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재하는 전선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기라의 최근 작품들의 논제인 ‘이념의 무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 편재해 있는 대립과 반목을 표현한다. 공동선을 주제로 한 얼마 전의 개인전에 이어 그가 주목한 것은 독일과 한국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이념, 세대, 계층, 지역, 환경, 성별 갈등’의 문제이다. 전시장 가득히 다채널로 펼쳐지는 투쟁의 현장들은 익숙해서 무뎌진 풍경으로 보이고, 그래서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집단적 싸움의 원인은 여러 가지 여서 작품마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한데 엉켜 아우성치는 모습은 엇비슷하다. 당면한 즉물적 현실이 너무 심란하여 예술 속에서 도피처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는 눈 돌리고 싶은 광경들일 것이다. 그는 조각, 드로잉, 영상 등으로 표현된 다양한 작품을 통해, 거세된 아름다움 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대중 자신이 대중임을 부정하는 대중 개인주의에 의하면, 그것들은 나 아닌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영상작품 ‘이념의 무게’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허위의식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의 역할 아닌가. 작가는 그것이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의 문제일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소수의 문제는 언젠가는 다수의 문제가 된다. 비정규직의 문제에서 두드러지듯이 소수가 다수의 문제로 전이되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소수자로서의 예술가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의 보편성을 가진다. 김기라의 작품에서 악다구니 쓰는 싸움만 펼쳐지는 광경은 인간 사회에서 이해관계의 차이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고, 정치가는 물론 예술가도 뾰족한 해결법은 없다는 의미일까. 작가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고, 그 역시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의 역학 속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받고 있는 당사자일 뿐이다. 예술의 문제가 작품들에 나타나고 있는 바의 격렬한 몸싸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기에는 특수한 분야라는 점이 이런저런 사회적 문제들을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일수도 있게 한다. 

 

작가는 그렇게 지나가는 풍경을 붙잡아 대면시킨다. 비록 현대미술이 다수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분야는 아니지만, 작품이 발표되는 현장을 일종의 공론의 장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란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효과적으로 문제를 제기 함으로서 해결에 다가가는 법을 조금 앞당기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전시대처럼 보편적인 지식인이나 아방가르드 같은 선지자 역할을 더 이상 맡지 않지만, 올바르고 효과적인 문제 제기에는 그 내부에 이미 해법이 잠재해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하지만, 그 밀도와 강도에 따라 일파만파의 효과를 자아낼 수 있다. 법이 포기한 문제를 예술이 다시 문제 삼아서 ‘적법한’ 해결책을 낳은 경우도 종종 있다. 시간이 지나면 중력의 작용을 이기지 못한 채 가라앉는 문제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은 예외적인 역발상, 즉 예술적인 효과인 것이다. 

 

강도와 밀도를 가진 현실은 예술과 다를 바 없다. 예술 또한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현실이 될 수 있다. 현실과 예술의 이러한 근접성 때문에, 예술은 현실적 사건이 가지는 힘에 매혹된다. 그것을 온전히 자기화할 수 없을지라도 사건은 동등한 비중으로 자신의 작품에서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사회적 사건을 재현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단순한 소재주의는 실패할 위험이 크다. 소재주의는 작가의 무감각 또는 무능력에 의해 예술 자체가 가지는 사건성을 간과한다. 현실에 맞먹는 사건을 작품 내부에서도 불러일으켜야 ‘소재가 된’ 현실 역시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다. 작가는 평행선상에 놓인 두 가지 사건의 매개자 및 조율자이다. 그것이 심미주의를 위해 현실을 괄호 친 이와 다른 그의 무리수이고 도전이다. ‘이념의 무게’ 라는 무게 있는 주제를 작품화하기 위해 작가는 먼저 현장과 자료조사에 힘을 썼다.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작업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작가부터 변화시킨다. 이러한 사회학적 탐구는 캔버스를 잘 다듬고 물감을 잘 섞어 바르는 과정만큼이나 작품 내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찾아낸 자료 조사 및 조직자 역할은 경계인의 위치에 서있다. 김기라는 그 경계를 다리에서 발견한다. 작품 [on the bridge]는 가장 많은 자살자들이 몰린다는 마포대교와 한강대교에서 카메라와 함께 몸을 던져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뽀글거리며 깊은 물에 수장되는 카메라의 시점이 비극적인 결말을 떠오르게 할 수도 있지만, 죽음에 근접한 경계인의 시점이야 말로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려온다. 작가는 사회를 가르는 다양한 경계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여러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그는 확고한 주체가 아니라, 유령 같은 정체성에 기댄다. 그는 한 작품에서 누가 누군 편이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엉킨 중간에 껴서 카메라를 들고 버티고 있다. 

 

사건은 대개 모호했던 이해관계가 명료해지는 시점에 폭발하며, 이성적 대화와 타협보다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한다. 작가가 여러 현장에서 발견한 ‘마주하는 넘지 못하는 선’들은 이성과 대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힘의 문제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온다. 김기라의 작품에서 법과 폭력은 매우 가까이에 있다. 법은 폭력에 바탕하며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 자크 데리다는 법이 가지는 신비한 권위의 근거를 해체하는 글 [법에서 정의로]에서, 상식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놓여 진다고 가정되는 법과 폭력이 겹쳐지는 근본적 지점을 지적한 바 있다. 데리다는 여기에서 법적 힘과, 우리가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폭력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독일어 ‘Gewalt’에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등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폭력이 법질서에 외재적이지 않음을 주장한다. 

 

폭력은 법에 생소하지 않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 안에,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모든 국가의 정초는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데, 그것은 항상 폭력 속에서의 창설이다. 폭력과 법 사이의 이러한 상호함축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폭력의 합리적 해결보다는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김기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투쟁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법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메시지인 동시에 힘(폭력)이다. 절망과 분노에 가득한 그들의 주장은 단지 어떤 사연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는 힘의 발현이다. 장면 속의 행동과 언어는 각자 정당하다고 믿는 법의 창설을 위해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장이다. 많은 장면들은 폭력의 폭력적인 발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의 언어로 발현해야 하는 힘은 현장의 그들과는 차이가 있다. 현실적 권력이 없는 작가에게 힘은 담론에서 나온다. 

 

여러 사회적 논쟁을 포함하는 김기라의 작품은 전형적인 예술작품의 외양을 띄기 보다는, 그자체가 담론적 성격을 띈다. 니체나 푸코를 따라, 모든 것이 권력이고, 담론 역시 권력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작가 또한 그러한 권력을 만들어내는 자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거시적인 권력이 아니라 미시적인 권력이지만, 허구를 포함한 현실은 모두 이러한 미시적인 권력-담론의 그물망으로 엮여져 있다. 작품들은 그렇게 짠 그물망으로 포획한 문제적 현실들이다. 미시 권력망 안에서 특수한 분야인 예술 또한 보편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주디스 버틀러에 의하면, 권력은 안정적이거나 정태적이지 않으며, 일상생활 내부에서 다양한 국면에서 개조된다. 권력은 상식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감각을 구성하며, 한 문화의 지배적 인식소들(epistemes)로 위장된다. 나아가 사회변혁은 단지 어떤 대의를 지지하는 다수 대중을 결집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사회적 관계들이 재접합 되고 파격적인 또는 전복적인 실천들에 의해 새로운 개념적 지평이 열리는 방식을 통해 일어난다. 

 

제도적 정치를 넘어선 권력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예술 작업 또한 일련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통해서 헤게모니 싸움에의 개입을 예시한다. 김기라의 작품은 투쟁적 현실만큼이나 거칠고 양면적이다. 영상 뿐 아니라, 같은 주제를 드로잉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힘찬 필치로 그려진 수 십 장의 드로잉은 각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빠르게 내뱉은 말처럼 보인다. ‘NO’와 ‘ON’이라는 두 단어를 쌓아 만든 조각 작품은 ‘된다(on)/안된다(no)’가 돌고 도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 된 것을 안 되게도 하는 싸움에 예술도 담론의 형태로 연루되어 있다. 7개의 채널로 보여주는 다양한 갈등의 현장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동일자에 의해 억압받거나 사라지는 타자들의 모습은 공통적이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동일자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요컨대 ‘성장’을 위해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차이와 다름에 인색한 곳도 드물다. 세계화는 물론, 정의와 진리를 외칠 때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데리다는 [법에서 정의로]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곧 정의’(레비나스)임을 인용하면서, 공정함은 평등이나 계산된 형평성, 공평한 분배나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절대적 비대칭성임을 강조한다. 동일성에 근거한 차별이 아닌, 세상을 진정 아름답게 하는 다양성, 즉 상호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논리대로라면 동일성을 해체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김기라의 작품에서 타자들은 억압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적 권력을 생산한다. 거시 정치학에서 작가는 단순히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만, 새로운 미시 정치학의 장에서 작가의 역할은 달라진다. 갈등과 싸움의 현장은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위해 힘이 재편되는 과정이다. 작품 [백령도에서 쓴 편지 수취인 불명 황해]는 아직도 미제에 쌓인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의 최전선이 된 백령도에서 북한의 누군가를 향해 병속에 넣어 보내는 메시지이다. 

 

병에 넣은 자필 편지는 디지털 시대에 아나로그적 어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소박한 문제에 이념이 끼어들어 빚어진 비극을 빗댄다. 붉은 색 기에 북한의 지명이 선명하게 들어간 냉면집 간판에서 작가는 거시적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기억과 감각의 공유라는 미시적 문제로 풀 것을 제안한다. 뜨거운 여름에 인기 있는 한 끼 식사인 함흥냉면, 평양냉면을 매개로 감각을 공유하는 민족 간에 음식을 매개로 한 인사 및 안부의 편지가 수 십 개의 병에 담겨 해류를 타고 북으로 흘러간다. 메시지가 들어있는 병들은 자연에는 있을 수 없는 경계를 넘어 갈 것이다. 슬픈 배경음악이 깔리는 작품 [메이데이-잃어버린 고향]은 해군 기지로 개조되기 위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강정마을의 싸움을 담았다. 작품 [메이데이 제주-숨비소리]는 관광이나 군사문제 보다 더 소중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해녀들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무형문화재 해녀가 부르는 노동요 ‘이어도 사나’가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흑백 화면은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온 것들이 곧 역사로나 남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낸다. 2009년에 시작되어 22명의 자살자를 낸, 현재까지 아직도 해결이 안 된 쌍용차 사태를 다룬 작품 [풍등]은 정리 해고된 노조 측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전달한다. 여성 노동자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실린 메시지는 더욱 절박하게 들려온다.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는 건조하게 흘러가는 장면 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집중한다. 그 목소리로부터 문제해결에 대한 압박감이 절실하게 전달된다. 정치권이 부침할 때 마다 해결을 약속했던 쌍용차 사태는 자초지종 자체가 실종 되고 말았지만, 작가는 장기화되어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들의 육성을 요약하고 편집해서 들려준다. 독일에서 찍은 작품 [예상할 수 없는 풍경]은 개발의 광풍을 견디고 있는 나무를 담았고, [이념의 무게-숨 없이]는 ‘한명만 살 수 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가정 아래, 순차적으로 숨을 교환하면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노부부를 통해 희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내와 희생이라는 메시지 역시 한 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 문제만큼이나 보편적이다. 김기라가 ‘이념의 무게’에서 다룬 문제들은 우연적으로 불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인간사의 보편적인 문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보편적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첨예한 쟁점을 포함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각종 ‘post’ 증후군에 의해 궁지에 몰린 보편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논문 [보편자를 다시 무대에 올리며]에서, 처음에 보편성이 모든 인간들에게 자기동일적인 것을 가리켰다 하더라도, 보편성은 자신의 범위 내에 모든 인간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함으로서 자기동일성을 상실한다고 지적한다. 보편성이 모든 특수성을 포용하는데 실패하고, 도리어 특수성에 대한 근본적 적대 위에 구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형식 논리는 이타성(alterity)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려 한다. 특수자가 보편자로 흡수될 때는 그것의 흔적, 즉 흡수될 수 없는 잔여가 남는데, 이로 인해 보편성은 스스로에게 유령적인 것이 된다. 

 

보편성에는 그것과 대립하는 특수한 것의 흔적이 불가피하게 떠돌아다닌다. 김기라가 취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적 관점은 작품을 통해 이 시대에 우리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만한 보편성의 문제를 무대에 올린다. 버틀러는 어떤 보편성 개념도 단일한 문화라는 개념 안에서 편히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한다. 문화란 경계가 그어지는 존재자(entity)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들 간의 교환 양식이 그 문화들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할 때, 김기라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회적 대립은 대립을 위한 대립이 아니라, 상대와의 변별적 차이를 통해 구성되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다양한 싸움의 현장은 모든 정체성이 변별적 관계의 장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차이를 무마하지 않으며, 그것들 간의 교환을 가속화시킨다. 그것이 투쟁 일변도로 나타나는 점이 우리의 비극이다. 작가의 조사에 의하면, 사회적 갈등에 따른 비용 손실이 종교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터키에 뒤이어 세계 2위라고 한다. 

 

김기라는 경계를 넘나들면서 형식주의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잔여들, 추상 논리가 그 스스로를 추상으로 구성하기 위해 배제하는 것들을 들추어낸다. 비약적인 물질적 성장의 그늘에 가려있던 타자들은 발전이라는 추상적 형식논리와 분리, 배제된 흔적과 잔여들로서 성장 제일주의의 모순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즈음, 배제된 자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불태운 적은 없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타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다. 작품의 한 주제인 남북대결은 대표적인 타자화의 예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편성은 종합과 화해가 아니라 균열과 투쟁에서 발생한다. 작품에는 정치 경제적 제국의 팽창과 확장에 의해 희생되는 이들이 등장한다. 진흙탕 싸움처럼 전개되는 갈등의 현장은 법적, 형식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성이나 형식 자체가 힘의 논리에 의해 구축되어왔기 때문이다. 비극적 희생을 낳는 이러한 파국적 투쟁은 보편성이란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몸싸움일 뿐 아니라, 헤게모니의 싸움이다. 우리시대에 간취될 보편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도래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러나 산적한 문제들은 현실 속에 흩어져 있으며 시간의 시험에 의해 흐릿해지고, 상대적으로 덜 조직화된 세력이 패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재인용과 재상연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 행위에 있어 김기라는 타자적인 것을 낭만화하거나 투명한 이성적 해법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편 내재하는 전선들은 담론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 이 사건-작품들은 매끈한 종합이라 결론이 아니라, 대립하는 담론들 간의 균열과 진동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서 당면 과제들을 현재화한다. 

 

출전; 인천아트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