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희, 선남선녀들의 초상을 경유한 나에게로의 여행
전작에서 홍순희는 만개한 꽃을 그렸었다. 장지에 분채로 그린 꽃은 꽃의 실재를 닮아있으면서도 작가 나름의 변형을 가해 그린 그림이었다. 꽃의 실재보다는 변형에 의한 분위기가 강조되는 그림이었다. 꽃들이 배경화면과의 경계를 지우면서 배경화면 속으로 침윤되듯 가라앉고 스며드는, 그래서 종래에는 배경화면과 일체를 이루면서 다만 흔적으로만 남는, 꽃의 실재보다는 꽃의 흔적이 남긴 향기가 여운처럼 아련하고 아득하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었다. 꽃을 그리되 꽃 자제의 감각적 실재보다는 그 무언가의 표상으로서의 꽃에 방점이 찍히는 그림이었다. 그 무언가의 표상? 그것은 꽃의 정신이었다. 엄밀하게는 꽃에 이입한 작가의 정신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꽃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릴 수가 있었다. 이형사신. 형태를 빌려 정신을 그린다는 말이고,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형태를 그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꽃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린 작가의 꽃 그림에는 이런 이형사신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알겠다. 한편으로 그 정신은 꽃을 그린 전작에 한정되기보다는 전작과 함께 인물을 그린 근작 모두를 아우르는(나아가 전작보다는 근작에서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와 닿는),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사실상의 인문학적 배경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작가는 꽃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린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꽤나 흥미로운 그림의 제목과도 부합한다. I save myself. 내가 내 스스로를 구하거나 구제한다는 뜻이다. 얼핏 꽃 그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형사신과 마찬가지로 전작과 근작 모두를 아우르는 사실상의 전제 내지 주제의식으로 봐도 될 이 의미를 위해선 우선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난 연후에라야 나를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예 나를 구제한다는 것은 나를 인식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동격으로 봐도 되겠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는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작가는 이런 오랜 존재론적 물음을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 그대로 불교의 진아에 연이어진다. 진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실체. 불교에 화두가 여럿 있지만, 이런 화두는 결국 진아로 귀결된다. 불교의 모든 화두는 사실상 이런 진아로 모아지는 다른 갈래들로 봐도 무방하겠다. 진아를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곧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지 인식한 연후에 나를 구제한다는 것은 곧 진아에 의해 내가 거듭난다는 뜻이다. 나를 구제하는 것이 곧 나를 인식하는 것과 동격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 밑바닥에는 이형사신의 정신과 함께 불교의 교리에 대한 공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인물을 그린다.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기법 그대로 비단에 수간채색으로 그린 그림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이, 작가의 표현으로 치자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세상을 깨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수환 추기경, 달라이 라마, 비폭력불복종운동으로 저항정신과 실천논리의 새 지평을 연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침팬지의 대모 제인 구달, 척추가 무너져 내리는 지병을 오히려 예술혼을 불태울 불쏘시개로 삼은 프리다 칼로, 피카소,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 제도권의 냉소에 세계적인 예술영화감독으로 답하는 김기덕, 김중만 사진작가, 엘리자베스 여왕, 그레이스 케리, 안젤리나 졸리, 조수미, 오프라 윈프리, 벤츠의 신화 빌 게이츠,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홍명보 축구감독, 넬슨 만델라, 유니세프의 명예대사 안성기와 김혜자, 이건희 삼성회장, 반기문 유엔총장 등등. 한번 보면 알만한 인물들이고 인사들이다. 투명한 살색에 터럭 하나하나를 다 그려야 하는, 감각적 닮은꼴 위로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정신이며 인격을 밀어 올려야 하는, 그렇게 꼴에다가 신을 합치해야 하는, 그런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기법이 오랜 시간 공들여 그려야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언제 이 많은 그림들을 다 그렸나 싶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초상화연작그림은 근작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다 할 계기며 변수가 없는 한 앞으로도 한동안 추가되고 재정의 될 그 목록에는 온갖 분야의 온갖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면면들이 모여 마치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버금갈 또 다른 한 버전을 예감케 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기법 그대로 동시대 사람들을 그렸다. 전통이라는 형식에다 당대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았다. 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구한다는 말이다. 이로써 이형사신과 불교의 종교심에 이어 법고창신의 정신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겠다. 여기에 문화번역과 문화충돌 개념을 더할 수가 있겠다. 무슨 말인가.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기법이 속한 시대적 감수성과 현대적인 시대적 감수성이 시공간을 초월해 공존하고 있고, 대륙 간 문화의 이질성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다. 저마다 피부색도 틀리고 언어도 틀리고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톤으로 조율된다. 초상화로 그려진 그림인 만큼 개별주체들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전통 초상화 제작기법 고유의 분위기 아래 하나로 아우러진다. 개별성 내지 특수성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이란 보다 큰 범주로 확장하고 싸안는다고나 할까. 그 이면엔 차이를 넘어선 보편인간 내지 인류애에 대한, 사해동포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인간관이 놓여있다.
흔히 현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혹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어둠의 시대라고도 한다. 밀란 쿤데라는 비극을 상실한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했고, 그 비극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냉소로 답했다. 이런 시대에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선남선녀들의 초상은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순수한 것 같기도 한, 일말의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시대에 스스로를 불살라 빛을 밝히는 사람들이라니!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도 일깨워주는 인사들이라니! 작가는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아노미(정신적인 공황상태)의 시대며 불확정한 시대, 그리고 물신이 인격을 대리하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진즉에 용도 폐기된 인류애(휴머니즘)의 전언을 다시 끄집어내 어루만지는 것처럼 보이고 위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순진하고 순수하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둠의 시대와 대비되기에 실제보다 더 환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수행하는 마음으로, 자기구제를 향한 몸짓 하나로(여기서 재차 내가 내 스스로를 구제한다는 작가의 주제를 곱씹을 일이다) 이 그림들을 다 그려냈을 작가의 순진과 순수에 불현듯, 겸허해진다.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니,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는 말했다.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가 중요하고 삶이 의미가 있어야겠기에 이런 해맑은 사람들이며 인사들(아님 작가?)의 순진과 순수를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홍순희_비단 채색_2013-1
작가는 꽃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린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근작에서도 작가는 남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리고, 너를 그리면서 나를 그린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적어도 분명한 것은 너를 닮고 싶다는 욕망이 너를 그리게 했을 것이고, 그렇게 너의 그림 속에 나(나의 욕망)를 투사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너를 그리면서 나를 그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서 이형사신의 정신은 너의 얼굴 위로 너의 정신을 밀어 올릴 수 있게 해주고, 나의 인격을 포갤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일 수가 있었다.
작가의 자화상이 의미심장하다. 다른 그림들은 환한데, 이 그림은 유독 어둑해 눈에 띤다. 어둑한 배경화면 위로 비정형의 얼룩들이 어른거리고, 그 어른거리는 얼룩들 사이에 그려진 눈이 그림을 쳐다보는 사람을 쳐다본다. 어둑한 배경화면은 무엇이고, 비정형의 얼룩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심연이며 혼돈일 것이다. 그림을 쳐다보는 사람을 쳐다본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림 속 눈은 그런 자기의 심연이며 혼돈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꽃을 그리면서 자기를 그리고 있었고, 남을 그리면서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재를 옮겨 다니면서 옮겨 다니는 내내 사실은 그리고 어김없이 자기의 심연이며 혼돈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작가는 예술이란 다름 아닌 나에게로의 여행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