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하얀 밤
백야, 하얀 밤. 주로 극지방에서 일어나는, 몇날 며칠을 그리고 길게는 몇 달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자연현상을 백야라고 한다. 이윤희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이기도 한 백야는 무슨 의미일까. 하얗게 지샌 밤? 잠들고 싶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 왜 잠들지 못하는가. 무엇이 잠들지 못하게 하는가.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잠들지 못하게 한다. 낮 동안 잠자던 욕망은 밤에 깨어난다. 그리고 몽유병자처럼 밤을 헤맨다. 무의식이 눈을 뜨는 것이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그 층위가 깊다. 억압된 것들이 차곡차곡 쟁여지는 의식(아님 욕망)의 저장고이며, 의식보다 먼저 있었던 선의식이 혼미한 것들, 비결정적인 것들, 가변적인 것들, 이행중인 것들을 잉태하고 있는 수면과도 같은, 가수면 상태와도 같은, 늪과도 같은 침실이다. 그 침실 위로 사물들이 개화하는데, 그렇게 꽃피운 사물들은 현실 속 사물의 됨됨이와 다르다. 욕망은 억압된 것이고, 억압이 사물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도 다르고, 현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사물의 꼴이 보인다. 어쩌면 사물이 그 진정한 실체를 오롯이 드러내는 순간일 수 있겠다.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현실을 닮아 있으면서도 현실과는 다른, 어쩌면 감각적인 현실에 가려서 잘 드러나 보이지 않던, 그래서 보기에 따라선 그 자체 진정한 현실 아님 또 다른 현실(가상현실? 대체현실? 증강현실?)일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열어서 보여준다. 현실은 수많은 레이어로 중층화돼 있고, 그렇게 중층화된 현실의 층위들 중 한 현실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백야는 무엇보다도 백자들의 하얀 피부를 의미했고, 표백된 것과도 같은 순수를 의미했고, 하얗게 질리게 만드는 광기를 의미했고,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을 의미했고, 낮보다 또렷한 밤을 의미했고, 그렇게 밤이 꽃피운 사물들을 의미했다. 노발리스는 낮에 지은 죄를 밤이 정화해준다고 했다. 작가에게 백야는 바로 이런 정화하는 밤을 의미할 것이다. 무의식으로써 의식을 세정하는 밤을 의미할 것이다.
영웅 신화 혹은 성장서사.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다. 소녀는 신탁에 의해 예정된 욕망과 불안으로 행복하지가 못했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서 길을 나선다. 그 길에서 소녀는 여신이 예비해놓은 이런저런 알레고리들에 맞닥트린다.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며 천상의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알레고리며 승화와 추락의 알레고리며 선과 악의 알레고리며 낮과 밤의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는 양면성이 그 본성이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인다. 하나의 사물현상이 마음의 꼴에 따라서 이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저것을 뜻하기도 한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 마치 불교에서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통한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의 양면성은 마음의 양면성이며 삶의 양면성이며 존재의 양면성이기도 하다. 이 알레고리의 여정을 다 지나쳐온 소녀는 그 길의 끝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평안을 얻는다. 마침내 모래로 그린 만다라 그림을 지워 없앨 수 있었고, 감각적인 자기를 벗고 진정한 자기(진아)를 덧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지어낸 이 이야기는 욕망과 불안과 치유의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알고 보면 영웅 신화와 성장 서사에 바탕을 둔 원형적인 이야기를 변형하고 변주한 것이다. 욕망과 불안은 인간의 본질이다. 업이 삶의 본질인 것. 결국 삶이란 업으로부터 해탈하는 과정이며, 삶에서 죽음으로 승화하는 과정이며, 있음에서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해탈이 업의 원형(존재의 목적?)이며, 죽음이 삶의 원형(삶의 이유?)이고, 없음이 있음의 원형이며, 카오스가 코스모스의 원형이었다. 그렇게 삶은 삶(아님 존재)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행위며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존재는 신을 만나는데, 그 신은 행운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주기도 한다. 바로 야누스처럼. 양면성이며 양가성, 이중성이며 다중성 아님 다의성, 다르게는 상호텍스트성이며 인터텍스트성에 해당하는 존재의 비의를 상징한다. 그 과정의 끝에서 만나진 만다라 그림은 우주를 도해한 그림이며 존재의 비의를 도해한 그림이다. 그 비의를 알았으므로(전수 받았으므로) 마침내 나는 허상을 지울 수 있었고, 더 이상 허상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 영웅 신화며 성장 서사를 악몽처럼 하얗게, 손에 잡힐 듯 감각적으로 재현해 보여준다.
상호텍스트 혹은 인터텍스트와 같은, 아님 하이퍼텍스트 혹은 하이퍼링크와도 같은. 작가의 작업은 욕망과 불안과 치유의 서사를 재현한 이야기 그림책이며, 그 서사가 재연되는 원형적인 극장이다. 그 무대 위에서 맞닥트린 해골과 아기 두상은 아마도 삶과 죽음을 상징할 것이다. 만찬에 초대된 총과 같은 무기류와 체스의 말과 같은 존재의 편린들이 바니타스를 상징하고 인생무상을 상징하고 삶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삶과 죽음이 무한순환 되는, 하얗게 표백된 순수의 메타포? 중세 기사들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병정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는 소녀는 아마도 자기를 찾아 나선 자기를 상징할 것이다. 여기서 말은 마치 십우도에서 소와도 같은 것일 것이다. 새는 희망을 상징하고 꽃은 화무십일홍을 상징할 것이다. 탑과 고대 신전과 같은 형상들, 파사드들, 그리고 연꽃 위로 환생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들 중 하나로 분기하는 나? 그렇게 나는, 나의 의식은, 나의 무의식은 미술사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도상들과 고대 이집트의 새머리를 한 신상들 위로 개화하고 있었고 만개하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 혼성되고 고대와 현대가 혼성되는 탈경계의 실천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아님 의식(아님 무의식)기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그렇게 일탈된 경계 위로 쾌락의 정원이며 거미의 성이 열리고, 정원에 고승이 사유하고 있었고, 성에 곰 인형이 잠들어 있었다. 악몽과도 같은 반복 패턴 뒤편으로 밑도 끝도 없는 벽감들이 열리고, 식물이 자라는, 무슨 과일처럼 해골이 열리는 머리가 비밀스런 의미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무슨 메두사의 뱀 머리칼과도 같은 그 의미의 다발들은 아마도 의미의 비결정성이며 가변성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치명적인 죽음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혹을. 그리고 눈을 감은 조상들은 아마도 자기 내면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며, 머리 위로 자라는 뿔은 정신의 파수꾼을 상징할 것이다. 메두사를 쳐다보면 죽음이다. 의미에 현혹되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왕관이며 왕홀과 같은 왕권을 상징하는 도상들, 꽃그림이 그려진 해골들, 만다라 그림들, 그리고 얼굴에 그려진 산수가, 아모르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상이, 낮과 밤의 알레고리가 자기분열하고 자가 분열한다. 그리고 무수히 분기되는 손들, 광기와도 같은 손들이 하얀 손짓을 한다. 그렇게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봉해놓은 악몽의 봉인이 뜯겨지고, 단테의 신곡이 폭죽처럼 터진다. 모두가 생소하고 기묘한,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롭고 아름다운, 치명적일 만큼 섬세한 작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작가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악몽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