] 시리즈, 송은아트 큐브 전시전경, 2011년.

 

권용철의 작품에서 중력이라는 보편적인 힘을 받는 물리적 기계장치로서의 우주는 인간, 사회, 역사의 차원까지 확장된다. 그에게 이 불가항력적인 힘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우주와 인간이 태엽 장치(clokwork)라면, 누군가 그것을 감아놓았고 주어진 시간 동안 작동될 것이다. 이 필연의 세계는 우연을 포함한다. 꽉 짜여 진 필연적 세계일수록 우연이 야기하는 힘도 크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통과하면서 때로는 합리적인 때로는 맹목적인 결과를 낳는다. 잘 가다듬어진 상징적 우주라기보다는 거친 기계적 메커니즘이 두드러진 권용철의 작품은 불량 공장처럼 언제 어디가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질주를 펼쳐 나간다. 이러한 양가적 과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의견도 실리지 않는다. 그의 기계적 우주는 중성적이다. 작가는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신처럼, 투명한 관찰자의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공은 단순한 힘에 의해 이끌려 굴러갈 따름이지만, 철재 선을 용접하여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매우 복잡해서, 관객은 그것이 어떤 결과들로 이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마치 나비효과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사건들처럼 말이다.  

 

기계의 설계자는 이 모든 과정을 시작하고 지속시키는 전지적 시점을 통해, 창조자로서의 신과 예술가를 중첩시키는 오랜 유비를 낳는다. 올해 열린 전시에서, 스위치 컨트롤 박스에 의해 통제되는 기계 장치 안에 배치된 물병들은 어떤 운동이 적용되든 간에 지표면과 평행한 수면을 유지함으로서, 중력이라는 힘을 가시화한다. 이 작품의 거대한 원은 정교하게 돌아가는 시계나 천체 궤도 같은 느낌을 준다. 중력이 과학적으로 발견된 것은 17세기이다. 당시까지 인간적 의지와 기질에 가득 차 있던 목적론적인 우주는 기계론으로 대체되었다. 이 보편적 질서의 과학은 후에 결정론으로 이어진다. 자연은 상호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는 인과적 연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온갖 사물이 제 1원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중세적 신념을 넘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과학적 사고와 형이상학은 언제라도 결합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세계의 기계화를 추동했던 과학 기술자들의 몫이 컸다. 세계는 한 단계가 다음단계를 제어하도록 고안된 자동식 기계가 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생산력과 긴장감을 동시에 높였다.

 

근대 과학의 유년기이자 혁명기였던 시대를 반향하기라도 하듯이, 권용철의 작품은 고전적이다. 연쇄작용을 일으킴으로서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는 그의 작품은 모든 구조와 기능을 그 내부에 숨기고 있는 전자시대의 매끈한 기계와 달리, 구조와 기능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색도 칠해지지 않고 용접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구조들은 거칠고 투박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신기하게도 서로 맞물리면서 움직임을 이어간다. 그는 전자적 제어가 아닌 기계적 제어를 고집한다. 아날로그 방식은 메커니즘을 해부학처럼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철재 용접으로 하나하나 구축된 기계들의 스위치와 전선은 모두 붉은 색으로 되어 있어 투박함 와중에 조화를 꾀한다. 수직, 또는 수평으로 상호 작용하는 기계의 움직임에서 관객은 자연과 우주를 관통하는 힘 뿐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비유를 읽을 수 있다. 권용철에게 생물과 무생물을 불문하고, 행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용접으로 구축된 그의 세계는 기호화되어 있다. 근대과학의 여명기에 과학자들이 보았던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된 책’(갈릴레오)이다.  

 




 [chain reaction_the movement(gravity)], 갤러리 현대 윈도 갤러리 설치전경, 2013년.

 

권용철의 작품에서 그것은 원과 사각형을 비롯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의 움직임, 또는 물의 수평면은 접촉 없이도 끌고 끌려가는 마술적인 힘의 존재를 예시한다. 그것은 올해 전시의 제목에도 포함된 중력이다. 제임스 글릭은 [아이작 뉴턴]에서 최초로 중력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측정했던 과학자 뉴턴이 끌리다(gravitate)’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우주에 있는 물질의 모든 입자는 다른 입자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이 일반화를 통해 나머지 모든 것이 따라온다. 권용철은 이러한 인과관계에 인간관계 또한 포함시킨다. 작품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세계를 재창조 하는 자는 과학자처럼 자연의 힘을 발견하고자 한다. 중력이라는 보편적인 역학 원리는 빈 공간에서 작동한다. 원자같이 생긴 구슬이 궤도를 돌고 있는 화이트 큐브나 쇼룸 역시, 근대과학이 펼쳐졌던 중성적 바탕 면을 생각하게 한다. 편재(omnipresence)하는 신처럼, 중력이 작동하는 중성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입자를 보여주는 권용철의 고전 과학적 우주는 연속적이고 균질적이다. 빈공간이라는 균질적 연속체를 가로지르며 운동하는 입자는 가치의 공간적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아직 독실했던 근대인에게 무한한 진공은 신비와 상상을 앗아간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제임스 글릭은 뉴턴이 물질과 공간을 신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자연에 대한 이해의 기틀로서 신을 믿은 뉴턴은 이 모두를 단지 자연의 원인으로만 설명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발적 작인의 의도와 계획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추론의 사슬은 자신 외에 어떤 것도 공급받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 맴돌며 자기준거를 이룬다. 1동자(prime mover)인 신은 뉴턴에게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신조를 주었다. 뉴턴의 신은 우주를 작동하는 규칙을 수립했고, 그 규칙은 인간의 노력으로 알아내야하는 제작품이었다. 세계의 수많은 구성요소와 물질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순수한 기계론적 설명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뉴턴시대에는 과학자들의 전형을 제공한 것은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마법사과 연금술사들이기도 했다. 맨 처음 불활성의 입자들을 응집시킨 것은 무엇인가. 마술사나 과학자만큼이나 예술가도 이 보편적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권용철의 작품은 마술과 이성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공간에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기계론적이지만, 결정론은 아니다.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물리적 궤도에서 입자가 어느 시간에 어느 공간에 있을지는 확정할 수 없다. 권용철의 우주는 매끈하지 않다. 현대물리학에 의해 상대성의 세계가 열렸지만, 아직도 우리는 뉴턴적 우주에 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평가에 의하면,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구해내서 절대적이고 실체적이고 수학적인 무엇으로 만들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감각을 추상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제임스 글릭에 의하면, 중력을 발견했고 빛과 운동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고 천체경로를 예측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립한 뉴턴은 근대세계를 수립한 중요한 건축가였다. 뉴턴적 사고의 혁명성은 객관적 실체로서 시간과 공간을 규정한 점이다. 객관적 실체는 신의 속성이기도 하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에 의하면 신학과 연금술을 병행해서 연구했던 뉴턴은 생애 말년에 이르러 절대공간에 대한 사고를 신이나 신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막스 야머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언제나 인간 감정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절대공간과 시간이 현존함으로서 명료성과 엄밀성, 확실성과 명확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질서와 조화에 대한 믿음은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면면이 이어지며,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등을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이러한 사고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프로타고라스)임을 내세우며,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적인 궤변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기에 다시금 새롭게 다가온다. 현대를 지배하는 상대주의는 한시적인 인간의 규칙을 공리화 하여, 모든 직관이 배제된 형식체계에 가두어 놓는다. 자유는 자율이 아니라 자의로 전락한 것이다. 동일자의 논리로 작용하는 유한한 형식체계에 무한(타자)을 포함시키는 것은 과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의 요구이다. 중력을 의식하고 가시화하는 권용철의 작품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축한 체계를 벗어나는 추상적 존재를 예시한다. 고전역학의 법칙들도 인간에 관계없이 영원토록 이어진다. 이러한 실재론적 사고는 자연수나 시공간의 구조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이들에게 진리는 창조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진리라는 바닷가에서 놀며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이처럼, 중력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을 가시화하는 권용철의 작품에는 인간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사고가 있다.  

 

 


 [the movement] 시리즈, 2011년

 

고전 역학의 체계에 신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듯이 이러한 실재론 또한 형이상학적이다. 뉴턴에게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틀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세계의 물질적 사상들이 부동의 질서를 따라 그 길을 달리고 있었다. 브로노프스키에 의하면 뉴턴의 세계상은 신의 눈으로 본 세계관이다. 인간이 어디에서 어떤 운동을 하건 그 세계는 관찰자에게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1687)은 단일 법칙 체계의 적용을 받는 세계의 경이적인 기술이라고 평가된다. 우주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우주 종교’, 즉 과학시대에 적합한 종교이다. 중력에 물리적 의미만을 부여하지 않는 권용철의 작품은 거시세계만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그는 치밀한 인체작업에 열중했었고, [the movement] 시리즈에서도 궤도를 벗어나온 선들이 인체형상과 그 움직임을 가시화하는데, 그것은 고전역학의 시대를 이은 계몽시대의 인간관을 연상시킨다. 18세기의 의사 라 메트리는 신체의 각 부분은 그 안에 각각의 욕구와 균형을 이루는 힘을 지닌 스프링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 즉 영원히 움직이는 살아있는 표상인 자동인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시계, 분수, 오르간 등을 가능하게 했던 기계장치들은 산업 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도구화되기 시작한 인간과 비유되었다. 무생물이면서도 생물과 같이 작동하는 권용철의 기괴한 자동장치에는 합리화의 극단에서 발견되는 비합리주의가 있다. 구분되는 부분들이 연결되어 움직이는 기계에는 그 원천과 목적을 알 수 없는 비합리적인 힘인 욕망이 작동한다. 욕망하는 기계들’(들뢰즈와 가타리)은 그자체가 기계이면서도 다른 기계들에 연결되어 있다. 욕망하는 주체와 기술, 사회는 차이가 없다. [앙티 외디푸스]에 의하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은 많은 구조들을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한다. 권용철의 작품에서 많이 발견되는 절단된 체계들의 연결과 급변은 기표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기표는 다른 기표를 불러내면서 계속 이어진다. 그것은 욕망처럼 끝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나타날 뿐이다. 이 욕망은 막힘과 정체를 거부한다. 

 

출전; 난지미술창작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