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이웃을 공동체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올 9월에서 11월까지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실행된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어쩌다 마주친’은 인천문화재단의 ‘2013 지역공동체 문화 만들기’ 사업 중, ‘청년, 동네를 상상하다’의 7개 사업 중 하나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이 지역의 청년들로 하여금 공공 예술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첫 기회를 주는 것은, 현재 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한다. 미래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새로운 진입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떤 작은 계기가 누군가에게는 큰 경험이 되어 그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의미 있는 문화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아직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그들에겐 어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야 할 것이라는 기대 이전에, 공공 예술문화에 대한 젊은 신념이 실제의 무대를 만났다는 의미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말랑말랑하고 열정적인 그들에게 공적/사적 영역으로 나뉜 채 굳어버린 현대 사회의 각질을 뚫고 대안적 문화의 싹을 싹 틔울 수 있는 미션을 부여하는 것은 공적인 기관으로서는 실험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대개 공적 기관이란 확실하게 검증된 이들에 의해 확실한 결과가 도출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 ‘확실성’이 진정한 객관성이 아니라, 타성에 이끌릴 때 공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란 ‘꾼’들의 세계로 전락하고 만다. 언제부터인가 전국을 휩쓸고 있는, 가히 ‘신 새마을 운동’처럼 비약적으로 늘어난 유사 프로그램에 ‘떴다 방’처럼 출몰하는 ‘공공 문화예술인’(?) 중 얼마만큼의 진정성으로 공공 문화예술 사업에 임하는지는 알 수 없다. 권위가 권위를 낳고, 기회가 기회를 낳는 자기지시적인 연관 고리를 깨지 못한다면, 우후죽순처럼 벌어지는 그 사업들은 소모적인 공회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문화예술에 대한 크고 작은 공적 지원제도들이 어떤 성과만큼이나, 제도에 질질 끌려 다니는(또는 영합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양산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스템을 활용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자기지시적인 관료 시스템이 그들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 지원제도는 제도가 예술을 길들이는 방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저런 지원제도들을 전전하다가, 얼추 한 바퀴 다 돌고나면 과연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관료주의가 문화예술에 의해 창조적 기운을 보충 받아야지, 그 반대로 문화예술인들이 관료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도에 얽매여 제도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어느 덧 비슷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최상의 조합은 예술가가 좀 더 합리적으로 되는 것과 기관이 좀 더 유연해 지는 거지만, 최악의 조합은 원칙 없는 공공기관과 상상력 없는 작가를 낳기도 한다. 이런 현재의 상황을 감안하면, 기존의 가치에 덜 물든 좀 더 젊은 세대들에게 공공 문화예술에 대한 새로운 진입의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공공 문화예술로서는 적다 할 수 있는 예산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 점은 청년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극복해야 할 많은 난관 중의 하나이다. ‘청년, 동네를 상상하다’는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인지 불확실한 존재가 된 ‘동네’와 ‘청년’을 연결한다. 

 

 


 

얼마 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던 범주들은 이제 애써 의식해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가령 이제 동네와 청년이 연관되는 경우란, 동네 불량 청소년이 먼저 생각날 만큼, 동네에 있어 청년이란 투명인간 같은 존재이다. 스펙 쌓기와 시험 준비, 인턴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에 지친 그들에게 집이 포함된 동네란 거의 잠만 자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놀아도 다른 곳에서 논다. 주거 안정률이 낮은 도시에서 동네란 그 자체가 추상적이다. 옆집에 이삿짐 차가 왔을 때 이사를 가는 것이지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웃에 대한 무지가 팽배한 도시에서 공동체를 외칠 때의 난점은 분명하다. 제도가 공고해지는 만큼 보다 많은 이들은 떠돌이가 된다. 청년이 학교나 직장에서 그러하듯이, 투명인간처럼 아무 흔적이 없어야 문제가 없다고 사회는 판단한다.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들안에 얌전히 있으면서 주어진 가치나 소비—그것은 대개 교육이라는 계몽적 가치로 나타난다—하라는 식의 암묵적 메시지 속에서 질곡을 낳는 동일성의 논리는 확대 재생산된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된 청년 그룹 ‘ㅎ’(대표; 이가희)의 멤버들은 경계에 안주하라는 동일성의 논리를 거부하고, 아파트라는 난공불락의 공간에서 공동체 문화에 대한 실험을 시도한다. 아파트 세대였을 그들이 아파트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나온 점이 신선하다. 조밀하면서도 칸막이 처진 그 집단적인 주거 공간은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이 나 올만큼 한국의 대표적 주거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소외가 강한만큼 사적인 영역에 대한 지나칠 만큼의 배려에 의해 거의 밀폐되다 시피한 공간이며, 상호적 무관심이 예의가 되어버린 곳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격화된 공/사 영역의 구분이 사적 영역 또한 피폐하게 했음을 먼저 지적해두자.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움의 전통이 확립된 근대 사회에서 지배의 단위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전환되는데, 이를 ‘개인의 해방’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개인이야말로 전체주의적 지배가 관철되는 최적의 그리고 최종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파편화될수록 전체주의는 더 잘 작동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율적인(또는 자유로운) 존재로 생각하지만, 대중의 한 입자에 불과한 ‘개인’은 사적 영역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보다는 이런저런 소비생활에 머물러있으며, 좀 더 나은 소비 생활을 위해 공적영역에서의 피폐한 경쟁을 내면화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화에 의해 금기시된 사적 영역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마치 거리에서 무분별하게 종교적 전도행위를 하는 것처럼 아파트에서 ‘어쩌다 마주친’ 아무나 붙잡고 공동체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 맹목적이고도 무의미한 가능성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공공 문화예술이란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듯한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작업실에서 각 개인이 겪는 창조의 고통 못지않은 과정이다. 그래서 공공 문화예술에 복무하는 자에게는 방법 뿐 아니라 신념이 요구된다. 공적인 영역에서든 사적인 영역에서든 문화예술은 모두 소통이라는 화두와 연결된다. 공공 문화예술은 소통의 영역을 한줌도 안 되는 예술계를 넘어서 일상까지 확장시키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다. 

 


 

그러나 공공 문화예술의 현장은 지고한 곳에 있는 예술을 소비하기 쉬운 문화로 희석하는 문제가 아니다. 화이트 큐브 속의 미술은 때로 고고하게 보이지만, 그 안을 채우는 예술가들의 삶의 조건도 고고한 것은 아니다. 소수이자 타자인 그들이 남들보다 더 계몽되고 여유가 있어서,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공공 문화예술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회인이 참가하는 동일성의 게임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벗어난 존재이기에 공공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자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장 속에서 예술에 대한 기성의 이데올로기도 해체/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동안 미술대학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미술이 활용은 되겠지만, 현장의 그들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을 느낀다. 그곳에서 필요한 소통의 기술은 직접 대면하는 인간 간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간접적으로 매개되는 시대, 그 과제는 예술가는 물론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와 대면 접촉을 해야 하는 세일즈맨 같은 직종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세일즈맨만큼은 아니더라도 타자와 직접 접촉하는 부담을 이겨내야 한다. 현대사회는 접촉의 공포에 바탕하고 있다. 우리 주변을 촘촘하게 에워싼 인터페이스들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욕망을 향해 진화해왔다. 인간과 인간이 면 대 면 몸 대 몸으로 만나기보다는, 누군가에게는 이익을 낳는 기계장치들을 매개로 한 소통이 지배적인 방식으로 고착된다. 분리를 통한 지배는 나날이 진화하는 IT 기술을 통해 개인주의조차도 넘어선다. 서로 간에 쌓고 있는 그 난공불락의 벽들을 낮추는 선행 작업은 그자체가 목표--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상대와의 벽을 낮추고 소통해야할 어떤 또 다른 가치를 숨겨둔 상태는 아니었다--가 될 만큼의 크나 큰 과제가 되었다. 그들이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젊은이라는 점은 다소간 유리한 지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해당 아파트 주민들이 이 공공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까지는 못해도 순수한 젊은이들의 열정까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동안의 과정과 성과를 전시의 형태로 보여주는 커뮤니티 콜라주 전(12.20-2014년 1.5, 인천아트 플랫폼 A동)에 그룹 ‘ㅎ’은 나무와 투명아크릴로 실제 크기의 승강기를 그대로 구현해 놓았다. 그것은 그들이 작업한 공간을 그대로 본 딴 것이지만, 이러한 구조는 보편적이다. 그것은 개별과 보편을 잇는 특수한 공간으로, 그 자체로 전시장 안 예술작품의 요건을 갖춘다. 관객은 나무 의자가 놓인 그 안쪽에 들어가서 빼곡이 붙은 포스트 잇을 비롯한 여러 이미지와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 마치 가상공간처럼 재현된 승강기는 그들 작업이 펼쳐진 주 무대였다. 그러나 고층 건물에서 수직이동을 돕는 승강기는 그자체가 공동체를 배반하는 대표적인 기구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 특히 이 사업의 대상지인 인천 연수구는 97%가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가지는데, 고층건물 중심의 현대도시는 골목을 끼고 서로 마주보는 낮은 건물들이 있는 이전의 마을과 달리, 사회적 공간을 발생시킬 머무름 보다는 수평적 차원이나 수직적 차원에서 빠르게 이동(통과)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도 아무런 방해 작용 없이 말이다.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밀집되어 살고 있지만, 타자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현대도시의 구조가 구현된 것은 승강기와 자동차 덕분이다. 그룹 ‘ㅎ’이 베이스캠프로 삼은, 수위실 앞의 간이찻집 ‘어쩌다 마주친 찻집’을 지나서 진입할 이 공간을 공략했다. 그들은 문이 닫히고 나면, 단 몇 초 간이라도 같이 탄 사람 사이에 흐를 그 어색함—주민 중 한명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라고 말했다--심지어는 불안함으로 가득한 공간을 유쾌한 소통의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그 아파트는 대단지였으나 그들은 아파트 한 동을 오르내리는 승강기 하나만을 작업 대상으로 했다. 기왕 하는 것 좀 많은 승강기를 대상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승강기 하나에 딸린 가구가 26개니까, 그곳을 매일 오르내리는 거주민만 해도 100여명 정도는 될 테니까 그것도 벅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조적인 가구도 있고 아닌 가구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목표가 너무 소박한 것은 아니었나. ‘어쩌다 마주친’이라는 프로젝트 명에 나와 있듯이 그들은 조금은 수동적이다. 그것은 우연을 필연으로, 작은 것도 큰 기회로 삼고자 하는 태도로도 보인다. 초인종 한 번 누르는 것도 부담이 되는 상황 속에서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이고 자신들의 작업을 만화로 소개하여 나눠주고, 행사 맨 마지막 날 떡 돌리는 일까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서서히 자신들의 존재를 노출했지만, 이러한 조심스러운 행보 덕분에 마지막 날에는 시끌벅적한 동네잔치로 끝날 수 있었다.

 

이들은 13개 층을 오르내리는 승강기를 한 마을의 골목으로 삼았다. 원래 감시경과 광고, 게시판 등이 붙어있는, 4명이 서면 꽉 차는 썰렁한 금속 박스는 칸막이처진 공간을 잇는 매개지대로 변모했다. 승강기를 주 무대로 수행한 이 특이한 공공 프로젝트는 공적이라기도 사적이라기도 힘든 그 이행적 공간에 대한 발견적 가치가 있다. 그들은 익명의 이동공간을 녹색 인조잔디로 꾸미고 나무의자를 가져다 놓았으며, 노란색 메모지로 소통을 꾀했다. 작은 승강기는 일주일마다 ‘전시 작품’이 바뀌는 간이 전시장이 되었다. 대표적인 전시로서는, 이 프로젝트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505호의 가족과의 터키 여행에 대한 사진과 사연, 그리고 이사 가기 전에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는 1105호의 가족 소개와 마지막 인사말 등이 있다. 이 프로젝트를 내용으로 영어말하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6층 남학생의 사연도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 감동적인 에피소드이다. 그것은 한시적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소통의 물꼬를 틈으로서 앞으로 지속될 관계의 씨앗이 되어준 것이다.

 

출전; 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