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부드럽고 모호하고 깊은 존재의 색감과 질감


   보통 유리로 치자면 샌딩이나 블로잉 기법을 떠올리기 쉽다. 주로 샌딩은 평면적인 작업에 그리고 블로잉 기법은 입체적인 작업에 적용된다. 그리고 여기에 전통적인 조각의 전형적인 기법이랄 수 있는 캐스팅 기법이 가세하면서 유리조형의 표현영역이며 범주는 눈에 띠게 다원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현대유리조형은 주로 입체적인 조형물의 형태를 띠는 것이지만, 그 조형적 가능성은 아무래도 입체보다는 평면 쪽의 전통이 깊다. 전형적인 경우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그 예로 들 수가 있겠다. 유리에다가 색을 입혀 고열에 구워낸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감과 함께 빛을 투과하는 성질로 인해 마치 한 차례 색을 걸러낸 듯한, 그 속에 빛을 머금고 있는 색을 보는 듯한 감각적인 미감으로 인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 초기에 사람의 형상을 빌려 신을 형상화할 수 없었던 소위 우상논쟁의 와중에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신을 대리하고 신의 영광을 대신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발하는 장엄하고 환상적인 빛의 질감은 그대로 천상의 빛과 동일시되고 신의 광선에 등치되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장인들은 자신들이 그저 형식적이고 감각적인 조형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조형에 신앙을 불어넣는 일이며,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불어넣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인들은 동시에 아티스트가 될 수가 있었다. 현대유리조형 중 특히 평면적인 작업들은 다만 그 정도와 경향에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이런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에 힘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김현정의 작업 역시 기본적으론 이런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각색하고 자기화한 독창적 형식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평면의 유리 패널에 안료로 페인팅을 하거나 드로잉한 후 5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낸 김현정의 작업은 장르적 특수성으로 치자면 유리페인팅으로 범주화된다. 이때 온도는 결정적인데, 온도 여하에 따라서 색감이 달라지고 질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페인팅 혹은 드로잉 자체와 함께 온도의 수위를 조절해 자신이 원하는 색감과 질감을 찾아내는 일이며, 이로써 남다른 표현이 가능해지는 일이며, 그 자체 고도의 숙련과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다. 

   이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작업은 유리조형이면서도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고, 따라서 일종의 유리를 소재로 한 회화로 볼 수 있겠고, 그럼으로써 회화의 표현 가능성이며 범주를 확장하고 심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회화적 평면을 근간으로 하는 만큼 드로잉 친화적인 점도 특징이다. 실제로 작가는 유리작업과 드로잉을 병행하는데, 비록 재료도 다르고 색감도 다르고 질감도 다르지만 서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상호작용이 꽤나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저마다 독자적인 표현영역을 견지하면서도 상호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나 할까. 작가에게 드로잉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활일기와도 같은 것이고, 이처럼 드로잉으로 표현된 생활감정의 소회를 유리작업으로 옮겨놓는 식이다. 

   그리고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은 건축 친화적이다. 단독으로 디스플레이 될 때보다 건축의 일부며 붙박이로 디스플레이 될 때 작가의 작업은 빛을 발하는데, 바로 유리와 빛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유리의 투명한 성질이 빛을 투과하고, 그렇게 빛을 자기 속에 머금는 것에서 유리 소재 특유의 색감이며 질감이며 아우라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에 붙박이로 설치될 때는 물론이거니와 단독으로 설치될 때도 라이트박스를 도입하거나 조명을 조절하는 등의 빛을 감각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빛이 있어야 보이고, 빛의 양만큼 보이고, 빛이 변화무상한 만큼이나 변화무상한 그림이라고나 할까. 비록 그 자체는 고정된 그림이지만, 빛의 수위를 얼마만큼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빛을 어떻게 개입시키느냐에 따라서 가변적인 상황에 놓이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결국 유리조형 자체에 대한 감각과 함께 빛에 대한 감각도 요구되는 작업이며, 어쩌면 유리와 빛의 상호작용에 대한 감각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의 주제랄 수도 있을 것인데, 작가의 작업은 대략 사이와 틈, 시간여행과 생활일기의 언저리를 맴돈다. 먼저, 사이와 틈은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공간에 대한 관심은 조형적인 공간과 심리적인 공간감으로 표출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공간 아님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일종의 건축적인 청사진을 그리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렇게 그려진 형식실험의 다양한 지점 지점들이 예시되고 있다. 사이와 틈이란 주제의식이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이와 틈이란 주제는 일종의 경계인 의식에 의해 견인되는 경우로 봐도 무방하겠다. 사이란 그리고 틈이란 공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는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계의 인식은 유리의 소재적인 특질과도 부합한다. 특이한 것은 유리가 공간을 나누면서 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유리 소재의 양면성이며 양가성이다. 실제로는 공간을 분리하면서 시지각적으론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 막혀 있으면서 통하는 것이야말로 결정적이랄 순 없겠지만 바로 작가가 유리 소재에 매료되고 천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컨대 바닥에 유리패널을 설치한 작업을 보면, 바닥의 격자 패턴이 그 위에 포개진 유리패널(또 다른 격자 패턴)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바닥의 격자패턴을 조형의 적극적인 한 요소로서 끌어들이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격자패턴이 또 다른 격자패턴과 중첩되고 포개진다? 여기서 이렇게 포개진 격자패턴을 바로 삶의 레이어(경계)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을까. 삶은 다층적이고 다공적이다. 역사적 시공간이 포개져 있고 심리적 시공간이 중첩돼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중첩되고 포개진 시공간 중 하나의 레이어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님 그렇게 뭉뚱그려진 시공간 전체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격자패턴에 포개진 또 다른 격자패턴이, 막히면서 통하는 이면이, 행간이, 사이가, 틈이 이런 삶의 레이어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렇게 바닥 작업에서 중첩된 삶의 레이어를 보여주고 있다면, 또 다른 작업에선 옆으로 펼쳐진 삶의 레이어를 예시해준다. 저마다 독자적인 개체를 유지하면서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 회화를 연상시키는 벽면설치작업이 그렇다. 여기서 그림 그림들은 일상의 편린들을 예시해주고 삶의 순간순간들을 예증해주고 존재의 레이어를 증언해준다. 그렇게 작가는 일련의 유리조형작업에서 포개지고 펼쳐진 삶의 계기들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삶의 레이어라고 했고 존재의 레이어라고 했다. 삶은 하나의 레이어로부터 다른 레이어로 이행한다. 거듭나는 삶으로 볼 수 있겠고 승화로 볼 수도 있겠고 아님 변화를 향한 욕망으로 봐도 되겠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다른 일상의 편린들에 반응하는 경우로 봐도 무방하겠다. 여느 경우이든 여하튼 우리는 이행하고 있다. 이행? 바로 시간여행이다. 예컨대 작가의 작업 중 실제로 건축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자.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색깔이며 분위기가 시시각각 달라지고, 그렇게 매번 다르게 어필돼 온다. 설치된 그대로 건물에 붙박인 일종의 건축회화랄 수 있겠고, 일종의 빛이 그린 그림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비록 실제로 그림을 그린 것은 작가이지만, 정작 그림을 그림으로서 드러나 보이게 만드는 최종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요인이며 원인(실질적 계기)은 빛에 의한 것이다. 빛이 들어서 색깔이며 형상이 드러나 보이게 하고, 시간에 따라서 매번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것도 말하자면 그림을 가변성의 조건 위에 재정의 하게 하는 것도 빛이다. 하나의 작품이 동시에 여러 질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 해주는 것도 빛이다. 그래서 작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작가가 그린 그림이면서 동시에 빛이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 여기에 시간이 그려준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생활일기는 특히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와 관련된 것인데, 종이배, 집, 교회, 사람형상, 꽃이나 화분, 달과 같은, 그리고 책장이나 의자와 같은, 작가의 일상을 이루는 것들이며, 작가와 일상을 더불어 사는 것들이다. 비록 작가의 주변머리에서 취해진 것이지만,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쉽게 공감을 얻는 것들이다.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소재들이랄까. 그런가하면 작가의 작업에선 이런 알만한 형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자국들이며 얼룩들도 보이는데, 아마도 그날그날의 소회를 표상한 것일 터이고, 일종의 바이오리듬을 형상화한 것일 터이고, 내면이며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일 터이고, 때론 형상으로 옮기기엔 너무 벅찬 환희며 트라우마 같은 것일 터이다. 형상에 비해 그 자체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게 어필돼 오는 이 자국들이며 얼룩들 역시 쉽사리 공감을 자아낸다. 비록 작가의 무의식을 파고들 수는 없지만, 그 색감이며 질감이 친근함을 자아낸다고나 할까. 

   그 이면에는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생활세계며 생활철학에 대한 공감이, 일상성과 일상사회학에 대한 지지가 놓여있다. 때론 의식적으로 그리고 더러는 자동 기술적으로 그려진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이처럼 레이어(경계)와 레이어(경계) 사이를 이행하는 자기를 그리고 있었고 일상을 그리고 있었고 존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어로 포개지고 펼쳐진 시간을 그리고 있었고 공간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그 자체가 일종의 사이의 감수성이며 틈새의 감각을 표상하고 있는 듯한, 한지에 먹이 스며들고 번지는 것과 같은, 먹의 번짐 효과랄지 선염효과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모호하고 깊은 색감이며 질감을 그려내고 있었고, 그 색감이며 질감으로 직조된 존재의 아우라를 자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