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통하는 자리 만들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자하 미술관의 메인 공간에 걸린 가로 5미터가 넘는 큰 작품은 마치 운동회나 선거라도 끝난 냥 휘황찬란한 색 띠들이 펄럭인다. 축제의 한마당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들썩거리는 색 띠들 뒤에 무엇이 있는지 금방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사건의 후폭풍인가? 스포츠나 정치 분야의 빅 리그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곧잘 연출되곤 한다. 그러한 게임들은 그 규칙이 다수에게 공유되어 있고 승리자에게는 큰 명예와 영광, 그리고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이 모아지곤 한다. 그런데 들떠 있는 색 띠들 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들을 숨은 그림 찾듯 살피면 이젤, 화분, 의자, 사다리, 그림과 캔버스, 주전자, 파렛트 등이 보인다. 화면 전체를 전면적으로(all over) 뒤덮은 탈 중심화 된 색 띠들과 달리, 원근법이나 중력의 작용에 순응한 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그것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이런 저런 도구들이다. 그 썰렁함은 작업실 바닥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형광등 빛에도 완연하다. 그곳은 다수의 주목을 받는 게임의 열기에 가득 찬 현장이 아니라, 고립된 작가의 작업실인 것이다.

N_either13z23 227.3x545.4cm oil on linen 2013
작가는 스포츠나 선거 못지않게 무엇인가를 향해 전력질주 했지만 그 영광을 누릴 이는 혼자일 뿐이다. 그곳은 작가 홀로 격은 극적 사건의 현장이다. 그림은 대부분 홀로 생산되지만, 작가는 그 결과가 다수에게 공유되기를 바란다. 어울리지 않는 이 환희에 찬 장면은 안과 바깥 사이의 온도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 와중에도 작업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강조된다.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빛은 흩날리는 색 띠들이 아니라면 칙칙한 실내에 불과했을 여기와 다른 곳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마치 기다렸던 메시지라도 도착한 인터페이스 마냥 배치되어 있다. 김진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았던 구조물인 창은 ‘바라볼 수는 있지만 넘어가기 힘든 공간을 상징’한다. 지금 작업의 근간을 형성한 영국 유학시절부터 쭉 사용해온 전시부제이자 작품제목인 [N_either]는 이 양면적 관계를 드러낸다. 물리적으로 창 너머는 바깥이고, 실내는 안에 해당되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반대이다. 작가들이 홀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이 음지쪽이 바깥이고, 사회적인 연결망-안전망이 있는 그 양지쪽이 바로 안이다. 작가는 예술, 또는 작업실이라는 바깥에 있지만, 바깥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즉 그는 작업 내부에 있어야 한다. 단순히 시선이 통과할 수 있는 거리에 놓인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맘껏 펼치는 장으로 고양된 김진의 작업 스케일 및 스타일은 작업 및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있으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바깥에 있지만 바깥의 한 가운데서 자신을 불사르면서 바깥에 있음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 이러한 역설적 과정을 통해 작가는 자신은 물론 사회와도 만날 수 있다. 타자가 된 김에 더 확실하게 타자가 되는 것도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작가가 충분히 이질적이지 않다면 사회는 그에게 매혹되지 않는다. 예술에 매혹이 없다면 소통도 없다. 작가가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은 일반 사회인과는 차이가 있다. 근대적 분업화를 통해 예술의 자율성이 성취된 이래, 작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깥으로 유배된 자가 되었다. 그들은 상품을 생산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분업이 일어났지만, 양자의 교환은 원활치 않다. 대부분의 작가는 예술작업이 아닌 다른 일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며, 이러한 분리가 그들에게 괴리감을 준다. 현대미술의 상당부분이 이 괴리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쏟아 부어야 하는 예술은 다른 파편화된 노동과 달리 소외가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예술이야 말로 이중의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근대적 의미의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력과 행운이 겹쳐지지 않으면 지속 불가능한 까다로운 직종 중의 하나이다. 사회와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낭만주의자는 상상력을, 리얼리스트는 총체성을, 아방가르드는 진보를 외치곤 했지만, 근대에 시작된 예술과 사회 간의 균열과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사회가 아니라 예술 내부의 형식적 자율성에 칩거하려는 모더니즘적 해결책이나 예술 대신에 문화적 우세종이 된 대중문화와의 밀월관계도 이를 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김진의 ‘N_either’ 시리즈는 현대사회에서 작가의 실존을 암시하는 공간 안팎의 관계를 긍정 부정이 동시에 내포된 합성어로 표현한다. 이전과 달리 공간 안에는 인물이 부재하다. 자화상으로 나타나곤 하던 인물은 공간에 녹아버렸다. 그곳은 작가가 부재하는 빈공간이 아니라, 작가의 현존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작가의 현존은 작업실 물건들로 대변되는 사적 소유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희, 또는 절망을 반전시키려는 행위의 흔적들이 증거 한다.

1층 전시장 전경
물리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다른 대상과 달리,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리는 듯한 색선들은 작가의 살아있는 흔적이다. 그의 소유물에 남아있는 온기가 아니라 행동의 산물이 강조되는 것이다. 작가는 쏟아낼 것을 다 쏟아낸 채 막 작업실을 떠난 듯하다. 그는 속이 시원했을까, 허무했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창 이외에 그림자체가 어떤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간주되었다면, 김진의 그림은 소유물을 통해 개인을 암시하는 투명한 창이 아니라, 주체/대상의 분리된 인식을 방해하는 불투명한 창이다. 언어의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의 전이는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의 추이를 예시하지만, 김진의 작품은 이러한 언어적 물질성이 형식의 자율성으로 정리된 모더니즘의 선택과도 다르다. 대상과 의미를 말소 하에 두는 그것들은 오히려 해체주의의 어법에 가깝다. 그것은 자족적 완결체를 이루려는 대상, 주체, 언어의 닫혀 진 힘을 풀어 헤친다. 띠들은 허공 속의 원자처럼 격렬하게 운동하면서 또 다른 맥락이나 질서를 형성하려 한다. 만약에 그것이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켜켜이 쌓인 채 작가와 그 흔적들을 모두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작가가 태어나는 공간은 바로 무덤이 되고 마는 것이다. 화가가 더 열심히 그릴수록 세상과의 담이 두터워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김진의 작품에 두드러진 무한 터치, 그것이 만들어내는 층위들은 그림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읽어내는 과정을 방해한다. 방해를 통해 익숙한 대상은 낯설어진다. 김진은 낯설게 하기를 소통의 자극제로 삼는 현대미술의 전략을 따른다. 이국에서 겪은 모든 과정들이 온통 낯선 것들과의 관계였던 탓도 있다. 그는 명도 차이로 층들을 쌓는다. 채도가 살아있기에 초점을 맞추기 힘들다. 보색이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을 붙여 놓는 방식으로 색과 색의 연관성을 해체한다. 선과 색이 서로 잘났다고 나대는 어지러운 분위기는 미적 조화와 거리가 있다. 그는 화해나 종합의 가상을 거부한다. 그것들은 조율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온 것이다. 리넨에 오일로 그려진 작품들은 유화라는 것이 쌓임의 연속이라는 것, 그리기와 마르기를 반복해야 하는 단계적 연속이라는 점을 의식한다. 쌓임을 통해 그림이라는 대상의 표면을 무한한 겹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불활성의 껍데기로 굳어지거나 먼지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카오스로부터 재편되는 새로운 질서화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한다면 오작교나 뫼비우스 띠처럼 서로 다른 계를 만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대상 뿐 아니라, 주체에게도 일어난다. 작업 중인 작가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과정중의 주체로 변모한다.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시간을 가속시키는 몰입의 순간에 분업의 일부로 도구화된 일상의 주체는 변모한다. 그것이 숭고한 고양이든 아니면 비루한 배설이든 말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예술을 계속하게 하는 동인이다. 아울러 작가에게 일어난 이 카타르시스적 사건을 타인에게도 전염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소통일 것이다. 그는 어떤 추상화된 관념, 또는 잘 완성된 상품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관념이나 물건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나 철학, 그리고 공장에서 잘 만들어지고 있다. 필요한 것은 현재 각각의 세계로 꽁꽁 묶여 고립된 것들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변형이 없다면 불통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어져 있지 않은 선들, 그리고 조화를 결여한 채 아우성치는 색들은 물리적, 심리적 안팎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N_either’처럼 긍정과 부정의 힘들을 나타낸다.

2층 전시장 전경
아직도 어떤 화해나 결말이 나지 않은 이 두 힘들은 화면 안에서 격렬히 상호작용 한다. ‘N_either’라는 신조어는 안과 밖,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구상과 추상, 원근법과 평면, 소통과 불통, 작가와 사회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괴리감 속에서 떠올렸을 그 단어는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작가의 심리적 육체적 현존과 하나가 된 시점과 지점으로부터 풀어나간다. 요즘 작품의 주요 무대인 작업실을 현대미술이 골머리 썩이는 그 보편적 문제를 풀어가는 단초로 삼는다. 이번 전시의 대부분은 작업실을 소재로 하지만, 중국과 영국의 전통 건축을 소재로 한 것들도 하나씩 포함된다. 영국 유학과 그 이후 한국에서 한동안 그렸던 영국식 실내 공간은 파주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2011년 중국에서의 전시를 계기로 중국의 자금성이나 전통 가옥이 등장했다. 이 시점부터 자화상은 사라진다. 공간 자체가 그의 자화상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변형을 거치고 있는 중국에서 고건물, 나이트클럽으로 개조된 영국의 오래된 교회와 작업실이 동렬에 놓이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언젠가 사회의 상징적 우주였지만, 지금은 그와 동떨어진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창이 없는 이 고건물들에 그는 창을 만들어주었다. 영국식 실내와 창밖으로 보이는 인사동의 쇠락한 풍경을 담은 이전의 작품 [하이-인사동](2010년)처럼 제의, 종교, 전통, 예술 등은 현대사회에서 동일한 운명을 겪는다. 섬처럼 격리된 공간 속에서 유배된 작가에게 창은 사회와의 접점이다. 허공 속의 먼지 입자처럼 춤추는 색띠들 이면에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창이다. 대작 옆에 30호짜리 작품을 5x4열로 배열한 20개의 작품은 창만 그린 것이다. 20개가 모여 또 다른 창을 형성하는 이 작품은 사회와 통하는 창구에 대한 작가의 열망이 집약되어 있다. 20개의 작품은 각기 다른 창이지만 같은 크기에 같은 시리즈를 모아놓음으로서, 잠재적 운동감을 자아낸다. 작가는 창, 또는 그림이라는 구조를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회색, 초록, 파랑, 자주, 보라색 등으로 드로잉 한 후, 그 공간을 다시 부셔 버린다. 공간은 살짝만 보여주고, 창만 강력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그렇게 그려진 창은 그 자체의 힘 보다는 군집의 형태로 힘을 발휘한다. 선들은 평면 위에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으려 한다. 여기에서 회화의 기본 문법인 드로잉으로의 회귀는 재현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짐을 말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막힌 창을 뚫거나 새로운 창을 만들 수 있다.
출전; 아트 인 컬처 201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