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면서 그려지는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1. 구조와 발생

     

미술이라는 제도나 명칭이 생겨나기 이전, 원시시대의 동굴 벽에 인간도 동물도 아닌 것들이 어지럽게 겹쳐 그려진 형상들은 드로잉의 시원 또한 알려주며, 개체 발생적으로도 되풀이된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이의 능숙한 스케치 뿐 아니라, 아이가 손에 필기구를 쥐자마자 반사적으로 하는 행위들, 무의미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노트 가장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죽죽 그어대는 선에 이르기 까지 드로잉은 그 종류도 범위도 넓다. 화석이나 지층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유사하게, 원초적인 것은 뒤이어 오는 것들에 의해 덮이기 마련이다. 드로잉은 더 매끈한 마감을 위한 밑그림으로, 더 정리된 개념을 위한 끄적거림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최종 완성 본을 위한 과도기적인 과정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그러나 작은 공간 내부에 축소된 성체가 접혀있는 씨앗처럼, 발단과 발상에는 이후에 펼쳐질 맹아적 형태와 의미가 풍부하게 잠재되어 있다. 딱딱한 구조로 성장하기 이전의 말랑말랑한 발생의 단계는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으로 충만하다. 이미 있는 것을 체계적으로 모사하는 기술인 재현주의가 배격된 이래, 작업의 원초적 단계를 그대로 살려내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모더니즘의 시조로 평가되는 인상파는 형태이자 색채인 발랄한 선들이 고전주의적 완결성을 회화적 과정으로 해체시키며, 드로잉이자 완성작인 작품의 선례를 보여준다. 드로잉은 현대적인 의미로 다시 태어났다. 근대 이래로 인간은 번쩍거리는 기술주의적 미래를 상상해왔지만, 드로잉이라는 시원적 형태의 작품은 보다 지속가능한 ‘오래된 미래’로 회귀하려는 대안적 동향에 부응한다. 그것은 형식적인 동일자를 갱신하기 위해 원초적 타자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다. 구조보다는 생성에 방점이 찍히는 이 의미 있는 역행은 모든 공인된 가치를 구조적인 차원에서 재구축(해체)하려는 현대 철학의 흐름과도 조응한다. 예술의 의미와 형식을 통합해주는 것은 구조이다. 그러나 드로잉은 통합과 조율 이전의 날 것에 해당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구조는 ‘의미들을 집합시키고 테마들을 확인하며 불변 수들과 상응점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관계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구조’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기체나 건축물, 즉 자족적인 조직체라는 이미지이다. 자율성과 견고함은 구조의 특징이다. 반면 열림은 계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이다. 

 

견고함이 가능한 조건은 닫힘이다. 그러나 성급한 귀결보다는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으려는 현대미술의 충동은 구조보다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원동력과 접촉한다. 구조를 물화시킴 없이, 그것을 어떤 생성의 구조로, 어떤 힘의 형태화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는 시간 속에서 생멸하며, 시간의 절단면이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진행된다. 확실한 개념으로 시작했다가도 길을 잃고, 길 잃음 속에서 새로운 길이 발견되기도 한다. 드로잉의 열린 과정은 불확실한 것에서 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이 생겨날 수 있게 한다. 드로잉은 무엇인가를 새로이 만들어 내야 하는 예술에 본래적인 특징, 즉 막연함의 정수이다. 드로잉의 원천과 목적은 불확실하지만, 강력하게 흐르고 있는 잠재성을 현실성으로 전화시킨다. 기원과 목적이 아닌 과정 그 자체에는 언젠가 확립되어질 전체나 구조적 안정성을 주는 균형과 중심이 아니라, 움직임을 낳는 탈중심화(변형)가 중요하다. 중심의 상징에는 내용과 형식 뿐 아니라, 작가가 포함된다. 드로잉은 내가 시작하였지만 나로 끝나지 않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적 주체가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과정임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분야가 바로 드로잉이다. 예술은 ‘나 자신에게 향하는 길’(릴케)로 간주되지만, 작가는 이 길에서 자신이 아닌 바깥을 향하는 경향을 감지한다. 그 길은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곳, 내가 말을 한다하여도 말하는 것이 내가 아닌 곳, 나를 말할 수 없는 곳으로’(릴케) 인도한다. 이성과 이성의 일관성 있는 담론인 로고스는 배제되어야 할 유아론, 즉 ‘이성의 구조’(레비나스)이다. 그것은 타자와 동일자간의 부단한 투쟁과 대화의 역사를 보여준다. 가령 우리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있을까, 상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두 과정은 우리 이성의 희망사항과 달리 일치되기 보다는 괴리가 더 빈번하다. 괴리가 있지만, 확실한 것을 에워싸는 더 큰 어둠, 즉 타자가 없다면 예술은 불가능하다. ‘A는 A’임을 확인할 뿐인 동일성의 논리에서 이미 있는 것의 재확인 외에 새로움과 이질성을 위한 여지가 없다. 타자 즉 ‘상상할 수 없는 것, 있을 수 없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레비나스)과의 관계는 신비하다. 드로잉은 정처 없는 방황의 시작이다. 시작은 막연하기는 하지만, 드로잉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새롭고 경이롭게 한다.

     

2. 표상에 반대하여

     

드로잉이라는 이 막연한 흐름은 글쓰기와도 유사하다. 드로잉의 의미를 논구하는 이 글은 글쓰기에 대한 공유된 관심을 보여주었던 블랑쇼와 데리다의 논의를 주로 참조한다. 후기구조주의로 분류되곤 하는 이들 현대 예술 비평과 철학 이론이 드로잉이라는 미술의 원초적 언어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로잉 뿐 아니라, 드로잉으로 대변될 수 있는 예술작품의 기원부터 영감, 과정과 완성, 작가에 이르는 폭넓은 문제를 포괄한다. 끝없는 과정 중에 있는 드로잉은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드로잉의 현대성은 주체를 표현하는 것도 객체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주체/객체의 이원론에 근거하는 이전시대의 미학을 거부함에 있다. 주체와 객체라는 안정된 이항대립의 범주에 의지하는 표상적 세계관은 주체가 객체를 소유(전유)하는 방식이다. 반면 드로잉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손을 끝없이 빠져나간다. 영토화가 되자마자 곧 탈영토화가 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우리는 사물을 표상화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하나의 객체로, 객관적인 현실로 만들려 하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고 비판한다. 모방은 이러저러한 인간적 관심사에 의해 부응하며, 저기 있는 것을 여기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이러한 도구적 역할 속에서 예술 고유의 언어는 희생된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만을 지시할 뿐인 드로잉의 언어는 불투명하다. 이미 있는 것을 투명하게 되비쳐주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하여 해석되어야할 이 상형문자는 의미 보다는 존재에 더 가까운 언어이다. 이 불투명한 언어는 자체의 물질성을 가진다. 그것은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가 삶이다. 삶은 보존과 재생산 대신에, 낭비와 창조의 무대가 된다. 이 원초적 무대에서 모방을 가능하게 하는 범주들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이러한 경계의 소멸은 노동과 의미의 법칙을 거슬러서 원초적 혼돈 혹은 축제와 같은 활기를 자아낸다. 드로잉에서 기호는 재현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탕진된다. 그것은 ‘기호들의 포트래치’(데리다)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진정한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고, 리듬 있게 스스로를 발산하여 공간을 증대시킨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무(無)를 에워싼 순수한 내면의 연소인 진정한 예술에서, 삶은 정복하기 위해서 어떤 결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를 위한 순수한 관계, 순수한 소비 속에 희생된다고 말한다. 존재는 변모 속에서 행복하게 소진된다. 드로잉은 이러한 소진의 흔적이다. 단순한 쾌락인 소비와 달리, 소진은 죽음(또는 죽음에 가까운 쾌락인 열락)을 향한다. 

 

 

염성순, [나는 본다. 한 여자를], 39x 54.5cm, 종이 펜 아크릴릭, 2011년.




삶의 가장 사치스러운 낭비인 예술 활동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예술은 실제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삶의 이면, 또는 삶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죽음과 관계한다. 그것은 앞당겨진 죽음이다. 죽음과 삶의 두 영역은 합쳐져서 드로잉이라는 장을 통해 더 넓은 공간으로 통일된다. 블랑쇼는 여기에서 기초를 세워주는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기초의 부재와 상실로서의, 심연 같은 죽음을 예감한다. 죽음은 불가피하고 확실하지만, 접근 불가능하고 포착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을 거는 예술은 소멸하는 것과 똑같은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다. 예술은 이 세계의 행동하는 힘과 대립하여 충만한 상태에 대한 욕구를 향하는데, 이 마지막 경계선으로 향한 열망은 죽음과 닮았다. 죽음에의 욕망은 허무를 낳지만, 허무 속에서 기이한 긍정이 얻어진다. 드로잉은 부재와 허무 속에서 사물의 현존과 힘을 포획한다. 저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해의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무의미하게 보인다. 일반적인 노동이 의미와 생산을 낳는 것과 달리, 예술은 무의미와 향유(무제한적 소비)를 낳는다.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약과 비약을 요구하는 예술에서 위대함과 비루함은 한끝 차이이다. 예술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완성보다는 과도기적 언어인 드로잉은 의미의 문제를 제기한다. 블랑쇼는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대조하는데, 그것은 드로잉의 언어와 의미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블랑쇼에 의하면 비(非)문학적인 것은 결정된 의미의 강력한 조직망으로 현실적인 주장들의 총체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제시를 통해 비문학적인 것은 견고한 존재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예술은 이 세상에 그것을 보장해주는 담보가 없다. 그것은 매번 처음, 즉 단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드로잉의 일회적 움직임에서 반복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현대의 드로잉은 블랑쇼가 밝히는 문학의 공간처럼, 아직 아무것도 의미를 갖지 않은 공간, 하지만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마치 그 기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공간을 밝힌다. 어떠한 한계도 모른 채 흘러가는 선들은 수다스러우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들은 어떠한 의도나 정보를 재현하지 않는다. 의미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 의미작용 없는 유희적 기호는 미끄러짐을 반복하면서 무한정 지속되기만을 욕망한다. 지속성은 욕망 뿐 아니라, 영감의 특징이다. 도약과 그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영감은 고갈되지 않는다. 영감을 받은 자는 끝없이 말하고 그리게 될 것이라 예감한다. 중요한 것은 영감을 작품을 향한 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영감을 향한 길로 삼는 것이다. 꿈만 꾸는 자는 어떤 영감도 현실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작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영감이 결정적이다. 

 

영감은 어떤 과학적 필연성에 따라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라는 막연한 과정에 내재된 축복과 저주 속에서 이따금씩 실현될 뿐이다. 지속되려는 욕망은 동일자 바깥, 즉 타자를 향한다. 바깥의 타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욕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부적절한 것으로 남는다. 이 부적절함은 순화나 승화를 거부하고 날 것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결코 합리성으로 길들일 수 없는 예술작품의 야생성이다. 드로잉은 반복과 재생산이 아니라, 철저히 일회성의 예술이다. 데리다는 되풀이 일반을 소멸시키고자 한 예술가로 아르토의 예를 든다. 그의 [글쓰기와 차이]에 의하면 아르토에게 반복은 악이다. 그것은 자기 보존을 위해 스스로 지연되는 것, 그리고 소비를 자제하고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의 경제적이고 계산적인 몸짓이다. 현재는 자신을 지키며 자신을 유보한다. 관념성이란 반복성의 보장된 힘에 불과하다. 확립된 진리란 언제나 반복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비 반복, 요컨대 현재를 소모하는 단 한번 속에서의 회수 불가능한 단호한 소비, 현재를 간직하기를 원치 않는 것, 순수한 상이성을 즐기는 것이다. 하나의 표현은 두 번 살지 않는다. 그것이 생성되는 순간에만 기능한다. 나타남은 존재가 아니라, 차이에 의한다. 몸에서 몸으로 힘들이 전이되는 열정은 두 번 되풀이 되지 않는 것이다.

     

3. 작품과 작가

     

드로잉은 누에가 실을 뽑는 듯, 작가와 가장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내면에 온전히 자리한다고 가정되는 주관을 밖으로 드러낸 것, 즉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불현듯 떠오른 영감이 작업과정을 통해 확실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이 의도하는 것처럼, 드로잉의 주체는 온통 타자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 자동기술은 깬 채로 꾸는 꿈처럼 욕망에 몸을 맡긴다. 드로잉이 진행되는 손은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독립된 힘에 이끌린다. 예술가 주체는 작업의 전 과정을 장악할 수 없다. 현대의 많은 문화담론들이 ‘저자의 죽음’(바르트)이나 ‘작가의 부재’(데리다)를 말한다. 그러한 용어들이 반드시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껍데기만 남은 주체가 사라짐으로서 얻는 것은 더욱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적 주체는 근대의 합리적 주체와도 다르다. 합리적 주체나 과정은 대체가 가능하지만, 예술이라는 비합리적 과정은 대체 불가능하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글을 쓰는 것이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어로 하여금 홀로 맨손으로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말에 자유를 준다. 

 

말이 제 힘으로 홀로 말하게 내버려 두는 것인데, 작품의 편에서 볼 때 작가는 모든 것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신처럼 작가는 그 누구도 아니다. 작업은 매순간 자신과 헤어지면서 타자를 향해 간다. 그렇지 못할 때 작업은 알속에 갇힌 자기동일성의 충만 속에서 정지하고 말 것이다. 그가 이야기꾼이므로 그는 부재하며, 오직 오직 이야기만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나무뿌리와 가지들 사이의 줄기처럼 단지 통과시키는 자이고, 그렇게 통과된 산물들이 열매를 맺어 세계가 된다. 그것은 유아론적인 자아의 포기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카프카의 예를 들면서, 카프카가 ‘나’라는 말에 ‘그’라는 말을 대치시킬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스스로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자기가 예술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블랑쇼에 의하면 작가가 너무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고집하며 작품은 그의 작품이 되어, 작가를 표현하고 작가의 재능을 표현할 뿐이다. 그렇게 나를 벗어난 작업은 오히려 나를 변형시키고 나의 삶에 영향을 준다. 

 

확실한 내가 존재하고 그것에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는 것에 따라 현재의 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작품의 출발과 회귀가 가능한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작품과 더불어 미지의 존재가 된다. 그것은 ‘있다’에서 ‘된다’로의 중심이동을 말한다. 이러한 변모가 작업의 진정한 기능이자 작품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작업은 작가 스스로를 비롯한 모든 것을 변모시킨다. 작업이 그것을 행하고 체험하는 이를 변모시키지 않는다면 예술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드로잉은 확실한 존재이기보다는 변모이다. 확실한 존재가 쓸모나 소유를 부추키는 반면에 드로잉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모시킨다. 드로잉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말과 같다. 말은 가지치기를 하면서 끝없이 이어져 최초의 출발과는 다른 미지의 영역에 가닿기를 바란다. 학업이나 작업이 그 사람의 인성에 주는 변화가 미미한 상황은 그것들이 다른 노동과 다를 바 없이 관료화된 현대에 흔하다. 예술분야의 경우, 그 비합리성에 기대어 더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더 깊고 더 넓은 것이 아니라, 예술이 처해진 열악한 상황과 결합하여 자기연민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함을 더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술이 막연한 것이라고 해서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예술은 필연이다. 필연이지만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것, 그래서 우연을 필연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작가는 온통 하나의 진한 개성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따라 그에 걸 맞는(적합한) 주체도 변화한다. 오히려 개성은 사라짐으로서 다시 획득된다. 작업이란 일차적으로 나를 변모시키므로 나는 매순간 달라진다. 드로잉은 매순간 달라지기에 나를 기록하려는 기념비적인 미술이다. 블랑쇼는 ‘책은 구상되자마자 나를 온통 사로잡아 나를 마음대로 사용하며 그 책을 위하여 내 안의 모든 것이, 심지어 나 자신의 가장 심오한 면까지 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 맞는 성격만을 소유하게’(지드)된다고 인용하면서, 시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있어야 하지만, 시인은 단지 시 앞에서만 마치 시를 쓴 후인 것처럼 존재한다고 본다. 끝없는 불안정한 삶의 조건에 직면해 어떤 피난처도 찾을 수 없는 나를 비(非)인칭에 넘겨준다. 나를 보호해주는 인간적 세계의 확고함은 모두 무너져 내린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 나에 대한 망각을 통해서 비로소 작품에 도달할 수 있다. 

 

작가가 느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장벽이 있고,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바로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자기가 아닌 다른 몸으로 계속 자신을 채움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무화시킨다. 작업은 작가로 하여금 부재와 고독, 위험, 무한과 직면하게 한다. 이 텅 빈 깊이에서 작가는 시작될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영원한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혼돈 속에서 혼돈의 주인이 된다. 블랑쇼는 단적으로, 예술작품은 그것을 만들어낸 누군가를 직접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준비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역사를 거쳐 창조되었는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 작품은 가장 자신과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작업이란 무명의 영토에서 되풀이하여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은 아니다. 블랑쇼는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는 자,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 비인칭의 무사무욕한 시선으로, 진정 사물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작가는 ‘말없는 사물들이 내게 말하는 언어’(호프만슈탈)에 귀 기울인다. 

 

작가에게는 사물들을 말하려는, 사물에 부합하는 유한한 표현으로 말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드로잉은 흩어져 떠도는 미지의 것들을 끌어당기고 차용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바깥으로의 시선은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나게 한다. 그것은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이며, 발견의 과정 속에서 예술은 풍부해진다. 작가는 작품의 확고한 주도권과 소유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작업을 통해 도래할 미지의 존재이다. 되기는 작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작품 뿐 아니라 이 세상은 ‘항상 세계의 현실화, 실현인 것’(블랑쇼)이다. 자신의 틀을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서 예술적 언어들이 탄생한다. 작업이란 끝없는 되기, 그 흔적이다.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에드몽 야베스의 [질문의 책]을 인용하면서 ‘당신은 글 쓰는 사람이요, 글에 의해 씌여진 사람이다’고 말한다. 작품이 나를 완성하며, 작품을 만들면서 만이 나는 나로 씌여질 뿐이다. 쓰면서 씌여지는 나라는 현대문화의 매혹적인 주제는 필기구와 한 몸이 된 작가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4. 예술의 언어와 자유

     

드로잉은 언어이지만, 확고한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사용을 통해 마모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자체로서 궁극의 목표를 가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은 시간이 부재하는 공간 속에 작가를 밀어 넣으며, 여기에 계속되는 새로운 시작이, 그리고 또 다른 시간으로의 이동이 있다. 그것은 느긋한 유목이 아니라 ‘무한한 시작의 긴장감’(블랑쇼)이다. 드로잉은 최초의 결정적인 시작인 대신에 ‘차이와 연기(차연)’(데리다)이다. 차이로부터 순수한 힘이 만들어진다.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생명은 자신으로부터 달라지고, 자신을 연기시키며, 자신을 차연으로 쓴다고 본다. 차이로부터 소통이 가능하다. 상이성 없는 순수한 소통은 없다. 심적 삶은 세력들의 작용 속에서의 차이이다. 양의 충만함보다는 차이점들에 의해서 더욱 정신과 기억이 된다. 프로이트는 ‘소통은 많은 양이 일회에 통과한 결과’라고 말하면서, 고통의 시작이 없으면 소통이란 없고 ‘고통 뒤에는 특별히 풍요로운 소통들이 따른다’고 본다. 암호화된 간격화가 소통의 환경이다. 소통에 지각만이 순수한 투과성만이 있다면 소통이란 없을 것이다. 순수한 지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워진다. 자기를 지운 흔적들은 무의식 속에서 말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는’(프로이트) 어떤 흔적들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억은 한번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여러 종류의 기호들로 저장되어 있으며, 무의식의 텍스트는 이미 의미와 세력이 결합해 있는 차이들로, 순수한 흔적들로 짜여 있다. 드로잉은 최초의 순수한 현전이 아니라, 자연 혹은 물질 속의 어떤 차이의 흔적 남기기이다. 구조적으로나 발생적으로나 드로잉은 글쓰기나 길과 유사하다. 바타유도 ‘소통은 완전무결하고 충만한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없다. 소통은 그들 자체 내에 죽음과 무의 한계에 위치된 존재들, 생명을 건 존재들을  원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자신의 전존재를 건 도박이다. 작품과의 소통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상호적인 끌어당김과 밀어냄에 의해 의사전달이라는 환하고 강렬한 빛이 솟아나는 것’(블랑쇼)이다. 드로잉은 우리를 기원의 어둠으로 이끌어간다. 완성될 수 없는 드로잉은 무한한 변이에 가담한다. 이러한 불확정적인 과정은 공허하면서도 풍요롭다. 블랑쇼는 작품 안에서 불확정적인 것이 확정된 것으로 가는 통로라고 본다. 예술은 탐구이며 불확정성으로 확정된 것이다. 작품이란 정신 속에 있는 무한한 것의 구체적 실현이다. ‘결정의 순간은 일종의 광기이다’(키에르케고르) 이 탐구는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한다. 

 

작품은 경계도 형태도 없는 공간, 머나먼 것의 무질서한 부름을 견뎌야 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고된 길을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감으로서 돌파구를 발견한다. 존재의 미 확정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과정은 억제와 절제가 필요하다. 작가는 존재의 미결정성에 무한정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결단과 엄밀함, 그리고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 작가는 고뇌의 불확실성을 정확한 언어의 결단으로 고양시킨다. 블랑쇼는 릴케의 예를 들면서, 인간의 의식을 가장 큰 부자유스러움으로 본다. 결과에 대한 우려, 소유의 욕망, 우리를 소유에 얽어매는 탐욕, 안전과 안정에 대한 욕구, 확신하기 위해 알고자 하는 경향이 군림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은 계산을 하고 모든 것을 계산으로 귀결시키려는 성향이 된다. 반면 자연은 활짝 열려 있다. 이와 맞먹는 자유가 우리들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극히 순간적이다. 단촐하게 시작될 수 있는 드로잉은 이 순간의 문을 열기에 적합한 언어이다. 순간의 문은 세계의 내면적인 공간을 연다. 릴케는 이 공간을 사물들의 내면이기도 하며 우리들의 내면이기도 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드로잉은 우리의 내면과 사물들의 내면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출전; (사)드로잉비엔날레 DM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