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방 안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1. 고충환의 평문; ‘김진의 회화-창문을 통해 본 경계인 의식, 이방인 의식’에 대해
2010년에 발표된 평문 중에서 메타비평의 대상을 고르라는 기자의 주문에 대해 큰 고민은 없었다. 메타 비평의 대상이 될 만큼 나보다 연배가 있으면서, 아직도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는 몇 안 되기 때문이다. 20대에는 모두가 다 작가였다가 30, 40, 50대가 되어감에 따라 차츰 갈 길이 달라지듯이, 비평 또한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여기에다 공유된 관심사가 있어야 하므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나도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는 작가 김진(金璡)에 대한 평문을 대상으로 했다. 그 글의 필자인 고충환은 내가 알기로는 작가와 가장 많이 만나는 평론가로서 신뢰감을 준다. 2010년에 발표된 고충환의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 개인전 서문을 선택한 것은 작가와의 충분한 토론을 거칠 수 있고 지면의 제한이나 기한에 쫒기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1페이지만 넘어가도 길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논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평문의 분량은 최소한 2-3페이지는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기회가 서문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얼마만큼이나 관철될 수 있는가. 서문이라는 형식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종의 매체로서 건재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요즘은 여러 공공 지원제도가 얽혀 있어서 개인전 서문 원고료의 출처가 작가라는 공식도 깨졌다. 작품을 팔 수 있다고 해서 화가가 돈을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듯이, 비평도 마찬가지이다. 지면의 부족, 쫒기는 마감 기간, 빈약한 원고료 등등은 비평의 주 무대를 미술잡지 뿐 아니라, 고화질의 충분한 양의 도판과 더불어 작가노트나 서문이 실린 인터넷 등으로 확장시켰다. 김진의 작품이 가지는 자화상이라는 속성은 자기 스스로를 언급해야 하는 이 메타비평의 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듯싶다.

김진, N_either1009, 227.3x363.6cm, oil om linen, 2010년.
김진 전(2010.6.10.--7.3,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의 서두는 ‘김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불현듯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렸다’로 시작된다. 이 평문의 전반적인 어조가 그렇듯이 작품 및 작가와 평론가의 대화가 느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다. 대화는 어떤 의미교환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화상이 숨어있는 실내를 드라마틱하게 하는 요소가 빛이라는 사실, 그것의 원천은 자연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있다는 사실을 반 고흐라는 미술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술가의 예를 들면서 시작한다. 이 시작이 이후의 긴 내용을 이해하게 하는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시작이 반인 것이다. 작품이나 작가 심지어는 자신이 개진하고 있는 내용과도 거리가 있는 생뚱맞은 인용문으로부터 시작하는 ‘척하는’ 평문에 비한다면 훌륭하다. 작품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객관적인 소통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을수록 공감도도 높아진다. 반 고흐와의 비유는 빛의 처리 방식 뿐 아니라, 짧게 끊어지는 붓질로도 이어진다.
대형 화면을 단순한 재현의 무대가 아니라, 작가의 행위가 벌어지는 장(場)으로 삼는 김진의 작품 스타일에서 붓질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게 한다. 반 고흐에게도 열정적인 액션은 표현과 재현의 경계 위에서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문단들은 그러한 작품이 나오게 된 동기들을 상세하게 전하는데 할애된다.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낯선 장소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은 소외감을 낳았고, 그것이 자기가 진정 속할 수 없는 방 속에 다른 잡동사니 사물과 구분되지 않는 존재감을 가지고 우두커니 있는 인물이라는 도상을 낳았기 때문이다. 관객, 또는 독자로서는 유령처럼 생긴 김진의 독특한 도상이 나오게 된 궁금증이 풀린다. 친절한 설명이다. 다소간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수동적인 태도일 수 있지만, 누구나 이 작가를 알고 있고, 또 누구나 이 작품을 이미 본적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서술이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두들 힘들게 작품 또는 글을 발표하지만, 얼마나 실제적인 소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늘 회의적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미 이 전시를 다 본(볼) 것으로 가정하고 평문을 써서는 안 된다.
나도 작가에게서 그 사연을 직접 들은 적이 있기에, 이 부분은 작가의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지만, 작품 이해에 필수적인 정보를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평문이 많기에 당연한 서술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미덕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설명조의 내용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할 때 평문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미술계에서 여러 출처를 가진 텍스트들을 보면 작가 노트로 명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을 그대로 중계 방송하는 듯한 글이 발견된다. 단순한 보도 자료라면 모를까, 요즘은 작가들도 말을 잘하기 때문에 그러한 텍스트는 변별력이 없다. 더구나 요즘은 너도나도 ‘작가노트’라는 형식으로 평문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초보적인 글은 쓸모가 없다.
고충환의 글에서 그다음 주목되는 것은 창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은 김진의 그림에는 창이 늘 등장한다는 점 뿐 아니라, 창이 가지는 상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그림은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보여 진 풍경이면서도 내면풍경이기도 한 김진의 작품에서 창은 ‘공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이편과 저편으로, 안쪽과 바깥쪽으로, 중심과 변방으로 나눈다’ 고충환은 이 시선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속한 환경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방인의 의식을 읽는다.

김진, N_either1011, oil on linen 130.3x97cm, 2010년.
창이라는, 그림에서는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구조적 장치의 독특한 배열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읽는다. 작품의 형식에서 내용을, 내용에서 형식을 읽을 수 있는 평론가의 분석적 시점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고충환은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림의 형태와 색채가 결정되는 방식을 중성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설명한다. ‘.....작가는 밑그림을 따로 그리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린다. 어두운 색에서 시작해 점차 밝은 색 순으로 진행하는데, 매번 전면적으로 그린다. 이를테면 무슨 스케치하듯 청색 하나만 가지고 전체 화면을 그리고, 그 화면이 마르면 재차 노란색만으로 전체 화면을 덧그리는 식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에서는 색과 색이 서로 섞이는 소위 간색(間色)을 찾아볼 수가 없고, 색 위에 색이 쌓이는 일종의 중첩된 레이어가 형성되는 것이다. 분방한 필선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유독 색감이 선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이렇게 하이라이트가 강조된 그림에서는 덜 그런 그림들에 비해 마치 빛의 편린들이 공간에 부유하는 것 같은, 빛의 순수한 유희가 감지되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특히 색채 처리에 대한 설명은 실기를 전공하지 않은 이들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섬세하게 지적한다. 묘사는 단순히 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설명이 된다. 그의 글은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관객 또는 독자가 인지해야 할 사항 또한 지적한다. 이 평문의 장점은 작가와의 유대로부터 비롯된다. 2010년에 씌여진 평문인데, 김진의 2003년부터 그때까지 진행된 전시주제들이 모두 언급--[A bit of space](2003년) [Margins](2008년), [N_either](2009-2010년)--되어 있으며, 그 상호 관계도 서술한다. 현재 보이는 작품의 공시적 분석 뿐 아니라, 작가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대 내지 공감의 수사학에서 비판적이어야 할 비평의 의무가 간과되기도 한다. 이 점은 비평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작가 또는 독자라면 자신의 작품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텍스트에서 건질 것은 건져 가리라고 본다. 명확한 분석에는 자체 내에 비판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평가, 또는 필자의 선명성만 돋보이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네거티브 전략 보다는 더 생산적인 전략이다.
2. 메타적이지 못한 평론가의 장황한 변명
퍼블릭 아트에서 메타비평에 대한 특집 건으로 연락이 왔을 때 비평도 힘든데, 메타 비평이라니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작가가 작품만으로, 평론가가 평론만으로도 자신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 미술문화는 언제부터인지 스스로에 대해 끝없이 말하기가 고무되고 있다. 말과 글의 압박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생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인간적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자기반성의 과정일까. 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우리 미술 문화는 작가든 평론가든 기획자든 하는 일이 거의 비슷하다. 배우고 있거나 가르치고 있거나, 대개는 양자를 겸비한다. 말과 글은 이들의 주된 미디어인 것이다. 비평이든 작업이든,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중요함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계의 구성원 상당수가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남으로서 가능한 시너지 효과보다는 동일한 구조에서 발생된 비슷한 개체들이 경쟁심 또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같이 지쳐가는 구조라고나 할까.
서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자기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칸막이 방 안에서, 알고 보면 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동어반복의 문화에서 결정적으로 간과되는 것은, 자기가 보는 자기와 타자가 보는 자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동일자와 타자 간 시선의 간격은 다양성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자기 목소리만 되 울려 퍼지는 방안의 수인들에게 차이가 확인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 비극이다. 자기노출증을 고무하는 나르시시즘의 문화가 솔직함과도 거리가 있음은, 모두가 첨단 단말기를 소지한 소통지상주의 사회에서 여실히 확인되고 있다. 미술계에서 글을 쓴지는 벌써 20여년이 되었지만, 내가 ‘메타-’의 입장에 놓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자신이 관념적이거나 초월적인 사람이 못되는 것은 둘째 치고, ‘메타-’란 안정적인 아카데미에 종사하면서,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번쯤은 비평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어야 하는데, 현실 직시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자기반성 행위를 나의 무의식으로 계속 끌어 내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무계획성, 아무 생각 없음이 그나마 여태까지 평론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한 동인은 아니었을까. 미술에 대한 나의 초창기 로망과 달리, 씁쓸한 현실적 경험에서 비롯된 미술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소간 무심한 편이다. 그나마 다행은, 생각은 냉소적이어도 실천은 다소간 열정적인 나는 썰렁한 환경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결코 합리적이라 할 수 없는 이러한 성향은 생각만 많고 실행력이 없는 이보다는 다소간의 경쟁력이 있었다고 자평한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지만 타인의 작품을 대상으로 나의 색을 칠하고 변형시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최대한 투명해지고 싶으며, 단지 비평을 통해 어떤 작품이나 현상이 보다 분명해지기만을 원한다.
그것이 내가 작품을 전유하는 방식이다. 무색무취의 전략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이러한 자세는 소박할 수도 있지만, 과대망상일수도 있다. 뒤로 빠지는 일도 상당한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리 세워놓은 관념을 관철시키는 것이 비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재현주의적 전략은 현대미술에서만큼이나 비평에서도 무익하다. 어떤 사상을 재현하거나 필자 자신을 표현하거나 하는 식의 담론은 정작 비평의 출발이 되는 작품이나 작가를 도구화시키고 만다. 몇 페이지를 읽어보아도,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을 왜 논의하는지가 불분명한 글들이 적지 않다. 나로서는 구체적인 작품 분석이 중심에 놓이지 않은 비평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것은 이제 소수자가 되어버린 평론가들만의 탓이 아니다. 필자의 경계는 무너졌다. 어느 미술잡지를 펼쳐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확연하다.
3. 자아비판, 자기검열, 자기노출....동일증식 중인 자기 참조적 담론
이러한 경계소멸은 비평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확대 재생산했다. 열린 문 사이로 기성의 비평이 할 수 없었던 대안적 텍스트가 나오기도 했지만, 기성의 비평이 가졌던 한계 또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글쓰기라는 가장 초보적인 정의를 비평에 내려 본다면, 미술도 글쓰기도 결코 확정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비평은 작품에 단순히 뒤이어 오는 따름 정리, 또는 꼬리 표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말과 글과도 다른, 일종의 작품이다. 비평이 출발하는 작품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출발하는 현실이 불확실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자기의 출발이 확실했다면 그것처럼 김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확실한 출발은 확실한 종착지를 지향하곤 한다. 그러나 작품이나 비평은 확실한 현상에 대한 확인이 아니다. 그 끝이 어찌될지 모르는, 과정 중에서 여러 요소로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일반 노동과는 다른 작품과 비평의 진면목이다.
여러 변수가 결합된 미술에 대한 글쓰기에는 무의미에 가까운 무한대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쓸 수 있는 자유에는,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문턱이 존재한다. 요즘은 통섭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다른 분야의 필자들의 글을 미술잡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결국 미술이 하나의 형식이라는 것, 그것이 쌓아온 자율적인 역사와 언어를 모르면 추상적인 논의로 끝나고 만다. 결국 비평은 미술계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비평의 부재니 비평의 죽음이니 하는 말들이 잊을만하면 나오지만, 정작 비평만을 업으로 삼는 이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체가 있는 정당한 비판이기 보다는, 미술계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화풀이처럼 보인다. 비평(가)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화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일을 병행하면서 미술에 대한 글을 쓰던 간에 그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면, 비평가들이 격어야 하는 질곡을 마찬가지로 격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이든 잡지든 공공기관이든 미술대학이든 그 어디도 미술비평을 소위 말해서 ‘키워주지’는 않는다. 이 모든 어려움을 고려한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비평의 수준이 높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비평도 성숙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장이 취약하다 보니 학교에만 오래 머물거나 허드렛일만 하다가 지쳐간다. 더욱 촘촘해진 미술계의 제도화가 많은 젊은이들을 학생, 또는 인턴의 배움이라는 명목 하에 조직적으로 착취한다. 그들이 배우고 배움을 실현할 현장이라는 것이 부실하기 그지없다. 거의 중년이 다 되어 뭔가 제대로 할까싶지만, 그때가 되면 나이에 대한 역차별이 기다리고 있다. 제대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그래서 끝없이 닥쳐오는 과도기는 위기의식을 낳고 이러한 위기의식은 젊음을 절로 유지시켜준다. 메타비평이 가능하려면 공유된 사안을 통해 서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미술계에서는 차이의 전제 조건인 공유가 힘들다.
작품이든 작가든 현상이든 담론의 차이가 형성될 만큼 무언가가 공유되거나 축적되지 않는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지엽적으로 존재하다가 지엽적으로 사라질 뿐이다. 논쟁을 할 만한 꺼리나 역량은 안 되는데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논쟁을 위한 논쟁을 낳고, 금방 그 무익함에 질리게 만든다. 간혹 가다 마주치는 첨예한 이해관계의 차이만이 그나마 논쟁의 열기를 유지해줄 따름이다. 그만큼 미술계의 조밀도가 낮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술계는 어떤 필연적 연관 고리 없는 느슨한 조직이다. 누가 새로 진입하든 누가 중도에 포기하든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그야 말로 자유로운 곳이다. 나도 그 틈에 생물학 전공하다가 미술비평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러한 개방적(?)인 구조에 불만은 없다. 결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는 오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작가가 누군가는 평론가가 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