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바깥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대학원 실기 실에서 만난 미래의 예비 작가들 및 작품들은 곧 그들 앞에 펼쳐질 거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예감을 던져준다. 불확실성에는 활기와 불안이 동시에 있다. 젊음과 예술이 공유하는 이 양가적 특징은 미지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이제 학교라는 둥지를 떠나서 홀로 날아올라야 하는 시점에서 기존의 나침반은 참고자료의 위치로 되돌려 진다. 교과서가 아닌, 자기만의 참고자료가 쌓일수록 작품은 새로운 폭과 깊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참고자료는 보다 결정적이겠지만, 각자의 목소리가 요구되는 현실에서 변형은 불가피하다. 변형은 ‘차이의 흔적을 남기는 말소’(자크 데리다)이다. 그것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근대에 만들어진 미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면서, 불발로 그칠 시도들을 완전히 무화시키지 않으며 조금씩 나아가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공식적 교육을 통해 습득한 기존의 참고사항은 재배치(remap)되고 어떤 것은 삭제, 강화되면서 각자의 어법이 형성된다.
이제 각자의 지도를 가지고 바깥으로 떠나야 한다. 바깥이란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작업하는 삶의 터전을 말한다. 바깥의 불확실성은 계통수가 아닌, 뿌리줄기 같은 나아감을 요구한다. 어떤 조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학생이라는 집단은 작가라는 개인으로 거듭난다. 학생이라는 조건은 이제 학기수로 올라가는 꼬리표가 아니라, 평생의 업이 된다. 학생으로서의 인간은 입학도 졸업도 없지만, 평생 시험당할 운명에 처해진다. 생물학적으로 보다 완전한 형태로 태어나는 동물과 달리, 유년기를 오래 끄는 인간에게 학교 및 ‘학교적인 것’은 평생 지속될 수밖에 없지만, 이제 학습 및 실행의 방식은 보다 열려있고 다(多) 중심적이다. 선형적 진도가 아니라, 미로 같은 방황을 야기 시킬 이러한 탈(脫) 중심화가 자유를 향한 도약일지 자의를 향한 추락일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러하듯, 예술 역시 불확실만이 확실하다는 역설을 피할 수 없다.
예술의 본질을 불확실성으로 보는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존재의 미확정성, 그 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순수한 격렬함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예술가의 운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또한 그 힘에 절제를 가함으로서 하나의 형태로서의 성취를 강요함으로서 그것을 억제하는 것도 예술가의 운명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예술가의 임무는 단지 존재의 미결정성에 몸을 내맡기는 것을 넘어서, 존재에 결단과 엄밀함,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정확한 언어의 결단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이다. 세계는 무한하지만 표현은 유한하다. 무한과 유한 사이의 적절한 관계는 새롭고 이질적인 것을 소통할 수 있게 한다. 삶과 예술은 불확정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래서 진정한 작가는 정체불명의 ‘미술판’이 아닌, 삶이라는 구체적 토양에 예술을 뿌리 내리려 한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도 그가 진정 진하게 삶을 향유하고 있다면 그 삶의 절정에 예술적인 것을 놓고자 할 것이다.
삶과 예술이 불확실성이라는 매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현(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칸막이 처진 각각의 세계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작품들은 명확한 형태나 이야기로부터 사정없이 멀어지고 있다. ‘무엇’은 아니지만, ‘어디로’인지는 불확실하다. ‘--이다’가 아닌 ‘--이 아니다’는 식의 부정어법이다. 이러한 암중모색은 아직 20대일 그들이 내용적으로 아직 할 말이 없거나 형식적으로 아직 실험중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체계나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탈(脫) 재현주의적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동양화과’라는 간판이 무색하게도, 많은 작품들이 종이와 붓이라는 전통적 매체로부터 자유로웠고, 뭔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의지가 의식적, 무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동/서양화를 떠나서 드로잉이라는 기초적 방법론은 이러한 다양한 경향을 포괄해준다. 2차원 또는 3차원으로 확장되는 선적 흐름은 마치 생물이 발생/성장하는 듯한 과정을 밟는다. 그것은 유기적 연속성(부분과 전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을 전제하지 않으며, 기하학적 선들로부터 거리가 먼 이러한 흐름은 구조 이전, 또는 구조 이후의 것이다.
‘구조’가 ‘주의’로 고양되었던 구조주의가 가장 먼저 나타난 분야는 생물학과 언어학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확립된 구조를 재현하거나 내면화하는 것보다는, ‘어떠한 생성의 구조를, 어떠한 힘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자크 데리다)이 중요하다. 자연과 문화---구조주의적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어떤 특별한 문화나 어떤 특정 규범에 종속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자발적인 것은 자연에 속한다. 반면에 사회를 규제하기에 결국 사회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규범들의 시스템에 종속되는 것은 문화에 속한다’고 규정한다.---모두와 관계되는, 요컨대 자연(또는 자연적인 것)을 언어화하는 미술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의 두 분야와 연관된다. 구조를 변화가 아닌, 자율적인 조직체임 만을 강조할 때 전체주의와 가까워진다. 그래서 형식의 자율성에 관심을 가졌던 예술 사조들은 형식이 발생했던 초창기를 지나면서 자유 보다는 구속에 기운다. 사회적 인정과 추인의 과정을 통해 확고해진 형식 내부에서 작가는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학습이란 대부분 확립된 구조들을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심리학이 말하듯이 주체에도 구조—-거울로 비유되는 상상계, 언어로 집약되는 상징계 등---는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존 구조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의 생성인 것이다. 기존 구조를 재생산 하는 직업이 아니라면, ‘기억보다는 창조적 망각’(니이체)이 필요하다. 구조라는 공시적인 개념에 통시성(시간성)을 부여해야 한다. 구조는 구조화가 되어야 한다. 기성에 확립되어 있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 이전의 또는 현실 이후의 보다 원초적, 또는 해체적 단계로의 소급이다. 기성의 현실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러한 흐름은 퇴행이나 미분화가 아니라, 미지의 현실을 꽃피우기 위한 풍부한 잠재성으로 평가될 것이다. 구조, 체계, 재현... 등과 같은 친관료주의적이고 친제도적인 용어는 오늘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을 생각할 때, 예비 작가들의 발생적, 생성적 흐름은 일단 바람직하게 다가온다. 표피적 현실의 반영, 애매에서 시작하여 모호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주관적 현실의 표현은 주체/객체의 이원론에 의거한 지난 시대의 미학으로, 전통적 의미의 동양화나 19세기적인 리얼리즘을 위시한 이런 저런 재현의 형식들을 특징짓는다.
재현이라 함은 단지 미술의 한 형식을 넘어서, 기성 세계 질서의 내면화 및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시대마다 명확한 틀이 확립되어 있다. 이러한 틀은 시작과 방법과 목적을 사전에 결정짓는다. 언어와 사회를 비롯한 기성의 상징적 우주 안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이러한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성의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 하는가, 얼마나 잘 벗어나는가, 그것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는가에 따라 예술-삶의 진면목이 결정된다. 물론 발생(생성, 사건)은 구조(재현, 주체)와의 역학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구조란 공간적인 개념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이들은 앞으로 닥칠 시간의 시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위기는 도전인 것이다. 생성과 발생, 또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 조형적 방법론은 작가를 시간의 편에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시간은 작업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을 변모시킨다. 예술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발생)을 언어(구조)로 표현하고자 한다.
작업에 임하는 이들이 늘 상 겪는 일처럼 무엇인가를 안다고 무엇을 느꼈다고 그것들이 곧장, 그것도 남김없이 언어화되지는 않는다. 어떤 지식이나 경력이 곧장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보다는 차라리 운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 내용과 형식의 간극 속에 창조 또는 생산의 고통이 있고 희열이 있다. 불확실성처럼 간극은 필수적이지만, 기적과도 같은 사건도 일어난다. 작업이란 기계적인 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크고 작은 기적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양적이라면 양질전환의 순간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자신만의 시간으로 가속도를 붙이는 몰입의 순간을 확보할 수 없다면 작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업은 희생이고 헌신이고 선택이다. 그것이 일반 노동과 다른 예술 작업의 특징이다. 안쪽에 있는 무난한 삶과 바깥쪽에 있는 가시밭길을 가르는 엄혹한 선택이 가로 놓여있는 이들에게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젊어서 사서하는 고생을 열심히 하다 보면, 불확실하기만 한 예술 역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1. 박소연

박소연,[비파나무](부분),2013년.
박소연은 식물과 그것이 성장하는 땅을 그린다. 유기체와 그것을 둘러싼 생태계는 개체/배경이라는 도식으로 구별되기 힘들다. 얼룩덜룩하게 표현된 땅은 균질적인 토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모여 있다. 서로의 차이를 제거하지 않은 채로 공존하는 땅의 모습은 건강한 땅을 표현하려는 의도와 맞아 떨어진다. 건강한 생태계는 다양한 종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잡초도 뽑혀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자연까지도 코드화 하면서 동종번식을 늘려나간다. 박소연의 작품에서 땅은 대지의 표피가 아니라 그 내부까지도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땅의 재현이 아니라 보다 깊은 현실계(실재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회화는 여러 재생산 매체의 코드화로부터 탈코드화 되어, 이러한 현실계와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 이질적인 땅, 즉 비옥한 땅에 심어 있는 것도 특이한 식물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키우는 비파나무와 황칠나무라고 한다.
작품제목도 식물 종의 이름과 같다. 땅에 물활론적인 활기가 있듯이, 거기에 뿌리내린 식물 역시 단순한 식물성으로 코드화 되지 않는다. 가령 작품 속 황칠나무의 삼지창 같은 잎의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식물의 방어 기제를 보여준다. 박소연의 그림은 환상이 아닌 현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이질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독특한 대지와 식물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렸던 것이, 공사장 비계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집이라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임시구조물인 비계를 나뭇가지로 표현하다가 나무 시리즈로 옮아온 것은 구조에서 발생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비에 촉촉이 젖은 얼룩덜룩한 대지는 부글거리는 발생의 장이며, 그 안의 식물은 붓의 흐름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새싹들을 그린 작품은 원근법을 비롯한 어떤 경계도 소멸되어 있다. 변화에 대해 가장 가능성 있는 단계인 새싹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맹렬한 발생과 성장의 단계에 돌입한다.
2. 김진아

김진아, [채우다], 장지에 연필, 2012년.
김진아의 작품은 그리기의 출발로 환원된다. 그녀의 주요 매체는 전형적인 동양화에 쓰이는 한지와 붓이 아니라, 판화지와 연필이다. 종이와 연필은 필기의 습관 때문에 어느 장르를 초월하여 친숙하며, 그 친숙도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붓은 범접하지 못할 기술을 요할 것 같은데, 연필은 다소간 만만하게 다가온다. 붓에 내재될 억압성 대신에 연필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능숙한 기법보다는 대상 또는 주체 자체에 내재된 에너지를 직접 전사하려는 것이다. 오랜 숙련을 요구하는 동양화의 전형적인 매체를 배제하고, 종이 위에 연필이라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매체를 선택했을 때, 보다 미시적인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작업실에는 판화지 4개를 붙여 그린 파노라마식의 풍경화가 있었는데, 여행 가서 본 풍경이라고 한다. 산의 주요 실루엣을 이루는 큰 나무를 지우고 그 아래 가려진 작은 나무를 살려서 그렸다.
맨 처음에는 한 장에서 시작했다가 리좀처럼 옆으로 옆으로 늘려나갔으며, 지금 있는 4장도 완성된 상태라고 확언할 수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큰 그림이 아니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과정의 소산이다. 김진아는 숲보다는 나무를 본다. 나무를 풀처럼 그린다. 거시 생태계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 시야를 확보해야하는 시각성 대신에 촉각성이 두드러진다. 판화지의 울퉁불퉁한 표면 위의 연필의 질감은 시각적이기 보다는 촉각적이다. 작품은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하기보다는, 차이와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의 외화가 아닌 자연적 과정 그 자체에 방점을 찍은 작품과 이러한 영원회귀의 과정에 상응한다. 또 다른 작업은 일상 영역과 관련된 것인데, 온통 자기와 그 소유물로 채우려는 그 사적인 영역들은 채울수록 공허하다고 느껴진다. 새가 나뭇가지를 물고와 짓는 둥지처럼 거의 맹목적으로 구조화되는 영역들은 욕망과 권력의 장이기도 하다.
3. 김진

김진,[나무], 2013년
자연보다는 자연적 과정을 살리려는 김진의 작업은 회화보다는 드로잉에 기반 해 있다. 드로잉이지만 종이가 아닌 캔버스를 사용하고, 캔버스를 바탕 면으로 하지만 붓 보다는 연필을 사용한다. 스밈과 번짐에 기반 하는 동양화의 재료보다 위로 쌓이는 캔버스가 보다 직접적인 소통을 원하는 김진에게 더 다가왔다. 기존의 방식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선택했다. 그냥 드로잉도 있지만, 컴퓨터 프린트 작품도 있다. 거칠 것 없이 그려진 드로잉을 포토샵으로 재편집하여 프린트 한 작업은 작은 것이 기계적으로 확대됨으로서 생겨난 무의식적 힘들이 두드러진다. 가령 필적 감정사들은 이러한 확대의 메커니즘을 개인의 흔적으로 간주하며 진/위의 감별에 활용하곤 한다. 무의식적 행위는 위장될 수 없을 만큼 더 근본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는 매개를 사용하지만 태블랫 PC에 직접 드로잉한 것과 다른 점은 연필 색과 행위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태블릿에 그린 선들은 그저 점과 선이 조합된 어떤 형태일 뿐이지 재료와 신체의 기운이 드러나지 않는다. 원초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드로잉이라는 방식과 이러한 기계적 장치는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이러한 역설적 조합은 ‘드로잉 자체가 내 작업이고 싶다’는 의도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의 한 단면을 기계를 통해 확대함으로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방식이다. 김진의 작품은 사생 드로잉을 기반으로 시작된다. 자연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을 보기 위해서이다. 주변의 나뭇가지와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리는데, 가장 생경할 때 손을 놓는다. 더 그리겠다는 욕심은 그림의 생명을 죽이는 수가 있다. 형태에 집착하면 그리기와 멀어진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사생이지만 재현은 아니다. 정확한 대상보다는 그릴 때의 순간적 느낌을 중시한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뭘 그리지 않아도 그리게 된다. 자연에서 시작되었지만 끝은 자연이 아니다. 그럼으로 인해 오히려 자연이 된다.
4. 김혜리

김혜리, [산수풀이3] 불,양초, 2013년.
김혜리는 양초를 사용하여 중심에 장승의 이미지를 암시하는 형태를 세우고, 그 둘레에 작은 인간 형상들을 배치한다. 서양의 원근법적인 무대 공간이 아니라, 마당극처럼 중심과 둥근 주변을 형성하는 형상들에는 인간의 몸짓과 표정이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재현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것, 평행선상에 있는 실체이자 허상이다. 장승 주변의 형상들은 인간으로 가정되었지만, 인간 형태로 캐스팅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그림자와 하나가 된 채 춤을 듯 가변적 실루엣을 가졌다. 호일을 구겨서 그 안에 초를 부어서 떠낸 독특한 형상들은 산에 올라가서 춤을 추는 이백이 바위와 하나가 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에서 온 것이다. 설치 형식을 띈 극적 연출에는 서민들이 희노애락과 염원이 녹아있다. 장승은 계속 초를 녹여서 중첩시켜 형성된다. 그것은 장승의 원재료가 나뭇결이라는 시간의 구조가 축적된 것이듯, 시간을 공간화 할 수 있는 매체인 초를 활용한 것이다.
열을 가하면 액체였다가 순간적으로 굳는 초는 구겨진 면으로 이루어진 입체라는 차원의 변주와 결합하여 고체이면서도 유동적 느낌을 준다. 초는 고요하지만 따뜻한 에너지를 담지하며, 그 향은 공간을 어떤 기억으로 가득 채운다. 초의 물리적 성질을 최대한 활용하여 3차원 상에 구현한 드로잉이 캔버스라는 2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때, 녹아내린 초는 추상적 이미지를 만든다. 김혜리의 작품에서 자연은 공기, 바람, 물, 불처럼 정확한 형태가 없는 무정형이다. 우연적 순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 양초는 이러한 자연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자연의 형태가 아닌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려는 방식은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빈 캔버스 뒤에선 선풍기를 가동시켜 펄럭이는 표면을 통해 바람자체를 보게 한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김혜리는 매체를 단순히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힘을 최대한 펼치려한다. 가령 먹은 단지 동양화의 재료를 넘어서, 물의 유동적 속성을 극대화하는 변화무쌍한 매체로 간주된다.
출전; 성신여대 동양화과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