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구, 풍경의 깊이와 길의 위상학 


먼 그림자-물길, 먼 그림자-산성일기, 먼 그림자-지평선. 세세한 차이가 없지 않지만, 대략 그동안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붙인 주제들이다. 이 가운데 먼 그림자-산성일기가 역사인식을 다루고 있다면, 먼 그림자-물길 그리고 먼 그림자-지평선 시리즈는 이 보다는 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다르게는 실존적 자의식과 존재론적 자의식과의 차이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처럼 먼 그림자-물길과 먼 그림자-지평선 시리즈는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통하는 것은 또 있는데, 먼 그림자-물길 시리즈가 인도 여행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먼 그림자-지평선 시리즈는 몽골 여행의 성과란 점이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먼 그림자-물길 시리즈가 비록 인도 여행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사실은 인도를 그린 것이 아니듯, 먼 그림자-지평선 시리즈 역시 몽골 여행의 소산이지만 엄밀하게는 몽골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뭘 그린 것인가. 각각 인도 여행에서 길어 올린 물길과 몽골 여행에서 맞닥뜨린 지평선에 방점이 찍힌다. 물은 물이면서 물이 아니고, 지평선은 지평선이면서 지평선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물은 인도에 흐르는 물이면서 동시에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인 무의식 위를 흐르는 물이다. 마찬가지로 지평선은 몽골 풍경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인간 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한다. 이를테면 실제적이고 관념적인 경계에 대한 인식이나 자의식 같은. 

자의식 자체는 자의적인 것이지만, 각각 인도여행과 몽골기행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며, 나아가 이로 인해 그 구체적인 실체를 얻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에게 여행은 감각적 핍진성보다는 존재론적 닮은꼴을 위한 구실이었고, 이를 찾아나서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강경구, 먼 그림자-지평선-1, 캔버스에 아크릴, 2013


흥미롭게도 주제들은 하나같이 먼 그림자를 전제하고 있다. 먼 그림자가 작가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먼 그림자는 무슨 뜻인가. 그 뜻은 필히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의미며 서사를 담지하고 있을 것이다. 

먼 것도 그림자도 감각적 실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감각적 실재보다 먼 것, 감각적 실재의 흔적 아님 존재의 흔적 같은 것일 터이다. 비록 그림자 자체는 감각적 실재에 연유한 것이지만, 사실은 고유의 비실재성으로 인해 감각적 실재보다 궁극적인 어떤 실체를 암시한다. 정리를 하자면 먼 그림자란 감각적 실재 너머에 있는 존재의 흔적(아님 원인?) 정도를 의미하지 않을까. 먼 그림자가 인간에게 붙으면 존재의 흔적이 될 것이고, 자연에 붙으면 자연의 원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이나 자연 아님 물이나 지평선 자체가 작가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작가로 하여금 감각적 실재 너머에 있는 어떤 궁극적 실체에 연결시켜주는 계기이며 구실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실재는 궁극적 실체의 먼 그림자였던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먼 그림자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연상시킨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는 가까이 있으면서 먼 것, 실제로는 멀고 아득한 것인데, 왠지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는 감정이며 경험을 의미한다. 아득한 줄로만 알았는데, 왠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느낌? 관념적 실체가 감각적 실재를 덧입고 현현한 것 같은 느낌? 아득하게 먼 것과 더불어 있는(아님 아예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 융의 원형과도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먼 그림자란 아득하게 먼 존재의 원형(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자와 비교되는 존재 아님 존재 자체)이며 자연의 원형으로부터 발해지는 아우라 같은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원형을 향하고, 자연의 원형에 의해 유비되는 존재의 원형을 지향하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은 깊고 넓다. 아득하고 멀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그림은 대개 옆으로 긴데, 그 가장자리 끝을 가늠할 수가 없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사막과 사막화가 진행 중인 초원 그리고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야트막한 구릉 같은 산세가 첩첩이 중첩되면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몽골의 풍경 자체가 그럴 것이다. 그렇게 시야에 다 담을 수가 없는, 논리적으로 비약을 하자면 지각 아님 인식의 안쪽으로 다 불러들일 수가 없는, 그렇게 가장자리가 없는 풍경이 자연의 원형을 불러일으키고, 그 원형을 표현하기에 옆으로 긴 그림이 적격일 것이다. 

이처럼 옆으로 긴 그림이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자연 아님 풍경의 무한경계를 암시한다면, 풍경의 깊이는 그림 속 지평선을 향한다. 그림은 대개 이분 내지 삼분돼 있는데, 하늘과 땅으로 양분되고, 더러 그 가운데로 산세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하늘과 땅을, 산맥과 하늘을 가름하는 지평선 혹은 공제선은 인간의 지각이 불러일으킨 착각일 뿐 사실은 없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멀어지는 선, 실제로는 없는 선에 사로잡힌다. 없으면서 있는, 있으면서 없는 그 선이 마음속으로부터 어떤 경계의식을 불러낸다. 지평선은 말하자면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경계를 표상하기 위해서 그기에 그렇게 그어져 있었다. 

지평선 앞에 선다는 것은 곧 풍경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고 세계를 이편과 저편으로 구분하는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이다. 그 경계의 끝 혹은 너머를 헤아린다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풍경의 저편에서도 이편에서처럼 지평선이 보이고 경계가 보일까. 내가 서있는 풍경은 경계의 안쪽인가 아님 바깥쪽인가. 도대체 풍경에 경계가 있는가. 지평선 앞에 서면 이런 온갖 생각들의 연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화면의 깊이와 넓이 그대로 자연 아님 풍경의 깊이와 넓이에 부합되고, 그 자체가 존재의 무한경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풍경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다보면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난다. 작가의 그림에서 길은 길 같기도 하고, 표표히 흩날리는 눈발 같기도 하고, 폭포 같기도 하고, 깎아지른 절벽 같기도 하고, 대지를 가르는 크랙 같기도 하고, 아가리를 벌린 심연 같기도 하고, 실핏줄 같기도 하고, 어둔 색의 대지와 대비되면서 실제보다 더 도드라져 보이는 용암 같기도 하고, 분방하게 흐르는 기의 흐름 같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길은 길이고 길이 아니다. 길은 길이면서 동시에 길이 아닌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실체로 마구 그리고 자유자재로 변태된다. 

몽골 같은 풍경 속에서라면 길은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녀서 저절로 생긴 길이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길이라고 할 만한 길이 따로 없다. 사람들이 다녀서 생긴 길도 왕래가 뜸해지면 이내 수풀이 자라 길을 덮어서 가려 버린다.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고 다니지 않으면 길도 길이 아닌 것. 이런 길의 특이한 위상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탑재하고 있는가. 바로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의 위상학을 주지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전작과 관련해 그냥 물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물길이라고 이름 붙여 부른 것에 유념해야 한다. 작가는 바로 물에서 길을 보았고 풍경에서 길을 보았다. 그 길은 실재하는 길이라기보다는 몽골의 풍경이 불러일으킨 길이며 작가의 관념이 불러낸 길이다. 그래서 길이면서 길이 아닌 것으로 마구 변태될 수가 있었다. 

물에 길이 따로 있을 수가 없듯 삶에 길이 따로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삶에 길이 따로 없듯 길도 마찬가지. 실제의 길에 얽매이지 말라는 주문이며, 모든 곳이 길일 수 있다는 각성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막막한 풍경이며 아득한 풍경 앞에 섰을 때의 느낌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며, 바로 그런 풍경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경지며 비전이며 인상과 관련이 깊을 것이며, 그 풍경을 자기내면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한 어떤 경험의 차원과도 통할 것이다. 그렇게 몽골은 풍경 위로 길이 아닌 길이며 없으면서 있는 길을 토해내고 있었고, 덩달아 작가의 존재의 위상도 재설정(부팅?)될 수가 있었다. 


그 풍경 속에 사람이 서 있고 길 위에 사람이 서성인다. 사람들이 아닌, 사람이라고 한 것은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사람보다 풍경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사람이 사람보다는 풍경의 위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는 풍경의 일부로서 흡수되기보다는 풍경 위에 얹힌 듯한 느낌이고 겉도는 느낌이다. 풍경을 먼저 그린 연후에 적당한 포지션을 보고 그림 속에 안착시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그는 풍경 속에 서 있거나 서성인다. 때론 풍경 위를 부유하듯 자유롭게 유영하는가 하면, 더러는 신체가 다만 머리만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렇게 무슨 운석처럼 대지를 하늘 삼아 떠도는 머리와 더불어 그는 재차 풍경의 일부로서 흡수되고 동화된다. 

이 상황논리는 물길 시리즈에서 물속에 서 있거나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이 하나로 혼연일체가 되는 상황을 그린 것과도 통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물을 그리고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물과 사람이 동화되고 삼투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사람이며 물은 이런 상황논리 내지 주제의식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도입된 구실이며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풍경을 소재로 그린 근작에서도 마찬가지. 즉 작가는 풍경을 그리고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풍경 아님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리고, 풍경과 사람이 서로 동화되고 일체되는 어떤 경지며 차원을 그린 것이다.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관념을 가시적인 풍경에다 투사해 그린 것이다. 

그렇게 그림 위에 드로잉으로 부가된 사람이 화면 안쪽을 향해 서 있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오거나 한다. 그는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사실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것이다(자기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그렇게 풍경을 쳐다보면서 사실은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자기 내면으로의 탈주). 이렇게 작가의 그림은 물과 내가 동화되고 자연과 존재가 합치되는 어떤 차원을 열어놓고 있었다. 


강경구, 먼 그림자-지평선, 캔버스에 아크릴, 2013


사람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림에는 사람과 함께 집도 등장한다. 최소한의 간략한 드로잉만으로 축약 표현된, 아님 일체의 디테일이 생략된 그저 허여멀건 붓질로만 형상화된, 아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유영하듯 떠도는 집이 집의 실체에 대해서, 집으로 유비되는 존재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길이 삶의 메타포라면 집은 정체성의 산실이다. 떠도는 집은 떠도는 머리와 통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각각 집으로 그리고 머리로 대리되는 정체성의 표상들이 운석처럼 떠돈다. 떠도는 집? 알다시피 몽골의 가옥 형태는 사실상 임시천막으로 보아야 한다. 가축에 사람의 생리며 생태를 맞춘 탓에 풀을 따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가축에 맞춘 생리? 풀에 맞춘 생태? 사람은 그 생리며 생태 뒤에 숨는다. 그렇게 몽골에선 가축이 떠돌고 풀이 떠돌고 집이 떠돌고 사람이 떠돌고 머리가 떠돌고 운석이 떠돌고 우주가 떠돌고 존재가 떠돈다. 삶이 떠돌고 죽음이 떠돈다(전작에서라면 이 모두가 물을 따라 흐른다고 했을 것이다). 

그 풍경은 무슨 자연생태보고서 같다. 사막과 초원 위로 하얗게 표백된 짐승의 뼈와 이름 모를 잡초들의 형해며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그 형해며 흔적 위로 이따금씩 도마뱀이 지나가는데,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꾸는 꼴이 도마뱀의 능사라기보다는 도마뱀을 잉태한 땅의 생명력이며 포용력을 떠올려준다. 그런가하면 무슨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구름이 때론 가벼운 것이 견고할 수 있다는 역설을 암시한다. 가벼운 것도 단단한 것도 사람의 관념일 뿐, 관념도 유심도 다만 사람의 일일 뿐, 자연 자체는 그저 무상하고 무심하고 무관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천변만화의 표상인 구름에서 추상한 것이기에 그 역설의 의미는 더 각별하다(물 또한 천태만상의 표상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구름은 물과 통한다). 

작가가 그린 몽골 풍경은 질박하고 거친 마티에르며 울울하게 일어서는 붓질들이 어우러져서 땅의 생명력이며 원초적인 생명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 땅의 경계 안쪽에서 경계 너머를 쳐다보게 한다. 아님, 설핏 엿보게 한다. 그 경계 위에 무슨 시멘트로 떠낸 것 같은 견고한 발을 딛고, 작가는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