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득 펼쳐진 시간의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남현의 ‘the wall’ 전은 마음의 풍경을 담은 3개의 방으로 나뉜다. 3개의 방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개인을 이루는 요소들로 각기 특화되어 나타난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기 안의 타자를 의식하게 된다. 작업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는 과정은 예술이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관객의 동 선은 그 풍경을 그린 이와 만나는 여정이다. 이를 통해 작가 뿐 아니라 관객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여정 속에서 강한 정체성이 구축된 한 개인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 중의 주체를 만나게 된다. 세라믹과 설치의 결합은 주체의 가변적 경계를 다룬다. 세라믹은 단단하게 만들어졌으면서도 깨지기 쉬운 것이듯, 방들이 연출하는 내면 풍경은 양면적이다. 어느 방에 가든지 자아나 주체의 고정된 경계는 구축되면서 해체된다. 벽돌로 쌓아 만든 첫 번째 방은 허물어지는 중인지 건설되는 중인지 불확실하다. 인간을 닮은 술병들이 세워진 두 번째 방에서 견고한 주체의 경계는 흐트러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둑한 실내의 강한 조명 속에서 부재하는 작가의 현존을 기념비화 하는 세 번째 방에서 그의 소중한 것들이 모래에 묻히고 있다. 그것들 모두는 공간 가득 펼쳐진 시간의 풍경이다.

김남현, [the wall] 설치(부분), 2013년.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을 가지는 첫 번째 방 [the wall]은 집을 짓는데 흔히 사용되는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구조물이다. 굴뚝같기도 하고 집 같기도 하고, 그냥 방 같기도 하다. 그것을 에워싼 층층의 담들처럼 벽의 일부이다. 작가는 평균 2미터 높이의 막힌 공간에서 작업을 끝내고 굴뚝에서 나오듯이 뚫린 천정으로 빠져 나왔다. 문과 지붕이 없는 집은 자폐적이면서도 취약하다. 나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는 벽은 견고하지만은 않다. 작가는 벽돌 몇 개를 빼냄으로서 타자와의 접점을 마련한다. 세라믹에 관련된 굴지의 시설과 규모를 갖춘 곳에서 작업하면서 굳이 기성품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성의 단위들로 구조화된 나를 표현한다. 주체를 구성하는 언어와 사회를, 주체 자신이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의 여지없이 기성의 상징적 우주 속에 태어날 뿐이다. 이 상징적 우주와 주체는 괴리가 존재한다. 이 괴리가 욕망을 만족시킴 없이 영원히 유예한다. 블록을 기계적으로 쌓아 내부와 외부를 구별한 이 구조물에서 자연적인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the wall]의 내부는 어지러운 분필 낙서로 가득하다. 그것은 상징적 우주 속 주체를 추동하는 욕망이 언어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낙서간의 연관 고리는 없으며, 타자가 그 낙서를 볼 수 있는 구멍도 뚫려있다. 그 내부는 언어화된 욕망이 가득하지만,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주체성에 뚫린 공백은 채워지기 힘들다. 예술은 언어이기는 하지만, 기성의 언어와 달리 실험적이다. 예술의 언어를 통해 확실하지 않은 것도 발설되며, 기성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영역이 확장되기도 한다. 김남현의 작품에서 주체를 이루며/허물어지는 벽은 블로그도 페이스북도 안하는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이다.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어딘가는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접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구멍이 뚫려 있으며 허물어지는 벽은 주체가 변형 중인 상태를 알려준다. 가변적이며 불안정한 경계는 정신병의 징후일수도 있다. 경계의 완전한 붕괴는 완전한 폐쇄만큼이나 재앙일 것이다. 현대인은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통일된 주체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이 과도적 상태는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절박한 소통을 위한 주체의 변형이기도 하다. 진정한 소통에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모험이 수반된다. 모든 변모에는 광기가 서려있다.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놓는 위험과 도전이 없이 예술적 소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현대 예술은 구성/해체를 통해서, 주체와 객체를 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재현이나 표현을 넘어서고자 했다.

김남현, [worry], 2013년,
[worry]라고 붙은 두 번째 방은 멜랑콜리가 가득하다. 전시회 등을 통해 압축적으로 실현되는, 작가의 타자를 향한 개방이 늘 상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정보가 편재하는 현대사회는 소통지상주의를 외치지만, 사방이 거울로 매개된 나르시시즘으로 똘똘 뭉쳐진 사회이다. 소통은 흔해 터진 것만큼이나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타자와의 불통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만큼이나 견고하게 차단막을 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열만큼 나의 열림은 강력했는가에 대한 자문도 따른다. 그들의 탓이건 나의 탓이건, 우울은 예술가의 상시적인 조건이 되었다. 평균 높이 1미터 정도의 13개의 술병들은 종류도 가지가지이다. 맨 끝에 서있는 것은 거의 사람 키 높이 정도 된다. 무엇인가를 담는 병자체가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그릇은 인간과 비유되곤 한다. 인간이라는 그릇에는 내장 뿐 아니라 정신도 담겨 있다. 다채로운 형태와 질감의 술병들은 도예의 기본인 그릇에 충실하면서 다양한 은유로 확장된다.
술병이지만 상표는 없고 내부는 불투명하다. 관객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복잡 미묘하게 처리된 표면을 탐색하게 된다. 그것은 도자 예술의 방법론에 따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오브제의 속성이 강하다. 오브제는 예술작품과 달리,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정할 수 없는 모호한 대상을 말한다. 그것들은 입구가 말려 있기도 하고 몸통은 찌그러져 있기도 하다. 술을 마시면 혀와 다리가 꼬이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예술가에게 가혹한 환경으로 나가오는 세상을 비꼰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2012년 발표작들에서도 선명하다. 풍자를 위해서 그가 호출한 물건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다수가 욕망하는 물신주의의 대상이다. [1000원], [100달러], [스타벅스], [임페리얼], [코카콜라], [신용카드], [말보로], [아이폰] 등, 작품의 지시대상과 제목을 일치시킨 2012년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꼬여있다.
작품 [worry]를 이루는 병들은 키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것은 술을 마시게 한 원인인 걱정이 증폭되는 과정 뿐 아니라, 계속 차수를 늘려가며 몰려다니는 집단적인 술 문화도 연상된다. 과도한 음주는 한계를 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음주는 주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배설의 기회이다. 그것은 희열과 고통을 동시에 암시하지만, 작가가 명확히 제목을 붙였듯이 상실감에 더욱 가깝다. 술에 취한 듯 우울에 취한 그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증에서 상실된 것은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실된 것은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것’(chose)이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쇼즈의 정체는 알 수 없고 불확정적이며 표현하거나 언표화 될 수 없는 것, 결국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실재계를 뜻한다. 김남현의 병들은 이러한 실재를 담는 그릇, 즉 ‘자아의 배설물과 추락에서 생기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것은 ‘슬픔 속에서 나와 뒤범벅이 되는 폐기물이며, 볼 수 없는 것과 명명할 수 없는 것 속으로 몰고 가는 추락’(크리스테바)이다.

김남현, [life], 2013년.
[life]라 붙여진 마지막 방은 삶을 이루는 응집력보다는 해체가 두드러진다. 하얀 모래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물들은 승화나 고양이 아니라, 추락과 침몰을 알려준다. 모든 것이 하얀 먼지로 변하고 있다. 이 방은 유적지나 폐허의 느낌으로 연출되어 있다. 그것은 안이면서도 바깥처럼 보인다. 모래에 묻힌 사물들은 기성품이 아니라, 세라믹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진짜 낡은 사물처럼 표면의 질감이 살아있으면서도, 화석화된 사물의 모습이다. 그것들은 모래만큼이나 허옇게 바랜 색으로 몸체의 일부만을 보여주며,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사물들은 파헤쳐지는 중인지 파묻히는 중인지 불확실하다. 확대된 비율은 모두 틀리며,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물만은 건재한데, 어둑한 전시장(방)에서 홀로 조명을 강하게 받는 실제 크기의 의자이다. 이 빈 의자는 부재하는 작가의 현존을 알려주며,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을 암시한다. 예전 작품에서 이러한 사물들과 함께 등장하는 주체가 인형만큼이나 작은 것과 비교된다. 그 외의 사물은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들쭉날쭉이다.
군화가 제일 크고 책, 카메라, 반지 등이 큰 물건에 해당된다. 묻히거나 발굴을 기다라는 사물들은 그를 그이게끔 만들어준 삶의 이정표에 해당된다. 그것은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당시의 사건을 압축하는 상징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비중을 가졌든 간에 모두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건발생 시에 선명했을 지각들은 시간의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희미한 기억으로 남는다.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원래의 좌표로부터 멀어져 여기저기에 묻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재료로 되돌아가는 듯이 보인다. 흩어진 입자들을 뭉치게 했던 고온의 열기--가마, 인간의 물리적 심리적 노동 에너지를 모두 포함하는—는 거의 빠져 나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는 높아져 간다. 다른 사물과 달리 반듯하게 서있는 의자는 주체의 상징, 또는 상상적 자아이며, 흩어진 사물들 속에서 중심을 이룬다. 의자는 다른 사물들을 관장하는 위상을 가진다.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지 같은 상황 속, 이 보이지 않는 중심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 한다. 하나하나 추억을 되새기며 만들었을 여러 기물들은 기억의 공간을 이루면서, 발굴을 기다리는 고고학의 현장이다. 역사학이 아닌 고고학인 이유는, 불연속성, 즉 비어있는 부분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삶의 증거들, 즉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숙이 박힌 사건의 흔적들이다. 그런데 김남현의 작품에서, 한 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사물들이 특이한 것들은 아니다. 카메라, 여행 가방, 곰돌이 인형, 반지, 책 등등 그가 불러들인 사물은 누구에게도 자신만의 시공간 다시 짜기 작업에 활용될 수 있을만한 보편성을 가진다. 비록 중요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어떤 개인의 내밀한 세계를 훔쳐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읽기와 쓰기가 가능하다. 고고학적 분위기의 사물들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상호작용적이다. 발굴과 해석을 요구하는 사물-기호들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의 고리들은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잃어버린 시간의 찾기는 사건의 충격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이러한 회상에 의해 상처는 덧나기도 하고, 추후적 이해를 통한 치유가 가능하기도 하다. 시간이라는 변수는 수수께끼 같았던 상황에 어떤 해답을 주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 당시에는 그가 알아볼 수 없었던 차가운 진실의 모습일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아물지 않은 채 봉합된 상처들에 다시 모래를 뿌리는 듯한 아픔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간 흔적으로 남은 지금, 개인에게 희로애락을 안겨주었던 사건들이 강렬했을수록 허무함도 짙다. 강렬함/허무함의 극적 관계가 몸과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전시장 바닥 가득 깔린 모래는 허무함 쪽에 무게가 실린다. 뿔뿔이 흩어지려는 것들을 다시 뭉치기 힘들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막처럼 펼쳐진 모래밭에 드문드문 박힌 사물들은 원래의 맥락을 잃어버린다. 이 단편들은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불확실하다. 그것들이 놓인 사막 같은 대지 또한 정해진 길이 없다. 그곳에서는 미로 같은 방황만이 운명이다. 동시에 이러한 모호함이 시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 양차원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시공간이 자아내는 심미적 효과이다. 강력한 중심의 지위를 차지하며 묻혀 지는 사물들을 응시하고 기억하는 주체의 자리 또한 사라지는 사물들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주체는 사물들의 산물이며, 흩어진 사물들은 주체의 분신이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들의 운명은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공히 이 세상에 작은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스러질 것이다.
출전;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