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서사

 

이선영(미술평론가)

     

1. 공공 문화예술의 몸통으로서의 서사

     

공공과 문화 또는 예술이 만나는 현장에서 당면하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서사이다. 서사는 공동체와의 만남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공공 문화예술의 몸통에 해당한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거나 대화를 해야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현장에 있는, 또는 현장에 도착한 이들은 공동체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듣고 대화하며 상상한 후 벽화나 영상, 연극이나 문학, 음악이나 소리, 구술 채록 등으로 남기게 된다. 서로 간에 말문을 트는 것은 상호신뢰의 결과이며, 그 역도 성립된다. 상호간에 신뢰와 대화가 성립되면, 작업의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사업 기간이 거의 끝날 때까지 서로의 주변만 빙빙 돌다가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그 과정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정작 결과물의 완성도가 미진한 경우도 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위로만 할 수도 없다. 과정이든 결과든 좀더 많은 사람과 어떻게 만날것인가의 문제는 공공성을 전면에 내세운 문화예술에서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공 문화예술은 특정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일반적인 전람회처럼 사건이 일어난 지점에 다수의 관객을 불러 모으기 힘들다. 

 

공동체와 진하게 소통했던 과정의 산물은 그 현장을 넘어서도 의미 있는 예술 작품이나 사례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며, 이 가능성은 현실화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보다는 그 현장에서 공유했던 문화적, 미적 경험을 두고두고 남기는 방식이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주민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 떠났어도 그곳에는 남아있는 무엇이 있다. 어떤 물적, 심적 잔여물이 오랫동안 작동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공공 문화예술의 진정한 지속가능성이 아닐까. 공공예술에 있어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물리적, 인간적 관계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이후의 과정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다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공공의 기금을 쓰는 문화예술 활동이 몇몇 참여자들의 ‘체험학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을 결과로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문화는 예술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무에서 유까지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만큼,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예술로의 고양, 예술의 문화적 확산이라는 이 두과정이 밀접하게 연동되는 장이 바로 공공 문화예술의 현장이기도 하다. 

 

개인주의가 극단화된 현대사회에서 타자에게 먼저 말을 걸고, 의미 있는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난점이 있다. 공공 영역이 아닌 부문은 이러한 어려움 대신에 다른 길을 선택한다.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수예술의 경우, 작품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음울한 독백으로 채워지며 소통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예술의 자율성이 성립된 이후에 계속 그랬다. 근대로부터 시작된 순수예술의 내용은 타자와 소통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언설로 가득하다. 그러나 서로 간에 소외를 확인함으로서 공감을 얻는 식의 소통은 반쪽의 승리에 불과하다. 공공 문화예술은 그러한 불행한 소통을 극복하려는 장이기도 하다. 공공 영역에서의 소통은 단지 그들과 함께 함, 또는 함께 했음에 대한 증거와 추억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공공 영역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예술만큼이나 도전이고 실험이다. 공공 문화예술에서 서사가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서사의 밀접한 관련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공동체는 서사 공동체였다. 하나의 공동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신화와 전설을 공유한다. 능숙한 이야기꾼은 공동체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의 원형이었다. 

     

2. 이론; 구술성과 문자성

     

문자시대가 개막되기 이전, 구술의 시대에 문화와 역사가 전승되는 유력한 수단은 말하기였다. 소통의 역사는 문자성(literacy)이 약화된 전자 매체의 시대는 원시적인 구술성(orality)을 복귀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알려준다. 문자시대를 넘어선 현대에  회화나 책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해진다. 구술성과 문자성의 역사적, 논리적 관계는 공동체로부터 들은 것을 쓰는 작업의 참조점이 되어 줄 수 있다. 소재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것은 듣기에 해당되며, 그것에 강도와 밀도를 부여하여 좀 더 유의미한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쓰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월터 J 옹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매체계의 변화를 구술성과 문자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이번 장은 그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공동체와 서사의 이론적 관계를 생각해 본다. 월터 옹에 의하면, 글자를 쓰지 않았던 원시적, 또는 야생적 구술문화에서 언어란 일반적으로 행동양식이지 사고를 표현하는 단순한 기호는 아니다. 음성언어는 힘과 행위로서, 목소리로 된 말은 사람들을 굳게 결속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긴 연쇄, 이를테면 계보와 같은 것은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누적적이며 첨가적이고 집합적이다. 

 

구술문화는 정형구적, 상투구적 사고의 조합에 의존하여, 누구나가 힘 안들이고 생각해내기 쉽게 패턴화 된다. 구술문화의 특유한 기억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기억의 대상이 무거운 인물, 즉 기념비적이고도 잊기 어려운 인물,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공공성을 띄고 있을 때이다. 원시적 구술문화는 문자문화에 비하면 한층 더 공유적이고 외면적이다. 구술문화에서 배운다는 것은 알려지는 대상과 밀접하고도 감정이입적이며,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쓰기는 알려지는 대상과 아는 주체를 분리함으로서, 객관성의 조건을 세운다. 구술성은 주로 그 의미를 컨텍스트에 힘입고 있고, 쓰기는 언어 자체 안에 의미를 함축한다. 쓰기는 시각적이다. 시각의 전형적인 이상은 명확성과 명료성, 즉 나누어 보는 일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명확성과 명료성은 인간 감각 중 시각을 강조한 것이다. 질서라는 개념은 상당부분 시각에 감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정확하게 반복될 수 있는 시각 정보와 이를 정확한 언어로 기술하는 감각은 과학뿐 아니라 근대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반해서 청각의 이상은 하모니, 즉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듯 시각은 사물을 토막 내어 감지한다. 그러나 들을 때는 동시에 그리고 순간에 모든 방향으로 소리가 모여온다. 쓰기는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 즉 시각으로 이동시킴으로서 말하기와 사고를 함께 변화시킨다.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이란 쓰는 기술에 의해서 직 간접적으로 사고 과정을 형성시킨 인간을 말한다. 소위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언어라든가 자율적인 담론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쓰기에 의해 확립된다. 쓰는 사람은 실재하는 컨텍스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명료하게 되도록 말을 작용시키기 때문에, 쓰여진 말은 분석적이다. 인쇄는 지식을 정신밖에 저장함으로서, 과거를 재현시키는 사람들이었던 박식한 노인들의 가치는 떨어지고 그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젊은이들의 가치가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창조성, 새로움, 진보 등의 가치는 문자문화의 결과임이 확인된다. 

 

인쇄로 가시화된 문자 문화는 독자성과 창조성이라는 낭만적인 개념을 낳았다. 쓰기와 인쇄의 결과는 자아의 근대적 개인화와 예민한 자기의식을 고양한다. 쓰기에서는 낡은 의미의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근대예술의 주인공들은 그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가만큼이나 주변인들이다. 신화적 영웅 대신에 근대적 자아의 내면세계가 자율화된 예술적 공간에서 가득 펼쳐지는 것이다. 닫혀 진 체계라고 하는 착각은 쓰기에 의해서, 그리고 더 한층 인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봉인된 순수예술을 구하는 낭만주의적 탐구는 쓰기에 의해서 생겨난 자율적 담론이라는 감각, 그리고 인쇄에 의해서 생겨난 폐쇄적 감각에서 파생되었다. 인쇄는 텍스트 속에 발견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어지고, 어떤 완성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감각을 부추킨다. 월터 옹은 쓰거나 인쇄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화의 구술성에 비해, 오늘날 고도화된 기술 문화에 바탕 하는 구술성은 2차적 구술성의 문화, 즉 문자에 입각한 구술성(literate orality)의 문화라고 말한다. 

     

3. 타자와의 대화를 담아내기

 


     

현대의 2차적 구술성의 문화는 문자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문자문화는 완결된 자족체로서의 예술작품을 낳은 원동력이다. 그것은 공중으로 휘발하기 십상인 대화와 경험에 형식을 부여하여 현장을 넘어서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잘 담아내야 '퍼 나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담는 방식에 있어서 예술적 자의식(형식)이 발동된 경우 문자성에 충실하지만, 자족적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현대에 맞는 소통방식을 고민하는 이들은 2차적 구술성을 염두에 둔다. 즉 구술성은 예술적 자의식을 거친 후, 다시금 작가의 육화된 언어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의 원초적 형태인 구술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근대에 정점을 찍은 시각중심주의의 물신적 시선과 관념, 그리고 형식주의를 해체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몸을 복귀시킨다는 점에서 근대의 대안이 된다. 

 

공공 문화예술은 단순히 대중을 향한 캠페인을 넘어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분야이기도 한 것이다. 각 매체의 자기동일성을 향한 진보에 의해 시각예술에 있어 서사는 억압되었지만, 말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서사성은 목적의식적으로 복귀되었다. 근대에 수면아래 있던 것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표면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서사가 복귀되었다고 해서 멀리는 신화시대, 가까이에는 19세기 리얼리즘 시대처럼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서사는 유적지의 수수께끼 같은 기표들(알레고리)로 드문드문 나타나 채워짐과 해석을 요구한다. 원형이나 전형에 기준을 두는 이들은 현대의 서사가 파편화, 물화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파편화는 현대예술의 결과가 아니라, 조건이다. 현실 자체가 파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실(현상)과의 행복한 화해의 가상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현대예술가들에게 재현의 출발과 종점은 없다. 총체성과 파편화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도 엮이면서 근대미학의 주요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순수예술 뿐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을 고려하는 공공적, 또는 상업적 시도에도 서사성은 중요하다. 월터 옹이 이론화한 2차적 구술성의 문화는 대중문화의 영웅이나 스타, 그리고 록 콘써트나 클럽 같은 연행지향적인 하위문화에서 발견된다. 전자오락만 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체험하게 하는 문화프로그램이 생겨서 세대 간의 행복한 소통을 실험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와해된 현대에도 서사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흥행에 성공하는 예술이나 문화에는 반드시 잘 짜여 진 서사가 깔려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베스트셀러나 영화, 게임 등에서 발견한다. 잘 만들어진 서사는 이른바 '1 source multi use'의 방식으로, 여러 분야로 파생되면서 고부가가치의 문화상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서사는 집단 그리고 주체의 정체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 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와해와 언어의 파편화 때문에 점차 어려워진다. 코드화된 정보를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점차 말하고 쓰기 힘들어한다. 제대로 말하고 듣는 일만 가능해도 현대의 정신적 질병은 치유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다의 카타르시스적 기능을 잘 알고 있다. 말하기, 또는 상대의 말을 들어주기는 정신분석학적 치유 뿐 아니라, 공공 문화예술 부문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한 간접적 대면을 넘어서, 몸과 몸, 얼굴과 얼굴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실제의 대화는 점점 희귀해진다. 정보사회에 편재하는 미디어는 타자와의 만남을 원활하게 하기 보다는 또다른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보를 가장한 잡음, 소통을 대신하는 유통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것이 공공 문화예술의 주요한 과제이다. 세계 시장화가 추동하는 지배적 언어로의 통합은 모국어의 위기도 낳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소수민족의 종말과 함께 그 언어도 사라진다. 언어도 생태학적 위기를 함께 겪는다. 국제주의의 환상 속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 역시 낯선 언어로 제갈을 물린 채 말한다. 말하기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과 우회, 투쟁의 문제가 되었다. 

 

개인주의에 기반한 사적 영역을 넘어서 공공 영역에 방점을 찍는 예술문화의 흐름은 힘 있는 서사의 회복에 집중한다. 그러나 서사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발굴을 기다리는 어떤 순수한 본질이 아니다. 어디에서도 순수한 기원은 찾을 수 없다. 또 그것으로의 복귀가 가능한 것도 바람직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해체주의 같은 현대철학이 말하는 대로, 부재하는 기원과 중심 대신에 ‘대리 보충’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서사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것이며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만든다 함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작품의 내용을 이룬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자료조사와 듣기, 대화하기는 필수이다. 여기에 중간 중간 비어있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한다. 빈 부분들이 많으면 이해가 힘들지만, 이 틈과 간극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이때 이야기는 단순히 전래된 원형이 아니라, 틈과 간극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비가 아닌 생산으로의 고양이다. 

 

듣기 뿐 아니라 말하기가, 읽기 뿐 아니라 쓰기가 가능해야 한다. 상호적인 덧붙임의 연속은 그 방향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가지치기로서의 서사의 힘을 가능하게 한다. 예정된 경로를 거쳐 뻔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무한히 열린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의 공공 예술 문화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서사들은 주민의 이야기를 단순히 중계 방송하는 식이거나, 선택과 집중 없이 자료 형태로 늘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한때 미술에서 유행했던 ‘아카이브’ 형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이 되어야 아카이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정보조차도 될 수 없다. 무조건 다 쏟아놓기 보다는 그 다음을 가능하게 하는 적절한 한계설정이 중요하다. 적절한 한계라 함은 제한이 아닌 열린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어떤 경계는 그 다음의 진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혼돈은 불활성의 덩어리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접혀있는 잠재적 상태로 머문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넘어서는 것, 즉 소재주의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경우,  타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청취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폭력적으로 덧씌우는 식의 부정적인 예도 발견된다. 애써 타자와 만나 이야기 하면서도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나르시시즘은 극복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현실(자연, 대상)이 예술(언어, 주체)보다 더 진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더 나아가 ‘그들’이 ‘작가’의 독백을 위한 배경에 머무는 최악의 경우도 있다. 상대를 도구화하는 이러한 경향에는 이질적 타자를 동일자의 단조로운 목소리로 더빙하는 듯한 답답함이 발견된다. 비슷한 서사들의 나열이 자아내는 지루함 역시 난해한 형식이나 메시지만큼이나 소통에 장애가 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메시지가 폭주하는 시대에 소통을 촉발하고 유지하며 확장하는 유혹 및 추진 장치를 어떻게 만드는가하는 ‘예술적’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소통은 창안이고 실험이지, 저기에 있는 것을 여기에 옮겨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서사의 문제는 소통이 질적인 도약이지, 양적인 축적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출전; 지역공동체문화만들기 포럼(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