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플래그 스테이션, 현실을 보는 눈



  현실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는가. 변하고 있다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이전에 작가들은 현실에서 시작해 재차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작가들은 가상현실(아님 대체현실?)을 전제하기 시작했고, 현실을 가상현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작업환경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이미지의 소비로. 현실인식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로 채워지고(아님 아예 대체되고), 덩달아 창작 역시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술이 된 것일까. 현실이나 가상현실 모두가 현실이고 현실인식으로 볼 수가 있다면, 현실 내지 현실인식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까. 여기에 현실을 보는 같으면서 다른, 아님 포개지면서 차이나는 세 갈래 시선들이 있다. 


               이종구, 풍경-봄여름가을겨울, 145x290cm, 한지에 아크릴릭, 2008


  이종구. 다른 사람들이 도시의 현실을 그릴 때, 이종구는 농촌의 현실을 그렸다. 정부양곡 종이부대에 그림을 그렸고, 쌀자루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전상서와 월급봉투를, 무슨 철새나 되는 것처럼 잊힐 만하면 찾아오는 정치인들의 찢겨진 선거 포스터를 그렸다. 농촌의 현실을 증언하기 위해 그림과 함께 오브제를 도입해 실감을 더한 것. 그렇게 오지리 농부들의 삶이며 일상을 그렸고, 그들과 동고동락했을, 그네들의 살림밑천이면서 살붙이이기도 했을 소를 그렸다. 존재에겐 존재다움이 배어들고, 농부들에게선 농부다움이 묻어나온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입었던 꽃 분홍 문양이 프린트된 몸뻬 바지를 빨면 분홍색 물이 묻어나오고, 파란색 바지를 빨면 파란색 물이 묻어나온다. 아마도 농부 자신을 빨면 흙물이 묻어나올 것이다. 

그 농부들의 들녘 위로 세계 최대의 항공사인 텔타 항공 소속 여객기가 날아오르면서 동체보다도 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는 대개 전운과 전조 그리고 암운과 같은 좋지 않은 기운을 동반하고 암시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텔타 항공은 무슨 좋지 않은 기운이라도 몰고 오는가. 세계 최대의 텔타 항공기 밖으로 세계 최고의 기동 타격대 텔타포스의 낙화 꽃이 흩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동안 같으면서 다른 하늘에선 철새들의 대오가 또 다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경과는 무관한(?) 농촌 들녘의 아침을 깨운다. 그렇게 작가는 오지리 농부들을 그리고 농부들의 들녘을 그리면서 그 들녘에 포개진 미국의 그림자를 그린다. 아마도 한미연합훈련을 그린 것이거나 그로부터 착상된 것을 그린 것일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때로 한미관계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 현실적이고 실감할 때가 많다. 그렇게 실감나는 현장 중 하나가 황해에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황해의 수평선에 맞춰 가로로 뉘어 그렸다. 이렇게 누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보루 내지 마지노선 같고, 철거되어야 한다는 코멘트 같고, 한미관계가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수평적인 관계로 고쳐져야 한다는 제스처 같다.         


               박용일, 종이배 풍경, 캔버스에 유화


  박용일. 작가는 재개발건축현장을 그린다. 왜 하필 재개발건축현장인가. 재개발건축현장은 작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풍경-바람 시리즈, 어수선한 풍경 시리즈, 종이배풍경 시리즈, 그리고 목련이 피기까지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줄곧 풍경을 그렸지만, 그가 그린 풍경은 언제나 자연풍경이 아닌 재개발건축현장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담벼락에 빨간 페인트로 넘버링 된 어수선한 풍경 위로 바람이 분다.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 법칙의 바람이 불고, 살가운 삶의 풍경을 일소하고 천지개벽하는 광풍이 분다. 작가는 무슨 떡시루처럼 생긴 스트라이프 줄무늬의 가림 막 사이로 그 광풍이 흩어놓은 삶의 흔적을 본다(재개발현장을 임시방편으로 덮어서 가리는 가림 막과 타폴린 천은 그 이면에 도시의 부도덕과 불합리를, 폐해며 폐부를 숨긴다). 그 흔적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흔적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도(그리고 잊혀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작가는 그림 속에다 종이배를 슬쩍 밀어 넣는다. 종이배는 한때 그곳에 살았었을 사람들의 삶이며 꿈을 싣고 희망의 나라로, 좀 더 살만한 나라로 항해중이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광풍은 종이배라고해서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일소된 삶의 풍경이며 광풍에 휩쓸려간 종이배의 형해 위로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목련이 피는데, 세상사에 무심한 개화여서 더 화사하고 더 처연한 느낌이다. 

미셀 푸코는 있으면서 없는 장소,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들지는 못하는 장소, 그래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소, 잠정적인 장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장소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군대와 감옥, 기숙사와 정신병원을 포함시킨다. 여기에다 재개발건축현장을 더할 수 있겠다.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이며 이행 중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장소 혹은 초장소에선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온갖 억압의 계기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인다. 억압의 저장고(폭탄?)라고나 할까. 그래서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의 계기를 본다. 어수선한 풍경이며 일소된 삶의 흔적 위로 흐드러진 개나리며 진달래며 목련의 개화를 이런 혁명의 메타포로 볼 수가 있을까. 아님 그저 세상사와는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한 자연의 본성을 확인시켜줄 뿐인 걸까.  


                                        이보람_희생자_oil and acrylic on canvas_193x130cm_2010


  이보람.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싫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윤리적 공감이며 참여적 연대를 호소해오는 것과 같은 양심에 가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인식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혹 불편하거나 불쾌해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예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이미지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좋다. 현실이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미지가 유해하거나 적어도 직접 해를 가해올 일이 없기 때문이며,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이 나의 현실이 아닌 너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너의 현실은 구체적 현실이 아닌 추상적 현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관한한, 그리고 너의 현실에 관한한 그 이미지며 현실은 폭력적일 수록 좋고 자극적일 수록 좋다. 너의 현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헤매는, 기꺼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줄 준비가 돼 있는, 권태와 무의미로 무장한 타임킬러인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구실이며 스펙터클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런 인식도 건드린다. 

현실은 경험으로 축조된다. 그렇게 축조된 사람들의 현실은 좁다. 생활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좁아진 바운더리를 인식으로 채우고 확장한다. 현실인식은 직접경험으로부터도 오고 간접경험으로부터도 온다. 직접경험이 만들어준 현실인식의 영역은 자꾸 좁아지고(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권이 가속되고), 간접경험에 의한 현실인식의 범주는 점차 확장된다. 그래서 종래에는 마침내 간접경험에 의해서만 현실인식이 축조되고, 현실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한 인식만으로 대체된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현실을 현실 자체로서 경험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경험한다. 현실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반영된 현실을 본다. 이미지의 눈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것. 물론 현실과 현실이 반영된 이미지는 다르고, 앞으로도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공연하게는 이미지를 현실이라 생각하고, 현실을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미지는 현실인식을 삼키고 현실 자체를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작가는 바로 이런 문제 곧 사람들이 어떻게 이미지(그 자체 현실이 된)를 소비하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불현듯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 대한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소사이어티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