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된 역사의 기념비
이선영(미술평론가)
브론즈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고경숙의 조각품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기념비적이다. 기념비는 꼭 규모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세잔의 풍경화나 정물화, 또는 인물화처럼 잘 구축된 소우주로서의 예술작품은 기념비적이라고 평가된다. 반면 광고를 비롯해서, 현대의 공공영역을 점령하고 있는 다양한 형식의 스펙터클은 규모가 클지라도 그 일시성과 우연성으로 기념비와 거리가 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일정기간 동안만 서 있는 가건물조차도 건축적인 스케일을 가지는 경우가 흔한데, 보다 빠른 회전주기를 통해서 가치를 창출하는 현대에 와서 기념비는 껍데기만 남아있다.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주차나 교통을 방해할 것 같은 큰 나무는 제거 및 교체의 대상이 된다. 근대의 분업화와 자율화가 순수한 미술작품을 규정하기 이전에 조각은 기념비, 또는 기념비의 일부였다. 승전비, 공동묘지나 교회의 장식물 등이 그 예이다. 실내에 걸리는 그림, 그리고 일시적으로 있다가 철거되는 무대 식의 설치물과 달리, 조각은 현실 공간에 서있을 수 있기에 기념비가 사라진 시대에도 그 형식 내부에는 기념비라는 문화적 유전자를 각인하고 있다. 기념비가 이미 시대착오적인 된 근대에 역사적 기념비가 번성하는 것을 음울하게 바라본 발터 벤야민은 ‘기념물은 화석화된 신화’라고 비판하면서, 문명의 기록인 기념비에서 야만의 기록을 읽었다.
역사가 신화가 되는 순간을 기록하는 기념비의 내용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역사적 교훈과 계몽을 위해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조차도 순화되고 화해와 종합으로 귀결되곤 한다. [동 서 그 화합의 장], [한국의 얼] 등으로 붙여진 고경숙의 작품 제목은 기념비 풍의 작품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돌이나 금속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견고한 단일재료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요소는 다양하다. 돌로 만들어진 작품의 경우 여러 색의 돌이 활용된다. 조각이지만 색은 억압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첨가된 것이 아닌, 자체의 재료로부터 나온 색은 빛을 머금고 있다. 작품 [한국의 얼] 상단 부근에 뭉실뭉실 떠올라 있는 살구 색 대리석은 황혼의 빛을 반영하는 듯하다. 여러 형태와 색상을 가지는 작품의 구성요소들은 종합을 질서와 조화라는 내용과 연결시킨다. 다양한 색의 돌을 한 작품에 활용하는 작품에서 명암 대조는 그 자체가 상징적이다. 무질서를 딛고서 질서를 지향하는 기념비적 작품에서는 명과 암이라는 이항대립은 잠재적이면서도 명시적인 지양 또는 지향의 관계에 놓인다. 작지만 기념비적인 형식을 고수하는 고경숙의 작품에서 밝음의 비중은 더욱 크다. 어둠은 무의식처럼 기저에 깔려있다. 그러나 어둠은 그 위에 세워질 모든 구조들의 토대를 이룬다.
검은 돌로 된 단 위에 밝은 색 건축적 구조가 있거나 액체처럼 깔린 검은 돌단 위에 하얀 문이 세워진 [한국의 얼] 시리즈는 그 명암의 대조 뿐 아니라, 상하의 위치관계를 통해 어두운 카오스를 극복하는 밝은 코스모스의 힘을 기념하는 듯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 또는 발견하려는 예술가에게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선후의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곤 하지만, 신화적 사고는 다르다. 대부분의 신화적 서사는 카오스에서 어떻게 코스모스가 발생했는가를 이야기한다. 기념비적 예술의 대표적 역할은 공동체의 서사를 담는 것에 있다. 오늘날 진정한 기념비가 사라진 것은 공동체의 사라짐과 무관치 않다. 공동체는 기념비처럼 잃어버린 가치이며, 모두가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온전한 이야기로 탄생되기를 기다린다. 공간 매체인 조각에서 서사는 공시적으로 압축되어 있지만, 관객은 제 나름의 시간적 순서로 그것을 풀어 읽는다. 모든 기념비에는 서사가 압축되어 있다. 기디온은 ‘모든 시대는 기념비들의 형태로 상징을 창조하려는 욕구를 가진다’고 하면서, 기념비란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기원한 용어로 후대에 전수될 것들이라고 정의한다. 서사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간다. [한국의 얼] 시리즈의 한 작품은 친절하게도 손까지 등장하여 어떤 방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서사는 여러 우회로를 통과한다 해도 대체로 선을 따라 흐른다. 공간적 양식인 미술은 선적인 서사를 소화하는 나름의 방식을 고안해왔다. 여러 작품이 함께 있을 때 관객은 그것을 지각하는 순서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읽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은 통과의례가 일어날 중요한 지점이다. 여로 위에 세워진 이런저런 문턱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선적 흐름에서 도약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오늘날에는 이 문들이 너무 코드화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일렬로 배열된 문들로 몰아가는 적대적인 흐름으로 전락했다. 전형적인 기념비들은 수직/수평적 이동을 예시하는 탑이나 문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곤 한다. 고경숙의 작품에서 검은 기단 위에 세워진 밝은 구조는 문의 형태를 가진다. 이러한 밝음은 아치, 또는 꽃잎형태의 외곽선을 통해서도 예시된다. 아치, 또는 꽃잎형태의 문은 미래로 훤히 뚫려 있다. 그것은 과거 혹은 지금의 혼돈을 이겨내는 여로에 놓인다. 하부의 혼돈은 빛으로 승화될 상부구조에 비해 깜깜하다. 어둠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묵직한 어둠은 표피적인 밝음에 비해 생성과 변화를 위한 에너지가 고여 있는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어둠의 몫을 최대한 활용해 왔다. 과학사가 막스 야머는 과학에서 공간 개념의 역사를 살펴본 책 [공간개념]에서 혼돈(chaos)이란 말의 재미있는 기원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카오스는 그리스어 어근에 ‘하품’과 ‘벌린 입의 쩍 벌어진 틈’과 같이 놀라움과 두려움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고대인의 사고에서 우주가 창생되기 이전의 원초적 상태는 ‘하품하면서 입을 벌리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이네인’의 명사형이며 ‘캄캄한 허공’을 뜻했다. 이 카오스에서 암흑과 밤이 생겼다. 신화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재확인된다. 일상 역시 신화가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주목했듯이, 도시는 현대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장소이다. 인간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그 어느 순간이고 신화는 회귀하는 것이다. [공간 개념]에서 막스 야머가 인용하는 카오스의 고대적 어원은 하품으로 인해 보여 지는 목구멍의 어두움이 두려움과 호기심을 주는 미지의 영역임을 알려준다. 형이상학적으로 다가오는 신화적 사고, 그것에 깔린 육체적인 감각은 예술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고경숙의 작품에서 그것은 잠재적 움직임을 담고 있는 비대칭 구조, 그리고 세워진 면을 관통하는 가래떡 모양의 유동적 구조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뱀처럼 구불구불 움직이며 우뚝 서 있는 표면에 그 흔적들을 남긴다. 브론즈 작품 [깨달은 이]에서는 종치는 사람들이 종을 울리는 기관이 되어 소리를 낸다. 작가는 희생자와 선지자의 모습의 중첩하면서 죽은 상징으로서의 기념비를 넘어서 육화된 형식으로 표현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