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 문명의 사막과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



바람 빠진 풍선과 모던피플. 전작에서 이혜선은 바람 빠진 풍선을 조형했었다. 아마도 역학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역학은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학적 의미를 함축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원래 빵빵했을, 바람이 빠진 풍선은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자기 외부로부터의 억압에 맞닥트린 개별주체의 무기력한 현실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바람 빠진 풍선은 인간 아님 현대인의 메타포였고, 연이은 작업에서 메타포는 그 구체적인 실체를 얻는다. 펭귄의 이미지며 형상을 차용한 모던피플 시리즈가 그것이다. 펭귄은 알다시피 그 형태가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처럼 생겼다. 이런 유기적인 덩어리에 착안해 작가는 사회규칙이 주는 압박감으로 움츠려든 사람들을 표현했고, 하얗게 표백된(하얗게 질린?)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의 덩어리를 빌려 무표정한 사람들을 무표정한 형태로 표현했다. 때로 얼굴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며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을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개인이 없고 다만 군중심리만 있는, 그런 현대인의 소외되고 공허한 초상을 표상할 것이다. 


회색풍경, 200x90x72cm, 시멘트_규사, 2013


몰입과 명상의 대상물. 전작에서 작가의 관심이 이렇듯 현대인의 초상에 꽂혔다면, 근작에서 관심은 현대인이 살아가는 도시의 생리며 생태, 그리고 특히 그 구조적인 측면에 맞춰진다. 미시적인 관점(현대인의 생리)에서 거시적인 관점(도시의 구조) 쪽으로 이행했다고나 할까. 이를 위해 작가는 무슨 이미지헌터나 되는 것처럼 도심의 여기와 저곳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렇게 캡처한 이미지들을 판화지에 피그먼트 프린트로 인화한다.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일종의 소스 역할을 하는 최초의 이미지를 일련의 사진작업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 이미지에 기초한 또 다른 작업에서 이미지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오려 낸 후, 그 이미지를 패널에 덧대고 유화물감을 덧칠한다. 이렇게 패널에 유채로 그린 도시의 형태가 최소한의 실루엣 이미지로 축약 표현된다. 그리고 그렇게 검정색의 단색 화면으로 표현된 도시 이미지를 일종의 여백에 해당하는 하늘과 대비시킨다. 여기서 작가의 관심이 기울여진 주요 문법이 있다면, 다름 아닌 대비가 되겠다. 말하자면 어두운 화면과 밝은 화면을 대비시키고, 도시로 표상된 닫힌 화면과 하늘로 표상된 열린 공간을 대비시켜 답답한 도시, 질식할 것 같은 도시, 암울하고 공허한 도시를 강조하고 있다고나 할까. 


특이한 것은 도시의 실루엣 형상과 하늘이 맞닿는 라인으로 나타난 일종의 공지선 주변으로 마치 핀홀 카메라를 통해 본 것과 같은 희뿌연, 아련하고 아득한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마치 시간의 퇴적층으로부터 발굴해 낸 것 같은, 아님 색도 바래고 형태도 희미해진 오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고답적인 분위기며 느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인상으로 치자면, 심플한 화면구성이 돋보이고, 여기에 서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여기서 심플한 화면 구성은 아무래도 도시의 차갑고 기계적인 생리를 염두에 둔 것일 터이고, 여기에 감지되는 서정적인 분위기는 영원할 것만 같던 도시의 그림자를 표상할 것이고, 도시로 대변되는 문명의 허망함을 표상할 것이고, 그렇게 유한한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감성적인 반응이 빗어낸 정서적인 질감으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색 바랜 흑백사진의 이미지를 상기시키고, 발굴된 부장품의 분위기를 연상시키고, 고답적인 인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간이 만들어준 아우라가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정서적인 성분임을 알겠다.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의 작업은 실사에 바탕을 둔 사진 이미지에 기초한 것인 만큼 한눈에도 알만한 형상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광화문 앞 해태상이며 서울광장에 모셔진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 동상, 그리고 청계천광장 초입에 서 있는 민달팽이 형태의 거대 조형물(클래스 올덴버그의)과 같은 실루엣 형상들이 보이고, 기하학적 형태의 건물과 고궁의 야트막한 기와지붕이 대비를 이루는 형상도 보인다. 현대의 이미지를 과거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 같은, 현대와 고대가 랑데부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이미지들은 다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일까. 


유독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다. 화면 대부분이 중첩된 도심 속 건물의 검은 실루엣 형상으로 뒤덮인 가운데, 최소한의 사이공간을 비집고 겨우 들어앉은 하늘이 암울함을 넘어 묵시록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이렇게 작가는 도시며 문명을 해석하고 있었고 코멘트하고 있었다. 


풍경과 재편집된 풍경 혹은 회색 풍경. 작가의 작업은 최초 사진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이미지를 이런저런 형태로 변주한 것인데, 그렇게 변주된 또 다른 작업들이 풍경과 재편집된 풍경 시리즈다. 이번에는 사진 이미지를 가장자리 선을 따라 오래내는 과정과 방법 그대로 일정한 두께를 가진 아크릴판에다 적용한 것인데, 레이저커팅을 통해 가장자리 선을 따낸다. 평면회화에서 도시의 이미지가 검은 단색의 실루엣 형상으로 축약 표현됐듯, 이번에는 반투명한 아크릴 평면으로 화했다. 이렇듯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함축하고 있는 아크릴 평면 조각을 하나로 짜 맞추는 과정을 통해서 도시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그래서 풍경이고 재편집된 풍경이다. 실측 그대로는 아니지만, 실측을 모티브로 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런 풍경이며 재편집된 풍경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모티브들이 소재로 등장해서 친근하고, 재구성되고 재편집된 것이어서 낯설다. 작가는 말하자면 친근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싶은 것이고, 낯설게 하기 전략을 통해 도시며 문명의 실체를 조망하고 싶은 것이다. 


VS, 200x100cm, 피그먼트 프린트, 2013


그렇게 조망된 풍경이 회색 풍경이다. 회색 풍경? 흔히 삭막한 도시를 표현하고 싶을 때 동원되는 수사적 표현이다. 회색 풍경은 말하자면 차갑고 냉정한, 무표정하고 비인간적인 삭막한 도시의 정서적 색깔이 덧입혀진 풍경이다. 이런 정서적인 환기력을 강화할 요량으로 작가는 시멘트를 질료로서 도입한다. 레이저커팅으로 따낸 아크릴 판 조각을 실리콘으로 떠내고, 이 실리콘 틀을 주형 삼아 시멘트로 재차 떠낸 것이다. 외형상으론 아크릴 판 재질이 시멘트 재질로 변주된 경우로 보면 되겠고, 그렇게 다른 두 버전으로 볼 수가 있겠다. 왜 시멘트 재질인가? 말할 것도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의 재질이며 형태에 따른 것이다. 시멘트 구조물은 유한하다. 영원할 것 같지만,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종래에는 시간의 풍화 앞에 여지없이 주저앉고 만다. 원래 재료인 모래로 되돌아간다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는 구조물을 설치한 바닥에다 실제로 모래를 깔았다. 그 풍경이며 정경이 마치 도시며 문명이 점차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보는 것 같고, 모래밭을 헤집어 오랜 문명의 흔적을 발굴하는 현장을 보는 것도 같다. 아마도 우리의 문명이며 도시며 현실도 이처럼 시간의 풍화와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현대판 바니타스(인생무상)의 전언을 떠올리게 하고, 헛되고 헛되니 인간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는 전도서의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공허하고 무표정한 사람들이 사는 회색빛 도시로 나타난, 머잖아 모래로 화할 문명사회에 대한 작가의 진단이 예사롭지가 않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 무겁게 다가온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풍경네모(네모난 풍경?)라고 부른다. 아마도 도시풍경의 형태적 특징을 네모로 대변되는 기하학적 형태의 변주로 본 것일 것이다. 말하자면 네모를 단순한 형태적 특징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형태 자체를 도시며 문명의 표상 내지 메타포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기계적인 도시며, 삭막하고 공허한 문명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평면과 입체, 조각과 회화 그리고 여기에 사진마저 하나로 아우르는, 현대판 바니타스의 전언을 실어 나르는, 도시에 대한 그리고 문명에 대한 아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를 도형으로 환원한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