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중, 경계 너머로 시간의 화신들이 도래하다
김세중의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사물대상의 감각적 재현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 곧 핍진성이 첫인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일단 극사실주의 회화 곧 하이포리얼리즘 경향으로 범주화하고 유형화할 수가 있겠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다소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한눈에도 작가의 그림이 하이포리얼리즘 경향으로 유형화되면서도, 한편으로 유사한 경향의 그림들과 작가의 그림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은 흔히 하이포리얼리즘의 원형으로 알려진 영미권의 회화(주로 도시적 감수성에 그 초점이 맞춰진 팝아트의 한 갈래로서 파생된)와도 다르고, 특정 소재에 집중하면서 일종의 사물 초상화로 부를 만한 특정성을 강조하는 국내의 경우와도 구별된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소재적인 측면에서 풍경을 그린 것이란 점에서 구별되는데, 도시의 경관이나 사물 초상화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흔히 사물대상의 전면성 곧 파사드를 강조하기 마련인 일반적인 경우와 구별되고, 마찬가지 말이지만 사물대상의 객관적 묘사와 차갑고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외관을 강조하기 마련인(소설로 치자면 가급적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개입을 배제한 채 사물대상의 객관적 서술에 치중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누보 로망에 해당할) 경우와 차별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물대상의 객관적 묘사와 감각적 닮은꼴에 치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물대상에 대한 주관적 개입과 해석의 여지를 허용하면서 일말의 서정적 감흥을 자아낸다. 알다시피 자연풍경은 일정한 그리고 때론 아득한 두께를 가지고 있어서 감정이입과 공감이 더 잘 그리고 더 쉽게 일어난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사물대상의 감각적 재현능력에 뛰어나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만 그 뿐인가. 남다른 스킬을 보여줄 뿐인가. 당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주지하다시피 아티잔과 아티스트는 다르다. 아티잔이 단순히 주어진 일을 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아티스트는 이보다는 더 복잡하고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능력이 요구된다. 이를테면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왜 그리느냐에 대한 자기반성적 물음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어떤 자기반성적 물음을 물어오는가.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가 특징이다. 이런 생생한 묘사가 현장감과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그린 것인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 위에 옮겨다 놓은 것인가. 얼핏 작가의 그림은 남다른 묘사로 인해 영락없는 현실 같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다만 현실 같을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 현실 같은 현실은 다르다. 현실과 현실 같은 현실은 그 속해져 있는 층위가 다르다. 여기에 작가의 문제의식이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현실과 현실 같은 현실의 사이를 그리면서 그 차이를 강조하고 드러낸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현실 그대로를 그렸다기보다는 일종의 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을 그린다. 현실의 층위에 속한 이런저런 부분들을 화면 위로 불러와 화면의 논리에 맞춰 재구성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매개로 재편집한 것이다. 부연하면, 주로 바다와 하늘처럼 무한정 열린 공간을 그린다. 그리고 그 열린 공간 속에 모티브들을 호출하는데, 얼핏 봐도 서양미술사에 등장할 법한 모티브들이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 중 디오니소스나 사모트라케의 니케처럼 한눈에도 그 출처가 분명한 소재들이며, 여타의 동상이나 건축조각의 일부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경우들이다. 그렇게 조상들이 서 있는 배경화면의 하늘이며 바다는 현실 속 하늘이며 바다만큼이나 생생하지만, 사실은 따로 그려진 것이다. 그렇게 풍경과 모티브가 편집되고, 나아가 모티브와 모티브가 편집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영락없는 현실을 빼닮은 비현실(일종의 가상현실?)이 오롯해진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에선 논리마저도 의심에 부쳐지고, 이런 비논리가 비현실을 증폭시킨다. 무슨 말인가. 그림에선 허공이 무슨 보이지 않는 벽면이나 되는 것처럼 액자가 걸려있고 그림엽서가 붙어있다. 그렇게 머리로만 가정된 투명벽면이 모티브(이를테면 동상과 같은)가 자리하고 있는 무한정 열린 공간과 공존하는데, 희한하게 서로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가 가세한다. 그림자는 막힌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데, 알다시피 하늘은 무한정 열린 공간이고 따라서 그림자가 생길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하늘 위에 그려진 사물의 그림자가 액자며 그림엽서와 마찬가지로 비논리를 강조하고 비현실을 증강시킨다(증강현실?). 현실의 다른 층위들이 하나의 공간속에 포개져 있다고나 할까. 다시, 무슨 말인가. 현실은 무슨 주름처럼 여러 층위로 포개져 있고(이를테면 이차원이나 삼차원 그리고 다차원 같은), 우리가 살고 있고 알고 있는 현실은 그 층위들 중 하나의 층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현실을 그리는가.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빼닮은 편집된 현실이며 재구성된 현실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 실체가 손에 집힐 듯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는 없는 현실이다. 이처럼 없는 현실이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를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시뮬라크라는 사실은 없는 것인데 마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유사현실을 말하고(미술사 속에서 그 선례를 찾아보자면 살바도르 달리의 편집광적 회화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보들리야르는 이 유사현실을 가상현실을 지칭하기 위해서 도입한다. 보들리야르에게 현대인은 이미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을 사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상현실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생생한 실감을 자아내는 것이며, 종래에는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한 것이다. 그렇게 가상현실은 현대인의 의식을 파고들고 현대미술의 구실이며 근거가 된다. 현대미술은 말하자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짜 맞춰 재구성하고 재편집하는 것이며, 그렇게 현실로부터 가상현실이며 유사현실을 추상해내는 기술일 수 있다(무에 연유한 유와 오리지널리티에 바탕을 둔 창조의 개념과는 구별되는).
작가의 그림은 이런 현실의 다층구조(복잡계?)를 암시하며,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초현실을 가름하는 경계는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현실의 층위로 현실 같은 현실을, 재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을, 비현실을, 가상현실이며 유사현실을, 일종의 증강현실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뮬라크라처럼 영락없는 현실을 빼닮은 것이어서, 현실과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 더 설득력 있게 와 닿고 더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굳이 이런 유사현실이며 가상현실이 아니더라도 현실 속엔 왠지 비현실이며 초현실감을 자아내는 풍경이며 지점들이 있다. 바로 하늘처럼 무한정 열린 공간이며 바다처럼 막막한 공간들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수평선 앞에서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수평선은 실제로는 없는 일종의 가상적인 선으로서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경계에 해당하며, 그 경계 너머로 무작정 열린 공간과 막막한 공간에다 존재를 투사해볼 수 있게 해준다. 그 경계 위로, 그 경계 너머로 고대의 석상들이 도래하고 있다. 왜 고대의 석상들인가. 그들은 영웅들의 환영인가 아님 사자들의 혼령인가 아님 역사의 화신이며 시간의 분신들인가. 서양역사에 보면 이처럼 위대한 고대인에 경도된 적이 있었다. 바로 낭만주의가 그랬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죽음이 키워드다. 현실은 다만 비현실을 열어주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가졌었고, 현세는 다만 내세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서만 의미를 가지던 시절이었다.
작가 역시 이런 종류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고, 최소한 공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현재보다는 과거에서,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포개진 현실의 흔적에서, 명징한 이성으로 대리되는 낮보다는 적요와 비의가 잠처럼 감싸는 밤에서, 해(님부스)보다는 달(루나)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작가가 경계 너머로 엿보고 싶은 세계며 비전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존재와의 닮은꼴(존재의 무의식? 존재의 원형?)과도 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