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펼쳐진 시간 또는 기억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 전 (7.5-9.8, 갤러리 화이트블럭)
이선영(미술평론가)
이 전시의 부제에서 기억과 시간이라는 두 키워드는 내적인 관련이 있다. ‘행동이 시간의 주인인 한에서 지각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베르그송의 말을 이어, 들뢰즈가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곳, 즉 공간에서 사물들을 지각하듯이, 사물들이 지나가는 곳, 즉 시간에서 기억한다’고 말했듯이, 지각이 공간적 범주라면 기억은 시간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시간은 서로를 요구하고 끌어들인다. 또한 그것들은 작품의 서사와 관련된다. 이 전시의 세 작가는 서로 다른 기억으로 다른 시간감각, 다른 서사를 펼친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간은 연대기적이고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되어야 한다.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시간의 공을 튀게 함으로서, 기억은 과거의 재현을 넘어서 미지의 생성으로 열릴 것이다. 임동식의 작품에 자연과의 행복한 교감을 반추하는 열락의 순간이 있다면, 김성남의 작품은 그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대 속에서 숭고한 자연과 마주하는 인간의 원초적 전율이 느껴지고, 동식물이 춤을 추는 듯한 구현모의 작품은 사랑의 기억과 관련된 잔인한 진실이 깔려있다.

임동식
가장 연배가 있는 임동식의 회화에는 1981년 그가 설립한 ‘자연미술’ 그룹, ‘야투(野投)’에서의 설치와 행위 등, 자연 한가운데서 작품을 생성 소멸시켰던 경험들이 녹아있다. 2000년대 이후 그는 주로 회화를 그리게 되지만,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시간의 기억은 더욱 강렬한 현재를 획득하게 된다. 회화적 현재성 속에서 과거와 미래는 선적 인과 관계의 고리를 끊고 회귀한다. 굴광성 식물인 수선화들이 해가 지는 쪽으로 모두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작가도 인사를 한 작품 [고개 숙인 꽃과 함께 한 인사]는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행해진 어떤 경험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개인적 경험에 한정되지 않는다. 회화를 통해 되찾아진 시간은 현재를 가득 채우며, 과거를 재배치하고, 그 여운을 미래까지 지속한다. 빛은 자연과 작가에게 공통된 행동을 야기한다. 그것은 회화라는 소우주를 가득채운 또 다른 소우주에 편재하며 범신론적 숭고를 자아낸다.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 이 유토피아는 특정 장소를 넘어 어디에도 없는 상상의 장소가 되고, 지금과 여기는 새로워진다.

김성남
어떠한 길도 보이지 않는 빽빽한 숲, 죽은 짐승을 든 초인이 서있는 김성남의 작품은 더 근원적인 시간대, 가령 역사 이전의 신화적 시간에 닿아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신의 금기를 어긴 인간이 모든 것이 충족되었던 신의 정원에서 축출되었을 때, 인간은 수렵과 채취, 노동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며, 그러한 인간에게 자연은 모든 것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은 피 흘리는 희생을 요구하는 가혹한 상대가 되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가축들은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되기 시작한 동물들을 연상시킨다. 요즘 그리고 있는 숲은 도구적 이성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기 이전의 그 장소,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숲에 가깝다. 짙은 숲은 여전히 풍요롭지만 길들여지지 않아서 인간에게 도움을 줄지 피해를 줄지 알 수 없다. 숲이나 늪을 이루는 식물은 온전한 형태를 잃고 녹즙처럼 엉겨있는데, 여기에서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어떤 안전한 경계도 사라져 있다. 신화의 시대를 통과했지만, 이제 역사의 끝머리에 서있는 인간에게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는 현재 진행형이다.

구현모
임동식의 회화에 햇빛 가득한 찬란한 시간/기억이, 김성남의 회화에 거대한 자연에 직면한 원초적 두려움의 기억/시간이 있다면, 구현모의 영상 설치 작품은 현대적 일상의 틈에서 포착된 시간/기억이 두드러진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 맞춰 스텝을 맞추는 듯한 거미, 존 레넌의 노래 ‘러브’에 맞춰 몸을 뒤척이는 나무는 춤을 추는 듯하지만, 우울하게 축 처진 배경음들은 그것들이 비극적인 상황에 갇혀 있음을 예시한다. 긴 다리의 우아한 거미는 밀폐된 장소에서 빠져 나가려 몸부림치며, 초췌한 나무는 사랑의 몸살을 앓는다. 그 거미는 끝내 탈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무성한 잎에 비해 줄기가 너무 가느다란 그 보잘 것 없는 나무는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은유적 주인공들이 선 무대의 역설을 증폭하는 배경음은 그들이 당면한 시련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잔인한 사랑이나 유폐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태양이나 만월을 본 후의 잔상처럼 그 기억은 남아있다. 작가는 전시장 안에 밝은 달을 연출해서 그 안에 들어선 관객도 거미와 같은 처지로 만드는 공감주술을 펼친다.
출전; 퍼블릭 아트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