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플레이 展을 둘러싼 대화
(1. 24 – 2. 28, 인사미술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미쓰-플레이’ 전은 새내기 큐레이터인 김미정, 이설, 이수민, 주현서의 아르코미술관 인턴십 성과 보고전이다. 이들은 토론을 통해 정해진 주제를 가지고,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작가 4명—강문식, 장현준, KKHH(강지윤+장근희)—을 찾아냈다. 기획자들과 아무런 개인적 인연이 없는 30대 초반의 작가 군의 이름이 다소간 생소한 만큼 그 조사는 면밀했으며, 이 전시가 관객들에게 통한다면 젊은 기획자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미술계에 처음 알리는 기회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세대의 기획자와 작가는 같이 성장해 나갈 것이다. 젊은 기획자 양성 과정은 젊은 작가의 발굴(또는 재발견)이 딸려오는 시너지 효과가 있다. 아전인수와 자기참조의 만연으로, 공공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미술계 현장에서 젊은 기획자-작가에게 객관적인 공공의 무대가 주어지는 것은 중요하다. 예비 기획자들은 참여 작가들과 전시 주제를 공유하기 위해 대화를 계속해왔으며, 인턴십 프로그램의 한 과정으로 필자와도 대화도 진행되었다. 실제 전시의 뚜껑이 열리기 전에 쓰고 있는 이 텍스트는 그들과의 대화와 그를 바탕으로 한 비평적 코멘트이다.

강문식_○○○_핀조명, 미러볼_가변크기_2014
전시가 인턴십 과정이라는 특수성과 별개로, 기획자 한명이 진행하는 개인전이나 그룹전이 아니라, 일군의 기획자 집단이 작가 집단을 만나는 과정은 그자체가 대화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통상적인 그룹전을 보면, 참여 작가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기획자의 이름만 남는 전시가 있고, 작가 한 두 명 만 부각되는 경우도 있으며, 가장 흔하게는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식의 싱거운 얼버무림으로 끝나는 빈약한 컨셉의 전시도 있다. 그 모두가 구체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공통된 원인을 가진다.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료조사 이외에 그들이 가장 많이 수행했을 대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왕이나 귀족 계급의 독선에 바탕 하는 의사소통 구조가 무너진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 이래, 대화는 근대 사회를 이루고 이끌어가는 동력이었지만, 예술이 대화인가? 예술이라 함은 독창적 개인이 우연과 필연이 복합된 우여곡절을 통해 포착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극명한 예 아닌가? 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미술이 자율성을 갖추게 된 근대, 그때 성립된 기본 어법이 대화가 아닌 독백이라는 점은, 근대 예술가들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 그리고 근대사회 전반에 걸친 형식상의 민주주의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예술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이 대화 상대와의 합의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지독한 반발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합의보다는 차이에 더 주목하는 이 전시는 사실상 한 시대를 살며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는 예술가의 차이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다 거시적으로는 변화의 역사가 가능한 동인은 무엇인지의 문제도 제기한다. 가령 오차는 문학 분야에서 오독에 해당되는데, 해럴드 블룸는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문학사 전체를 오독의 문제로 다시 읽은 바 있다. 오독에 의해서 이전세대의 작가는 이후세대의 작가에게 창조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시는 오해이고 오역이며 잘못된 결합이다. 작품과 비평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재현이 아닌 차이는 질병(비정상)이 아니라, 새로운 종을 낳는 새로운 생명의 과정(자연의 실험)과도 비교될 수 있다. 해럴드 블룸은 시적 오독을 설명하기 위해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원자들이 이탈하는 것을 설명하며, 이런 이탈이 없다면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 맥락에서 저자는 근대시의 참된 역사는 수정적인 이탈들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예술사 자체가 이러한 텍스트 간의 대화, 즉 상호텍스트성의 장이다. 그러나 마케팅 과정과도 뗄 수 없는 천재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술을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떼어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깔고 있는 실증주의나 형식주의는 자신들이 중시하는 ‘실증적 사실’과 형식의 발생과 변동에 대한 설명에 취약하다. 물론 예술을 사회적 역사적 동인으로만 환원시키는 그 반대의 방식 또한 빈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시대의 산물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자신, 또는 자신의 역사와의 대화, 현실과의 대화가 집약된 산물이라는 점으로 위대한 것이다. 전시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대화의 당위성은 성립되었지만, 대화가 과연 순조로왔는가? 그 점에 있어서 ‘미쓰-플레이’의 참여자들은 난색을 표한다. 기획자들이 작성한 전시서문에는 ‘A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B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C는 같은 말을 되묻고 D는 침묵한다. 이 대화는 반복되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수개월간 반복되었고 남은 것은 오차와 미끄러진 말들이다.’(주현서)

장현준_ 나는 협소한 창문으로 출입하라 _퍼포먼스_2014
‘대화는 반복되지만 오차와 마찰만이 존재할 뿐, 시작할 때의 목적과는 멀어진다.’ 전시제목인 ‘MIS-PLAY는 어그러짐을 상징하는 MIS와 유희를 의미하는 PLAY의 합성어’(이설)이다. 기획 과정에서 발생한 미스커뮤니케이션(Miscommunication)은 참여 작가들의 미쓰-플레이(Mis-play)와 연동된다. 기획자들은 그들의 대화과정에서 당면한 오차들을 장애로 삼지 않고, 전시명과 전시서문을 통해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취한다. 마치 사회와 괴리되기 시작한 근대 미술가들이 사회와의 소통불능을 예술 작품의 주요 메시지로 체택해 왔던 것과 같은 동종요업인 셈이다. 서로간의 대화 불가능, 소통 불능이 보편적임을 의식하는 근대 예술은 투명한 소통을 방해하는 낯선 장치들로 가득했고, 이러한 장치들은 전면에 내세운 모더니스트들은 약간의 시대차를 두고 경쟁하였던 예술사조들인 고전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등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새로움의 역사라는 빠른 소진 과정에 의해서 낯선 장치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순간,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기획자들이 관객에게 오차를 오차로서 납득시키는 전략은 모더니즘이 취했던 전략의 득과 실을 동시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오차가 오차로 인식될 만큼 최초의 출발과 목적이 공유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오차의 인식을 위해 장황한 사전 설명과 이해가 요구될 때 관객은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에 이르는 긴 우회로를 포기할 수도 있다. 관객과 전시 사이에 드리워진 미로와 심연은 즐길만한 오차가 아니라 건너지 못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오차에 대한 긍정적 기대치--‘미쓰-플레이는 소통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오차의 작동법과 그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이수민)--에도 불구하고, 오차가 영원한 평행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결론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오차를 무의식적 과정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수면 위로 띄워 올리고, 그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는 점은 기획자들의 기대치에 대한 기대 또한 낳는다. 전시에 참여하는 4명의 작가(팀)에는 각각의 작가론(작품론)이 씌여졌다. 기획자들의 합의에 의한 작가 추천이었지만, 결국에는 기획자 한명이 작가(팀) 하나를 선택한 모양새—강문식(주현서), 장현준(이설), KKHH(김미정, 이수민)--가 되었다. 오차를 줄이는 합의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층에서 전시할 예정인 강문식은 디자이너로서, 미술보다 더욱 투명한 소통을 요구하는 디자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보여준다. 특히 이 전시가 열리는 인사미술공간의 여러 디자인을 참조하여 다자간 소통에서 발생될 수 있는 오차를 활용한다. 2층에서 전시할(수행될) 안무가 장현준의 작업은 동작의 모방에서 발생될 수 있는 오차를 다룬다. 벽으로 나뉜 작은 방들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살려 참여한 퍼포머들이 서로의 행동과 소리를 따라하다가 생겨나게 되는 균열과 공백에 주목한다. 지하 1층에서 전시될 KKHH(강지윤+장근희)의 작업은 컵에 물을 따르는 워크숍을 통해, 공동의 합의를 위해 포기된 개인의 몫은 무엇인가를 다룬다. 작품 [각자를 위한 적당한 양, 모두를 위한 동일한 양,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적당한 양]은 거의 불가능한 합의, 즉 ‘이 정도면 충분하다’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각자 다른 기준들이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여자들은 ‘합의와 포기 사이’(김미정)에서 망설이게 된다.

KKHH_균등한 양으로 맺어진 합의_2채널 비디오영상_4’33”_2014

각 작가에게 ‘오차의 작동방식은 서로 다르지만’(이수민), 기획자들이 밝힌 전시 주제와 전시 예정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차는 이 전시의 키워드가 되기에 충분하다. 오차는 발설되지 않는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대화의 과정 중에서 확인된다. 이 전시는 기획자들 간의, 그리고 기획자 워크샵에 같이 참여한 미술계 구성원들 간의, 작가들 간의 대화의 산물이며, 그것이 전시와 작품으로 완성되는 한에 있어서 대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실제의 대면을 통해 서로 엮이는 과정은 정신적 내향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역동적 과정을 이끌어 낸다. 독백(정신)/ 대화(몸)의 대조를 통해 근대이후의 문화적 지형을 가늠하는 정치학자 정화열은 [몸의 정치]에서 차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동일성과 근대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자기 동일성을 강조하는 근대의 독백적 문화가 독선, 때로는 독재까지도 낳았다면, 근대 이후는 타자와의 차이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정화열에 의하면 탈근대적 사고에는 차이에 대한 생각들이 번창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하이데거의 사이-나눔(Unterschied)으로서의 차이, 데리다의 차연, 리오타르의 불일치, 레비나스의 타율성(heteronomy), 세르토의 이종성(heterology), 그리고 바흐친의 이종언어(heteroglossia) 등이다. 동일자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차이는 나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는 대화론적 사유와 닿아있다. 차이의 논리는 그것이 타인의 타자다움을 뚜렷이 다르게 한다는 점에서 대화적이다. 대화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해석과 해석으로 짜여 진 그물망이다. 차이는 대화의 와중에 크고 작은 결실들을 낳을 끝없는 대화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애써 마련된 대화의 장이 독백의 또 다른 버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개 대화가 지속되기 힘든 경우는 대화를 가장한 독백이 행해질 때이다. 상대를 자기 의견을 관철시킬 대상으로 도구화하고, 자신이 발신하는 메시지에 조금도 손상이 가서는 안된다는 식의 플라톤적 원형에의 의지--재현주의를 추동해온 그 집요한 의지--를 강하게 보여줄 때, 다양한 해석의 기쁨은 대립이 공회전하는 재난의 현장으로 바뀐다.
대화는 단순히 의미의 전달 창구가 아니다. 의미와 의미 뿐 아니라, 얼굴과 얼굴, 몸과 몸이 만나는 대화는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총동원되는 도전적 게임이다. 대화에서 의식적 계산으로 걸러진 메시지만을 상대에게 주입시키려는 계몽주의적(쉽게 권위주의로 돌변하는) 태도는 발화자의 소아병적 욕망만을 충족시킬 뿐,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다. 사실과 당위, 현실과 이상이 뒤섞여 있는 메시지의 복합성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교육의 악영향에 의해서 작품에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나 의식의 검열이 심해진 이들과의 대화는 서로 다르게 이해한 외재적 개념 문제가 대화의 장벽이 되곤 한다. 생산적 차이라고도 볼 수 없는 이 장애물을 넘는 지름길은 상호간에 육화된 언어로 대화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육화된 언어는 전시기획이든 작품이든 평론이든 어떤 생산물을 낳기 위해 수없이 수행되었을 대화들을 잠정적인 순간으로나마 집약하는 진실의 순간을 향한다. 이 전시 역시 육화된 언어로 관객에게 말을 걸게 되길 바란다.
출전; 신진큐레이터 인턴십 프로그램_글쓰기 워크숍(인사미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