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화 된 이미지의 퇴적층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주은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주변적 사물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선택된 사물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거대한 화면으로 확대한 후 다층적인 물질적 처리를 거치면서 평면 또는 3차원 공간에 일종의 사물 극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사람 대신에 배우 역할을 맡은 사물들은 부재하는 인간을 연상시키고, 작품은 부재의 흔적과 현존을 드러낸다. 이 무대에서 사물들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을 넘어서 자신의 자율적인 삶을 펼쳐나간다. 사물은 소유가 아닌, 향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 변모한다. 맨 처음에는 어떤 기능과 목적을 가졌을지 모를 대상들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겹과 결’(layer & grain, 2012년 개인전 부제)을 갖게 된다. 작품 속 사물이 대부분 선택된 것이기에 애초부터 겹과 결이 내재해있지만, 작가는 뻔한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의 특성을 온전히 살려내거나 더 늘려나간다.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대상인 상품은 단번에 그 전모가 파악되기를 바라는 반면에, 예술가들은 자신이 다루는 것에 무한대의 뉘앙스를 부여하려 한다.
그렇게 연출된 사물들은 베일이나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애매하고 신비하다. 상업과 과학이 요구하는 명료함이 이익 창출과 사실 확인을 위한 단축적인 통로라면, 예술은 이 직선 코스에 미로에 가까운 무한한 우회로를 부여함으로서 난해하고 모호해 진다. 한마디로 해도 될 것을 열 마디 백 마디로 늘릴 수 있는 것이 예술의 심미적 속성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장황하고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기만과 사기의 가능성이 있다. 미학자나 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해 엄청난 의미 부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언제라도 심심풀이 오락이나 한갓된 장식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술은 부질없는 허구에 가깝기는 하지만, 허구 또한 삶에 필요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예술과 허구의 관계를 알려주는 매개고리이다. 현(진)실에 이르는 통로가 허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허구도 다수에게 공유되면 현실이 된다. 예술가도 자신만의 수단을 가지고 현(진)실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 그렇게 서 있다.

이주은의 작품에서 목공 장식, 종이컵, 낡은 샹들리에, 천을 씌운 의자, 조명기구는 각자 어떤 이야기의 함축적 단면으로, 때로는 무대에 함께 서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작가는 현실의 작은 단편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가들이나 정치인들이 남발 하곤 하는 거대서사 대신에, 작지만 큰 울림을 자아내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예술가도 큰 야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작은 것에 무한한 겹과 결을 부여함으로서 크게 메아리치게 하는 미시담론적 전략은 무(無) 권력자들의 오래되고도 주효한 전략이 아닐까. 작품마다 넉넉히 비워놓은 공간은 무대에 던져진 사물의 여운, 또는 메아리를 위한 여백이다. 가령 작품 [사이 너머로 바라보다]에서 거대한 대리석 기둥처럼 보이는 것은 종이컵이다. 일회용 용기는 고대의 신전 같은 광활한 시공간적 진폭을 가지는 풍경이 된다. 일상의 소소한 사물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비상하는 것이다. 일상적 사물은 넉넉하게 잡힌 여백과 어우러져 경이로운 풍경으로 거듭난다.
작품 속 사물은 종이컵이나 의자같이 원래 분명한 용도가 있는 것들 뿐 아니라, 목수가 만들어 놓은 목공 샘플처럼 무엇에 사용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깍다 만 말머리, 손잡이, 문고리, 의자 살의 어떤 부품 등으로 추측되는 것들은 대부분 손에 쥘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크기지만, 스케일을 알 수 없는 배경에 재 맥락화 된다. 블루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하는 천들은 망망대해나 누런 사막, 하얀 눈밭 같은 하염없는 공간을 연출한다. 이 무한한 공간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확고한 지표 없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표류는 실제와 달리 즐길만한 방황을 야기한다. 확대된 피사체들 위에 걸쭉한 반투명 도료들이 퇴적층처럼 쌓인다. 일부러 흐릿하게 찍는 것은 아니지만, 용도가 모호한 작은 피사체가 무대나 풍경을 연상시키는 스케일로 확대되면서 애초에 의도치 않았던 시각적 무의식들이 드러난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나 사진 같은 현대적 매체와 시각적 무의식의 관계를 밝힌 바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육안에 비해 상황을 더 쉽게 떼어낼 수 있는 카메라는 예측치 못했던 행동 공간을 크게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들어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신분석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듯이,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시각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단추나 승차권 등을 붙여 놓은 다다이스트의 작품 예를 들면서, 그러한 방법으로 얻은 것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가차 없이 부정한다고 본다. 즉 예술작품은 다다이스트들에 이르러 유혹적인 시각적 환영을 그치고 포탄이 되었다. 이주은의 작품은 다다와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연극성을 통해 시각적 환영을 거부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사물의 단순한 표면의 겹과 결을 확장함으로서 새로운 아우라가 덧씌워진다. 사진을 매개로한 사물극의 속성은 많은 것들이 사진을 통하여 원래의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맥락을 창출하는 현대의 시각적 관습을 생각하게 한다.

불연속과 간극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 벤야민은 위의 논문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영화로 하여 자신의 생생한 인격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으로 그 분위기를 포기하면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말한다. 그는 루돌프 아른하임을 인용--‘최근의 경향이 배우를 마치 그 효과를 위하여 골라서 적당한 곳에 배치한 소도구처럼 다루는 데 있다’, ‘배우가 소도구가 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소도구가 배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하면서, ‘가장 큰 효과는 거의 언제나 될 수 있는 대로 연기를 최소한으로 한정하는 데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찔러오는 부분’(푼크툼)을 발견하기도 한다. 무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의식적 노력은, 처음에는 주로 자기 물건을 대상으로 했다가, 나중에는 타인의 것으로 바꾼 점에도 잘 나타난다. 타인의 물건은 더 모호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용했던 낡은 물건들을 사진으로 수집해 놓은 [다락방 선반 위에 올려놓다]는 요즘 작품처럼 확대하지는 않았지만, 사물자체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있다. 액자 같은 것을 에폭시로 그대로 뜬 작품은 그것이 걸린 벽을 하나의 그림으로 만든다. 사물의 주인이나 액자안의 내용물 같은 알맹이 없이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은 사물극 같은 요즘 작품으로 이어진다. 초현실주의의 ‘발견된 오브제’처럼 무의식적 흐름에 속해 선택 된 사물로부터 시작한다. 발견된 오브제를 통해 무의식과 꿈에 나타나는 욕망을 발굴하고 일상속의 경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미학을 따른다. 가령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중의 하나인 ‘객관적 우연’은 일상에서 우연히 만난 사물을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이어주는 열쇄로 삼는다. 1936년 초현실주의 오브제 전시회를 열었던 앙드레 브르통은 발굴한 사물의 역할에 대해, ‘이러한 발굴물이 질식할 것 같은 감정적인 주저의 기분에서 개인을 해방시키고 그에게 활력을 회복시킨다’고 평가했다.
초현실주의 미학은 이주은의 작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꿈 속 같은 사물을 설명해 준다. 작가는 평면작품이면서도 캔버스가 아닌 나무판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 위에 사진과 레진이 겹쳐짐으로 인해 나무판의 색과 결이 반영된다. 그것은 마치 막스 에른스트가 어릴 적에 침대 맞은편에 있는 모조 마호가니 널판을 보고 깨지도 자지도 않은 상태에서 꾼 꿈을 통해 만든 프로타주 모음집을 연상시킨다. 나뭇결로 시작된 에른스트의 경이로운 박물지처럼, 이주은의 작품 역시 일상적 사물로부터 시작되는 무의식의 자동기술을 시도한다. 작가는 사물의 사진 찍고 출력하여 나무판에다 배접하듯 붙이고 투명한 레진을 붓고 사포로 갈고, 그 위에 또 드로잉을 하고 물감 흘리는 등의 방법은 식품의 풍미를 더하기 위한 복잡한 레시피와 같다. 같은 재료라도 ‘겹과 결’이 어떤가에 따라 음식의 맛은 둔탁함에서 미묘함까지의 크고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흐릿한 사진과 반짝이는 레진의 결합은 흐르는 흔적들과 얼룩을 작품 표면에 남긴다. 흔적과 얼룩들은 조형적 의지 보다는 물질과 중력의 힘에 의한다.

사진과 회화적 과정 사이에 밀도 높은 액체가 매개됨으로서, 피사체는 농익은 시공간에 푹 담겨진 사물이 된다. 사물은 평면적 무대로부터 현실공간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조명등, 빈 의자, 샹들리에 같은 무대적 장치들은 사물의 실루엣대로 오려져 전시 공간에 직접 세워진다. 대부분 실제 크기인 그것들은 3차원 공간에 배치할 수는 있지만, 뒷면이 아무 처리도 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지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등장인물 없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단순한 세트들인 것이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조합된 것임을 숨기지 않은 사물의 시커먼 이면은 작품의 얇은 표면과 연동된다. 현대미술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으로부터 많은 것을 끌어낸다. 이주은의 초현실주의적이며 연극적인 작품은 표면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미학과 관련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재성과 현실감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인 개인적 경험, 바로 꿈과 같은 경험에 호소하는 현대 예술의 연극적 기원을 초현실주의까지 소급한다. 저자는 [현대 조각의 흐름]에서 초현실주의 오브제들의 작품의 의미가 표면에서 만들어짐을 지적한 바 있다.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고정된 구조적 핵심이 없는 텅 빈 입체는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붕괴시키는 마술적 경험의 섬을 만들어낸다. 사물은 실제(literal) 공간의 짜임 속으로 밀어 넣어진 낯선 실체이다. 그 시간은 주어진 원인에 근거하는 논리적인 추론의 시간과는 달리, 예측하지 못한 경험이 느리게 전개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과 사물 Art and Objecthood’(마이클 프리드)의 차이이다. 예술에서 사물로 공이 넘어오면서 연극성은 주요 키워드가 된다. 이주은의 작품에는 ‘onstage’(2011년 개인전 부제), ‘모노로그 S#’(2012년 개인전 부제)같은 연극 용어가 자주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에 의해 열린 얇은 가상의 무대와 삶의 무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연극무대로 가정된 공간에서 이미지를 설치한다. 그것은 사물이면서 이미지인 경계 위의 것들이다. 자명한 듯 존재하는 사물은 불가사의한 존재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주은은 확실한 존재를 심미적인 구름으로 뿌옇게 만드는 악취미에 빠져 있는 작가는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전략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다른 것으로서의 대상 그자체로 돌아와야 한다’고 믿었던 작가 프랑시스 퐁주와 비슷하다.
미학적 투명함에의 요구는 그 이전의 불투명을 전제한다. 퐁주는 [사물의 광란]에서 이런 상황을 ‘밤 같은 낮’으로 비유한다. 그는 ‘모든 사물은 마치 벼랑 끝에 있는 것과 같다. 사물은 그림자의 끝에 있고, 그 그림자는 너무 선명하고 어두워 구덩이처럼 보인다. 사물은 자신의 벼랑 끝에 서있다. 낮이 자신의 빛의 과다함으로 인해 가려져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현대의 작가는 이렇게 침묵하는 사물로부터 시작한다. 이주은이 사물에 부여하는 ‘겹과 결’ 역시 관객에게 ‘사물의 두께 속으로 떠나는 여행’(퐁주)을 제안한다. 작업은 사물과 말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가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미로와 같은 복잡한 움직임이며, 작품에 대한 해석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자주 연출하는 사막이나 바다 같은 바깥의 공간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일상적 문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무대에 선 사물들은 단절과 새로운 이어짐을 반복한다. 인간이 아닌 사물의 편에선 이주은의 어법은 이미 있는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생성의 장을 강조한다. 그것은 고풍스럽고 고요한 작품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현대예술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출전; OCI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