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과 현실이 만나는 '인공자연', 그 환상적 풍경



곽호진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전이'를 의미하는 "Transfer"다. 이 단어는 또한 '전환'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차를 갈아탈 때, 혹은 자리를 옮길 때도 이 단어를 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독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 상징들이나 일상적 사물의 이미지들이 작가의 눈을 통해 뇌 속에 입력되고 거기서 일련의 창조 과정을 거쳐 작품의 이름으로 출력될 때 관객과 만나는 일종의 소통의 메커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물과 만난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눈길을 끄는 특정의 사물과 그 이미지에 주목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때로 아주 낯설게 다가온다. 작가란 낯익은 사물이나 이미지들에서 낯선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발언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인데, 이를테면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에서 로깡땡의 시선을 통해 발언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다. 곽호진이 익숙한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어 낯선 상상을 한다고 했을 때, 대략 이러한 시선이 아닐까. 낯선 상상이란 곧 일상의 익숙한 모습을 통해 그것을 '벗어난(beyond)' 어떤 국면을 상정하는 일일진대, 가령 초현실적 풍경이 바로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시각적 언어로 나의 상상이 있는 초현실적인 세계와 관객들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세계를 연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풍경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같은 일상적 풍경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은 작가의 의식을 거쳐 '전이된(transfer)'것 과는 판이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 매개를 작가적 의식의 개입 혹은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이라고 하자. 그러면 후자는 작가에 의해 '덧 씌워진(framing) 것'이 될 것이다. 관객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다시 말해서 전이된 곳, 평범한 일상적 소재가 작가의 눈을 통해 일련의 창조 과정을 거쳐 작품의 이름으로 출력된 곳이 바로 관객이 만나는 지점인 것이다. 곽호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란 이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어떤 풍경이다. 그것은 가령, 벗은 인체를 찍은 사진 위에 기존의 작품 사진을 오버랩하여 전혀 다른 인상의 풍경을 빚어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는 컴퓨터 합성기법을 이용하여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사진의 몽타쥬 기법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일상의 풍경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환(transfer)'하는 작업이다. 관객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벗은 인체를 만나는 지점이 일상적 지점이라면, 작가의 상상력과 의식적 개입을 거친 후의 풍경은 일상적 지점을 '넘어선(beyond)' 초현실적 지평인 것이다. 


곽호진의 사진 작품과 이번에 보여주는 대규모 설치작업은 이처럼 변형된 일상적 풍경이다. 전시장 하나를 가득 채우게 될 설치작업은 환경 자체를 아주 낯선 모습으로 바꿔놓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사람들의 모습, 그는 아주 얇은 MDF 보드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의 발밑에 원반을 놓아 인공의 자연을 형성해 놓았다. 블랙 라이트의 빛을 받아 그가 형성한 인공자연은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낙원과도 같은 설치환경은 그 자체가 낯선 풍경이다. 천장에 매달린 사람들은 환풍기의 바람으로 인해 천천히 움직이고, 발치에 놓인 원반 위에는 갖가지의 작은 동물들과 나뭇가지들이 어울려 소국(小國)을 이루고 있다. 형형색색의 모습을 띤 사람들은 시각적 잔치를 보여준다. 천장에는 별을 의미하는 입방체들이 여러 개 매달려 있다.



이 환상의 세계는 곽호진이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관객과의 소통을 기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소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는 "나의 상상이 있는 초현실적 세계와 관객들이 존재하는 현실적 세계"를 연결시키길 원한다고 말한다. 이를 다시 해석하자면, 그가 이룩한 인공자연은 초현실적 지평의 세계다. 반면에 관객이 발을 딛고 있는 전시장은 현실적 세계다. 그런데 바로 이 둘을 매개하는 공간이 바로 작품이 놓인 전시장인 바, 그곳은 작가적 상상에 의한 초현실적 세계와 관객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중첩된 곳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공간이 지닌 이 이중적 의미야말로 예술이 서식하는 공간이자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뛰어난 해석이 아니겠는가. 여러 상징과 기호, 의미가 난무하는 공간에서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야말로 예술작품을 매개로 한 의견의 교환과 소통이 일종의 거래처럼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 예술이란 다름 아닌 거래요, 교환이 아니던가. 



곽호진의 이번 개인전에는 그가 지금까지 실험해 온 다양한 기법과 방법론이 활용되고 있다. 약 15년에 걸쳐 그는 드로잉, 평면, 입체, 설치에 몰두해 왔는데, 특히 추상화는 그가 주력해 온 분야다. 그는 3년간에 걸친 유학생활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민화에 대한 관심은 그런 영향 탓이 아닌가 짐작한다. 비단 민화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 과일과 꽃들에 대한 관심, 선화나 문인화풍으로 묘사한 인물화 등등 소재뿐만이 아니라 재료, 혹은 그러한 작품들을 담아낼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시도들 또한 곽호진의 작업에 있어서 하나의 과도기적 징후에 불과하다. 그의 작업은 늘 현재진행형인 관계로 뒷날을 예측할 수 없고, 그의 상상력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 시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설치작업을 위해 한 차례 예행연습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매우 성실함을 증명해 주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윤진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