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세상과 다시 접촉하다

올해의 작가상 2013 (2013년 7월 19일—10월 20일, 국립현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의 작가상’은 1995년부터 시작되어 매해 계속되어 왔지만, 작년에 제도를 개편 한 후 작가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지원 및 대중적 관심을 끌어 모으는데 강조점을 둔다. 필자는 전시가 열리는 장소와 거리가 있는 홍대 앞에서 올해의 작가상에 관련된 깃발 형태의 홍보물이 펄럭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록 거기가 자칭 ‘문화의 거리’이긴 해도, 대중적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내의 현대 미술행사가 잘나가는 영화나 뮤지컬 못지않은 홍보 대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상자에게는 협찬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준다고 하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스펙터클의 범람 속에서 조그만 흐름에 지나지 않게 된 시각 예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모든 것이 코드화되고 있는 시대, 미술 또한 대중에게 제대로 인지되지 않으면 미술의 생태계는 더욱 척박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고려해야 할 대중성이란 미술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질적 수준과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문제이다. 작년에 개편된 이 행사에서 대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후보자들을 전시를 통해 미리 공개한다는 점이다. 후보작들을 전시한 후 수상자가 결정되는 방식은 소수 전문가들에게 쥐어진 편향된 정보나 선입견 보다는, 실제 작품의 진면목을 한 평면에 놓고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방식보다 훌륭하다. 밀실에서 정해진 결과물을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이 아닌,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후원 및 전시방식을 통해서 유망한 작가를 소개하고, 그 과정을 다수와 최대한 공유할 수 있는 역량에 의해 상의 진정한 권위가 성립될 수 있다.

 

미술이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지면서 단지 제도가 제도를 보증하고, 권위가 권위를 낳는 자기지시성이 다수의 방관자를 낳고, 대중은커녕 같은 미술인들에게조차 외면 받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기관과 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계 여론이라는 것이 수렴될 장은 여전히 충분치 않다. 이러한 질곡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수상제도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다 같이 즐길만한 게임이 되기를 바란다. 올해의 후보작들은 회화,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분야가 골고루 포진해 있지만, 공통적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작가의 관념이나 감각, 형식 등은 그 어느 하나만이 돌출되지 않고, 세상이라는 마르지 않는 물줄기에 깊이 닿아있었다. 

 

세상 이곳저곳을 다차원적으로 펼쳐 보이는 함양아,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소박한 서사를 살려낸 조해준, 동서고금의 예술사를 비누 조각으로 번역한 신미경, 인공 또는 원초적 자연 속에서 인간과 역사의 흔적을 포착하는 공성훈의 어법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 모두 세계라는 지시대상을 괄호에 넣지 않았으며, 예술작품으로서의 밀도와 강도를 잃지 않은 채 세계로 향한 창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들은 벽을 벽으로만 간주했던 모더니즘의 자폐적인 미학을 극복하려 한다. 현대미술이 새로움, 진보, 실험 또는 그 무엇으로 정의되건 간에, 그것이 예술인 한 현실계와 긴밀한 역학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보편적 조건이 충족된다면 현대미술의 고민거리인 소통의 문제는 덤으로 해결된다. 지나치게 세계화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답답한 구석이 있는 우리 미술은 무엇보다도 통풍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각 전시장은 경쟁적 열기로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함양아, 새의 시선, 2008, 3채널 비디오 설치

 

채광이 잘된 공간 속에서 함양아의 전시실로 들어간 관객은 암순응을 거친 후 어둑한 미로와도 같은 방들로 연출된 무대들을 방문하게 된다. 어두운 우주 속에서 단자(monad)와도 같이 빛나는 세계들이 하나씩 펼쳐진다. 주로 영상설치로 이루어진 전시장의 구조는 단조로운 미니 극장의 방식을 벗어나면서도, 적지 않은 수의 영상을 무리 없이 보여준다. 먼저 입구 부근에 설치된 계단식 구조는 극장처럼 그 앞에 디스플레이 된 영상들에 집중하게 하는데, 스크린처럼 펼쳐진 무채색조의 픽셀 하나하나가 소우주를 이룬다. 클릭하듯이 픽셀 하나가 선택되면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칸막이로 나뉘어진 각각의 세계에 침투하여 그 세계를 분석적으로 펼쳐 보이는 것은 영상매체이다. 장면의 일부로 나오는 비좁은 고시원이나 생활의 달인이라 할 만한 이들의 작업과정 등은 일상에 편재하는 비루한 장소와 생산품이지만, 그 각각의 세계에 대해 현대인은 무지할 수밖에 없기에 낯설기만 하다. 다른 작품에서 나오는 날아가는 새의 시선이나 비눗방울 명인의 재주도 경이롭다. 물론 재미있고 신기한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벌레들과 도시의 중첩,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펜촉, 음침한 생체실험을 연상시키는 장면 등이 나오는 작품에서 작가는 세상의 어두운 구석 역시 조명한다. 그것은 과학이나 오락, 또는 영화에 속할 수도 있지만, 예술로 호출된다. 격리된 세계들을 미디어로 하나씩 탐사하는 함양아의 방식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작가는 가장 진부한 일상 속에 내재된 놀라운 질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세상만큼 이색적인 것도 없음을 알려준다. 그 각각의 세상은 영상 편집이라는 과정 외에 큰 가감이 없다. 펼쳐진 세계는 다음에 펼쳐질 세계를 위해 접혀 넣어지며, 이 병렬적 우주에서 그 어느 세계도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작가의 위치 또한 그렇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앞 객석 옆에 놓인 소박한 책상이 바로 작가의 자리이다. 스크린 뒤의 공간에 줄줄 녹아내리는 초상처럼, 작가는 점차 사라지기까지 하지만, 그러한 소멸을 통해 오히려 더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다. 닫혀 진 세계에서 각자 개별자로 살아갈 뿐인 현대인들에게 그 많은 세계를 탐사하고 모아놓고 보여주는 그 주체가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많은 세계를 자신의 수단으로 섭렵하고 선택하며 조율한다. 예술은 그 자체의 정체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분리된 우주의 경계들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방식이 된다. 세상에 의해 입력된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각자의 세계를 초월하여, 오직 작가란 존재만이 방치된 세계를 섭렵할 수 있는 시간과 열정, 그리고 나름의 수단이 있다. 그것은 근대의 분업체계와 조응하는 기존의 예술가상과 다르다. 삶과 예술은 동렬에 놓여진다. 다채로움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예술은 대립이 아니라, 수렴된다. 정확함, 속도, 복제라는 측면에서 탁월한 매체인 영상은 다채로운 세상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종합하는 효과적 수단이 된다. 

 


조해준, 기념수, 2003-2013, 100여개의 조각, 혼합재료, 드로잉, 입체, 설치, 300x400x400cm

 

조해준의 작품은 어눌한 어투이지만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을 닮았다. 자신에게 절박한 사연만 말하지만, 그 말이 작품의 중심에 놓이기에 매우 말이 많은 듯 보인다. 하나하나 정성껏 나무틀에 끼워져 있는 것들은 재미난 사연들이지만, 아마도 전시된 작품 속 텍스트를 모두 읽은 관객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당대의 역사와 사회가 묻어나는 흥미롭고도 진귀한 텍스트들이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 화법을 견지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소할 수도 있고, 무의미한 독백이나 수다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떤 특별한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 것도 아니다. 어떤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치밀하게 플롯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다. 화자도 불분명하다. 관객은 소리 없고 강조점 없이 배열된 텍스트에서 자기 나름대로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건져 가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모여진 각각의 편린들은 한 시대를 살아왔던 인간의 내면을 모자이크처럼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코드들을 대거 동원하여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던 현대미술가가 2000년대 초반 무렵 어린이의 일기 같은 다소간 소박한 작품으로 선회하게 된 것은 ‘아마추어 화가’인 부친의 영향 때문이다. 젊은 현대미술가의 이러한 선택은 후퇴나 퇴행이 아니라, 현대미술이 지향해온 원초적 타자와의 만남을 그만의 방식으로 실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미술이 잃어버렸던 서사를 되찾게 된다. 

 

이미지와 함께 텍스트로 병기된 서사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되찾은 서사에서 보편적 지식인이나 예술가 풍의 거대 담론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림을 사랑했지만 직업으로 삼지는 못했던 아버지 조동환과 함께 한 작품들은 끝없이 주체가 대면해온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산물이며, 작품이 목표로 하는 것 역시 타자와의 대화이다. 대화는 끝없이 이어지면서 세계의 이모저모를 들춰낸다. 이야기의 범위는 아들의 학창시절부터 일가친척의 가족사에 이르며, 요즘에는 그 범위를 공간적으로 확장하여 동유럽, 북한, 아랍 등의 다양한 이들의 사연을 담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 그것은 시각중심주의가 추동하는 독선적 세계관과 차이가 있다. 작은 나무 액자틀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변주를 보여주는 조해준의 작품들은 시각적인 차원에서는 단조롭고, 아마추어적이며 이것저것 끌어 모으는 절충적 방식이다. 입체작품에서 그 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전통적 조각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은 조각 작품들이나, 무려 1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작품 [기념 수]가 그렇다. 가장 규모가 큰 작품 [기념 수]는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100여개의 오브제들이 걸려있고 놓여있는, 갖가지 만물상으로 축조된 입체물이다. 그것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듯하다. 끝없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지칠 줄 모르고 가지를 쳐 나갈 것이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 시리즈, 2006-2013, 비누, 가변크기

 

신미경은 예술작품을 통해 세계를 축약한다. 작품 [비누로 쓰다]처럼 비누를 매개로 세계를 서술—작가의 용어로는 번역--하는데, 작가에게 세계는 동서고금의 예술작품들로 상징된다. 예술작품은, 특히 작가가 주로 참조한 이전시대의 유물들은 삶을 이루는 잡다한 물건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 시대의 잠재력을 집약하는 사물이기에, 어떤 세계의 내용을 담은 절정의 형식으로 인정된다. 프랑스하면 에펠탑이 생각나듯, 어떤 시대나 지역을 상상할 때 예술 작품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예술품은 그것들이 속한 세계의 중요한 단편으로 간주될 만하다. 작가는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불상 등을 통해 그 시대의 삶과 문화를 이해한다. 국내외에서 조각가로 훈련받은 기술은 전혀 다른 재료로도 원작과 다를 바 없는 절묘한 모사를 가능하게 했다. 모사가 가능해야 변형도 가능하다. 기술은 예술의 선결조건이다. 그런데 자고로 투명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신미경의 작품에서 원작의 색상과 재료는 다르게 변주되었고, 때로 바꿔치기도 일어난다. 원본은 비누처럼 닳고 없어진다. 변화와 소멸에 개입되는 상상 역시 작품의 독특한 의미가 된다. 가령 동양의 도자기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반투명한 용기라는 허구적인 형식으로 해석했으며, 목욕하는 비너스로 상징되는 미의 전형에 작가의 얼굴을 합성하기도 했다. 투명한 번역이란 불가능하지만, 논리상 번역은 무한대로 가능하다. 

 

발견된 것은 번역될 수 있다. 번역은 보편적인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곳 또는 그 시대와 지금 여기의 차이를 전제한다. 나무 박스 위에서 막 꺼낸 진귀한 보물들같이 연출한 도자기들은 이동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 차이를 통해 예술의 역사는 이어져왔으며, 소급해보면 몇 개의 기원을 갖지 않는 세계문명의 다양성이 가능한 조건이다. 신미경은 하나의 일관된 방법을 관철시킴으로서, 다양한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한다. 지상의 어떤 박물관도 이토록 다양한 수집품을 소장할 수 없을 것이다. 차분한 가운데 활기를 부여하는 붉은 색 계열로 칠해졌으며, 비누향기가 솔솔 풍기는 전시실은 그자체가 상상의 박물관이다. 컬렉션의 종류는 동서고금의 입상, 초상, 흉상. 시대별 지역별을 불문한다. 도자기의 경우 기형의 종류란 종류는 모두 섭렵한 듯 다양하다. 줄리앙 상만 죽 모아놓은 작품은 미술가로서의 자의식을, 적지 않게 발견되는 목욕하는 상들은 비누라는 재료를 의식한다. 분류 원칙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 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통해 분류원칙 자체가 달라지는 예는 흔히 있다. 입체는 물론 민화나 거울 같은 평면까지 비누조각으로 번역한 컬렉션들을 일관된 방식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뿔 형태의 좌대 위에 죽 놓여 진 동서고금의 상들은 입구부분만 조명이 되어 있는데, 어두운 뒤편은 무한대의 표시 같은 느낌을 준다. 신미경이 연출한 이 상상의 박물관은 세계가 다양하고 무한함을 암시한다.

 


공성훈, 절벽(담배피우는 남자) 181.8x227.3cm Oil on Canvas 2013

 

순수하게 회화만으로 채워진 공성훈의 전시실은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 중성적 공간의 좌표축을 크게 변경시키지 않지만, 작품 수가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비슷한 크기의 캔버스가 만드는 틀은 화이트 큐브를 넘어서 그만큼의 숫자로 뚫린 세계를 향한 창이 된다. 창은 때로 같은 소재의 작품을 모아서 방으로 연출된다. 가령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발표했던 개를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렇다. 어둑한 조명의 방 속에서 개라는 길들여진 자연과 인간의 만남은 그로테스크하다. 조화로운 공존이라기보다는 긴장에 가득한 대치국면에서 작가가 어떤 결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색조와 분위기만으로 불길한 느낌을 준다. 모텔의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변두리의 야경이나 근린 자연 등 인간의 욕망에 의해 변조된 자연은 파국을 통해서만 파열될 듯 갇혀있다. 그러나 이후의 풍경들에서 자연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 무대가 커지는 만큼 배우의 비중은 축소된다. 인간과 역사, 문명 등은 미소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들은 극도로 상대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매끄러운 풍경의 감상을 위해 걸리적거릴 수도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엔트로피에 맞서 인간의 크고 작은 의지를 상징하는 수직의 구조들이 여러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보다 큰 시간의 주기 속에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재배치하는 요즘의 그림은 보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다. 

 

자연의 외관 뿐 아니라, 자연의 요소와 과정이 포함된 원초적 풍경에는 임의적이고 협소한 인간의 규칙과 다른 자연의 순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은 각기 다른 세계로 입문시키기에, 기계적으로 정해진 물리적인 동 선과는 달리 더 멀리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다. 그것은 비슷한 무늬로 도배된 추상적 공간에서 느낄 수 없는 에너지를 요구한다. 작가가 캔버스에 투입한 에너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보기와 더불어 읽기를 요구한다. 자연이라는 숭고한 무대에 보일 듯 말 듯 섞어 짠 작은 에피소드들은 평범한 풍경화나 풍속화를 넘어서는 미묘한 지점에 있다. 그의 회화는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듯 다만 하나의 평면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그리고 문명, 인간), 묘사와 서사, 보기와 읽기(또는 쓰기)라는 다차원성을 탑재한다, 한동안 열심히 했던 영상설치 작업을 전혀 포함시키지 않고도 넓은 전시실을 가득 메운 작품들은, 회화라는 오래된 매체가 왜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외롭게 증명하려는 듯하다. 그림쟁이의 업보를 벗어나기 위해 오랜 우회를 한 시기에 공성훈은 ‘미디어 아트’ 쪽으로 먼저 인정을 받았지만, 그때 그가 구사한 기술은 주로 ‘로우 테크’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회화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이전처럼 다가오지 않는 않은 캔버스 위에 그는 최고의 기술을 구사해 나갔다. 회화는 최근 풍경에서 자주 나오는 바다와 같은 현실계와 만나는 가장 밀도 있는 형식이 되었다. 

 

출전; 월간미술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