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세계에서 말하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자동차라는 소재를 통해 돈과 예술이라는 주제를 표현한 윤상천의 작품 [pine tree – MONEY]와 [pine tree - ART] (2009년)는 갤러리의 윈도우 전면에 막 출시된 상품처럼 배치되어 있다. 부조처럼 일부분만 관객 또는 행인을 향해 머리를 디밀고 있지만, 새로운 얼굴을 알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자연광과 인공조명에 번쩍거리는 외관이 물신주의적 마력을 발산하는 그것들은 마치 벽과 유리를 뚫고 창밖으로 달려 나올 듯이 현실감이 있다. 이 한 쌍의 작품이 ‘예술은 상품이고 상품은 예술이다’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서는 것은 자동차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자동차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었다. 헨리 포드가 ‘포드 시스템’이라고 알려진 바의 그 분업체계를 통해 부유층 뿐 아니라, 대량 생산 시스템의 부품이 되는 노동자들에게도 싼 값으로 자동차를 판매하려는 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에 더욱 그러했다. 윤상천의 작품은 진짜 자동차처럼 정교하지만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편이고 샘플이지만, 시스템을 배후에 깔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생산-소비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기계 장치인 것이다. 

 


윤상천,2009년 MONEY & ART

 

실제로 달릴 수 없는 이모형은 자동차의 기표이다. 성공한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유력한 기표의 위치를 선점해야만 한다. 오늘날 자동차는 대중의 욕망하는 대표적인 기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예술작품도 이렇듯 다수가 열망하는 기표-상품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도 예술이나 사회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자동차가 필요하며, 자동차 역시 당대의 미의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예술이 요구될 수 있지만, 예술과 산업 간의 교환이 공정하고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자동차로 대변되는 현대의 분업 시스템은 겉보기와 달리 합리적이지 않다. 분업은 공정한 교환이 아니라, 타자의 노동이라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수단(도구적 이성)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자연과 달리, 차이를 차별로 작은 차이를 큰 차이로 벌려나가면서 독점이 구축되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도 자동차처럼 물신적 체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다. 예술 역시 자동차처럼 겹겹이 구조화된 시스템을 통해 생산, 소비되는 대상의 하나이고, 그래서 체계의 구성원들은 이 물신화의 시스템에서 탈락되지 않으려고, 더 나아가 보다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한 전략에 몰두한다. 

 

예술이 다른 상품과 다를 바 없는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이를 통해 예술가도 최소한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생활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이라는 것이 하나를 용인하면 그다음의 타협을 요구하며, 그렇게 계속 욕망에 목이 마른 상태를 유지, 확대시킨다는 점에 질곡이 있다. 분명한 것은 성공이나 흥행에 반드시 필요한 물신적 체계라는 것이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내는 독점적 구조이기에, 각자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과는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소재로 한 윤상천의 또 다른 작품 [Pine tree art car](2011년)는 실제로 움직일 수 있다. 작가는 실제의 차 표면을 주변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는 도료로 도색하였다. 이렇게 튜닝 된 차로 대구의 서문시장을 지나가고 있는 장면은 갤러리 같은 추상적 공간보다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생산된 상품들이 모여들고 돈과 교환되는 북적거리는 시장판 한가운데에 있다. 주변세계를 복사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는 의태(擬態)적 생물체처럼, 그 거울 같은 차는 상품이 유통되는 세계를 반사한다. 

 

상품의 세계 자체가 서로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의 방 같은 구조를 이룬다. 복제에 기반 하는 생산시스템 뿐 아니라, 소비 역시 그러하다. 거울을 마주하듯이 서로의 소유물을 바라보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북돋을 수 있어야만 대량 생산소비 시스템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상천의 자동차 시리즈가 물신화의 정점에 있는 소비상품을 통해 현대사회의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면, 회화는 보다 묵시론적이다. 거기에서는 파편들이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 하는 질서를 잃고 조각난 채 떠돈다. 이상적인 주행을 하는 자동차처럼 쭉 뻗은 길을 질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질주의 종착점에서 기다리는 것은 조화와 질서가 아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이에게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때로는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도달하는 곳이 어디이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오직 하나로 뻗은 길로만 가야한다면 모순은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모순은 증폭되며, 증폭된 모순은 단지 은폐될 뿐이다. 윤상천의 복잡한 그림은 억압된 것들이 복귀하는 장이다. 운전자의 꿈은 잘 닦인 길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유토피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처럼 뚫린 길은 이제 적체와 지체 현상을 반복하면서 발전지상주의적 환상의 허구성을 도처에서 드러낸다. 

 


윤상천,2012년 09월27일 서문시장에서

 

고속도로 같이 생긴 직선적 세계관에는 뭔가 종말론적인 것이 있다. 근대주의 이데올로기가 추동하는 발전과 진보가 사실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선의 끝, 그 결말은 파국적이다. 좀 나아봤자 파국을 타자들에게 전가함으로서 잠시 유예될 뿐이다. 많은 역사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근대의 역사주의는 종말론적 세계관과 상당부분 닮았다. 2013년에 발표된 윤상천의 회화작품은 제목부터가 매우 파편적이고 복잡하다. 작품 제목에는 작품의 내용을 이루는 도상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가령 [Com-Ele-Lab-Pol-Dis-Hop··· (소통, 선거, 노동, 정치, 장애, 희망 ···)], [Boo-Tee-Ani-Old-Lux ··· (책, 치아, 애니팡, 노인, 사치 ···)], [ Env-Nat-Pol-Ent-Var-Poi·· (환경, 자연, 오염, 입시, 변종, 중독)], [Fri-New-Rel-Mas-Uni-Fre···(친구, 신문, 통일, 종교, 대학살, 자유···/어깨동무)]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파편적이고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의 배후에는 자동차로 상징되는 산업사회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보고속도의 시대가 있다. 이전시대의 돈이 그 역할을 그렇게 수행했듯이, 모든 것이 코드화 된다. 그러나 코드화되지 못하는 것들은 자동차로 지나가면서 간과했던 그것들처럼 되돌아온다. 

 

발전, 또는 진보를 향해 달려왔던 기나긴 직선의 시간감각은 점점 짧아지는 현재로 분절 화된다. 탈근대는 근대와 질적으로 다르기 보다는 가속도가 붙은 근대라고 봐야할 것이다. 정연한 인과논리에 의해 엮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수많은 도상-기표들이 쇄도하는 윤상천의 그림은 고속도로나 철도 같은 장대한 서사의 시대가 끝나고, 서사 자체를 형성할 수 있을 만한 시간감각이 결여된 비트의 시대를 반영한다. 무한 속도로 질주하는 정보화는 이동조차 필요 없는 영원한 현재의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주체가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은 여전히 서사이기 때문에,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각광받는다.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흥행몰이를 하는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에는 반드시 잘 조직화된 서사가 있다. 회화도 한때는 서사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둘러보지만, 더 의미화하기 어려워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하기 힘들어진 시대에, 제각각의 욕망을 따라 사발팔방으로 떠도는 기표들을 어떻게 묶어내서 조직화할 것인가. 무의미의 우주와 변별되는 상징적 우주를 어떻게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화가는 자신이 벙어리인지도 모르는 대중을 대신하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출전 ; 미술과 비평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