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욕망 사이
황용진의 작품세계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Ⅰ. 황용진의 나이는 양띠 그러니까 1955년 생, 우리 나이로 올해 쉰 넷이다. 육십 년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70년대에 걸쳐 고등학교와 대학생활을 보낸 세대에 속한다. 유년시절에 자유당 정권과 관련된 아련한 추억을 가졌을 법하다. 가령, 그가 충청도 시골에서 자랐으니, 사발만한 청색 플라스틱 스피커가 집집마다 걸려있던 광경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당시 이장 집에 있던 앰프를 통해 삐삐선이라 불리는 케이블을 타고 마을의 집집마다 방송되던, 요즈음으로 치면 컴퓨터와 같은 일종의 단말기였다. 그는 보리 고개, 할로 쪼꼬렛, 새마을 운동, 맘보바지, 구호물자용 ‘악수표’ 밀가루 포대가 기억에 선할 것이며, 대학 시절에 장발 단속을 피해 골목길을 질주해 본 적이 있거나,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반정부 시위에 참가해 본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세대를 가리켜 뭐라 부를 수 있을까? 근대화의 수혜자? 아마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배고픔의 단계를 지나 중동으로부터 오일 달러가 유입되던 70년대의 대학생들은 통키타와 생맥주로 대변되는 대학가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매캐한 최루탄 가스의 내음과 통키타, 그리고 청바지와 장발, 미니스커트가 뇌리 속에 혼재된 분열의 시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미술의 경우, 이 시기는 많은 학생들이 소위 실험 혹은 전위미술에 빠져 지내던 때였다. 실기보다는 이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끊임없이 ‘왜?’를 묻던 시절이었다. 이 선은 왜 그었느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던져졌고 답변을 해야 하던 때였다. 화단에서는 개념미술, 단색화, 대지예술, 오브제, 설치미술, 비디오, 이벤트 등등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개념미술의 영향이 가장 컸다. 70년대 중반 무렵의 <앙데팡당>이나 <서울현대미술제>와 같은 대규모 전시장에는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Ⅱ. 황용진의 초기작품 대부분을 볼 수 없는 지금, 그가 어떤 경향의 작업을 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공모전에 출품하여 수상을 한 제목 미상의 작품(창작미술협회 공모전 미협 이사장상 수상작, 1977년)을 보면 ‘옵티컬(optical)’한 경향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에 황용진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게 되는데, 그 후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경향을 더욱 첨예하게 밀고 나가 엄격한 기하학적 스타일의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선회>(130.3x130.3cm, 1981년 작)는 그 대표적인 경우로 팔랑개비의 형태를 띤 이 작품을 통해 이 무렵에 그가 시도했던 기하학적 경향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술학도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한 가지 경향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하학적 경향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사실적인 작품을 제작한 적도 있었고, 초현실적 경향이나 동굴벽화를 연상시키는 드로잉 작품도 제작했던, 한 마디로 모색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바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제1회 개인전(1987년)은 황용진이 여러 해에 걸친 실험과 모색을 통해 화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에 대한 발언이 그것이다.
“’85년부터 그가 시작한 ‘인간’ 시리즈 이후 나는 황용진의 작업실에 자주 들리면서 그의 작업과정을 지금까지 지켜봐 왔다. 우선 그의 ‘인간’ 시리즈는 내가 보는 황용진의 성격과 기질에 아주 적합한 주제라는 것과.......(중략)......한 예로 대학졸업 이후 옵티컬 패턴(optical pattern)을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추상작업에서도 항상 어딘가 거친 듯한 끝마무리와 함께 얼핏얼핏 어두운 세계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듯한 몇 가지 요소들이 보이곤 했었는데, 결국 이러한 산발적인 암시와 이질적인 화면효과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인간’ 시리즈를 시작함으로써 그의 작업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오병욱, 제1회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중에서 인용
화단사적으로 볼 때, 80년대 초반은 70년대의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소위 민중미술과 한강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형상미술이 ‘인간’을 주제로 집단적인 데먼스트레이션을 벌이고 있을 때, 황용진은 이와는 무관하게 ‘인간’을 화두로 삼아 독자적인 작업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기질과 취향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고 황용진은 당시를 회고하며 그러한 물결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유를 나에게 말했다. 이 부분은 실제 그의 그 당시 경력을 살펴볼 때 확인된다. 아무튼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92년 금호미술관에서 가졌던 제4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데, 그 때까지 약 5년간에 걸쳐 다양한 기법의 실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인간을 테마로 일관되게 그려내고 있는 황용진의 작업은 곧 오늘의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존재론적 상황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며, 사회에 대해 던지는 작가의 촌평이자, 주석(註釋)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졸고(拙稿), 사회적 주석(註釋)으로서의 그림-황용진 론(論)
이 무렵 황용진의 작품에 대해 나는 대략 위와 같이 요약한 바 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봤을 때,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표현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순환의 법칙을 좇고 있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이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나타나는가 하면 사라지고,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 즉, 싱그러운 숲에 대한 목마름과 비경을 독자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는 일은 한동안 황용진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 왔다. 작가가 자신이 성장한 배경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자연과 문명, 인간 간의 삼각관계는 그가 집요한 관심을 보였던 ‘인간’의 위치에서 바라다 본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에서 출발하여 자연으로, 다시 자연에서 인간을 되돌아본 뒤, 자연과 인간, 혹은 문명을 포괄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한 한 작가의 오랜 여정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황용진이라는 한 인간이 작가로서 30여 년간 겪고 고뇌했던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의 형태를 띤다. 붓을 드는 행위가 표현을 염두에 둔 의식의 발로일진대,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것인가, 그러한 의식적 행위를 추동하는 심리적 기제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를 둘러싼 비평적 판단의 기준(critical criteria)이 될 것이다.
1987년, 제1회 개인전 출품작의 요체는 ‘인간’이다. 그것도 억압받고 상처를 입은, 말하자면 형해화(形骸化)한 인간이다. 이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서울 근교의 한 목장에 비어있는 우사를 빌려 작업실로 쓰던 때인 1994년 무렵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그 방대한 내용과 변화 양상을 이 짧은 글 속에서 상세히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판화가로서 황용진의 위상이다. 그는 회화와 함께 판화가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화가로서의 황용진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천 년대 중반 이후 그의 풍경화 시리즈는 많은 부분을 판화 재료와 기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이에 앞선 이해가 전제된다. 또한 ‘인간’ 시리즈를 비롯한 각 시기의 작품들과 같은 화풍을 보이는 많은 판화 작품들이 제작되기도 했던 사실도 염두에 둘 일이다.

Ⅲ. ‘인간’ 시리즈는 초기의 하드보드 콜라지에 의한 엄격한 양식(1980년대 중후반)에서 출발하여 90년대의 <우리들 이야기> 시리즈에 오면 화려한 표현적 화풍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화려한 화풍은 1994년 ‘소’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 약 2, 3년간 지속된 셈이다. 통틀어서 보자면 첫 개인전이 있었던 87년부터 93년까지 약 7년간에 걸쳐 황용진은 인간을 주제로 다양한 기법 실험과 주제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선 기법 실험에 있어서는 콜라주를 비롯하여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 오브제의 사용, 기호와 상징의 도입, 시각적 패턴의 원용, 스프레이의 사용, 물감의 흘리기와 뿌리기, 실크 스크린 등의 판화기법의 혼용, 낙서(graffiti) 기법의 도입 등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초기의 인간을 줄무늬 띠로 묘사한 엄격 양식이나 풍자적 화풍에서 90년대의 분방한 표현적 화풍으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색채는 초기의 어두운 갈색 톤에서 점차 화려한 원색의 사용으로 전환하게 된다. 초기 작품의 특징에 대해 나는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황량하고도 을씨년스런 분위기, 때로는 살벌함이 지나쳐 전투적인 분위기마저 감도는, 익명의 등장인물과 낯익은 상황설정이 교차하는 그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일상공간이자, 우리의 삶의 무대인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완곡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황용진은 80년대 후반에 보여준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에서 벗어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표현 자체에 무게를 두게 된다. 마치 ‘인간’은 더 이상 송곳으로 후빌 만큼의 비판적 대상이 아니라는 투였다. 그는 90년대 화단을 풍미했던 ‘해체적 표현주의’(윤진섭)의 물결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나이프와 붓을 사용한 거친 화면의 조성, 즉발적으로 휘갈긴 붓의 선묘적 표현, 생략된 인체와 기호화한 사물들, 화려한 색채감, 이리저리 튀고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들로 묘사되는 이 ‘해체적 표현주의’의 특징은 그러나 황용진의 화면에서 특유의 인간적 모티브와 만나게 되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변태(變態, variation)를 이루게 된다. ‘고독한 개인’ 혹은 ‘익명적 개인’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인간상은 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붙인 콜라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가면과도 같은 종이 인물들은 허상처럼 화면 위를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절모를 쓴 남자,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두팔을 벌린 사람, 동판을 오려 붙인 머리가 없는 사람, 사지가 절단된 인간의 신체 등등 한결같이 영혼이 증발된 것처럼 보이는 기형의 인간군상이다. 그것들은 거친 나이프 자국과 분방한 붓질이 혼재해 있는 캔버스 안에서 연꽃, 물고기, 고래, 악어, 개, 풀, 등등의 사물들과 친화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초기의 ‘인간’ 시리즈에 등장한 인간들이 실존적 분위기 속에서 대립적 관계를 유지했던 것에 비춰볼 때, 썩 대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황용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그 만큼 폭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에서 출발하여 다른 유기체들을 포용하고, 나아가서는 이들의 관계를 친화적인 것으로 설정했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시각이 점차 화해와 승화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는 답답한 서울을 떠나 벽제의 한적한 시골 목장에 정착하면서 자연을 벗 삼는 생활에 젖어들게 된다.

Ⅳ. “한적한 시골에 작업장을 마련하면서부터 자연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소와 사슴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한동안 시골에 칩거하면서 소와 사슴의 생태를 관찰하였다. 이 ‘소’ 시리즈를 제작함에 있어서 황용진의 관점은 ‘관리되는’ 소에 있다. 인간의 손길을 벗어난 자연으로서의 소가 아니라, ‘재화로서의 소’-이는 소의 몸 여기저기에 부착된 노란 플라스틱에 표기된 숫자로 상징된다-인 것이다. 그는 사각 입방체의 전개도를 연상시키는 변형 캔버스를 비롯하여 수납장 형태의 두툼한 캔버스에 실제의 나무, 석고로 만든 사람의 두상, 짚단 뭉치 등을 부착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후자의 작품에서 화면의 전체에 그려진 소는 한쪽은 핑크색으로 한쪽은 옐로 오커로 칠해져 있다. 이 무렵 황용진은 소와 사슴을 소재로 하여 많은 캔버스와 판화 작품을 동시에 제작하였다. 가령, 그는 H자 형태의 변형 캔버스는 중앙의 패널에 소나 사슴을 다양한 회화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중앙 패널의 양쪽에 부착된 세로로 긴 패널에는 검정색 바탕에 노랑색으로 풀이나 뱀의 무늬 연상시키는 단순한 선묘를 그려 넣고 있다.
“이 점을 적절한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시선은-마치 로브 그리예의 앙띠 로망 소설 <농장>에서 인간을 추적하는 시선이 상공에 존재하듯이-밖에서 안을 향해 던져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근작들은 인간으로부터의 결별이 아니라, 새로운 대상을 통한 ‘인간’의 또 다른 의미의 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졸고(拙稿), 내향적 응시에서 외향적 투사로의 전이, 제5회 개인전 도록 서문 중에서
이 인용문은 소와 사슴을 그린 작품의 의미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가 대상을 바라볼 때의 시각이기도 하다. 이 시각은 작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할 때 황용진의 시각은 대상을 관리의 대상으로 ‘포착하는’ 시선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Ⅴ.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황용진은 또 한번의 변화를 꾀한다. 언어의 등장이 그것이다. ‘Genesis’, 즉 ‘창세기’라 칭한 제7회 개인전은 이제까지의 복잡한 화면 구성에서 벗어나 단순한 구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당시의 심정이 반영돼 있다.
“나를 서서히 흥분시킨 것은 단지 창세기의 앞부분일 뿐이다. 순수한 만물과 인간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타락하며 다시 세상이 정화되는 과정의 이야기는 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처럼 진부한 이야기가 이제와 나의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것은 적당한 환경과 그 시기가 나의 두 번째 허물을 벗겨내려 하였음이라 생각된다. 나는 창세기의 깨끗함을 사랑한다.”
황용진, 작가노트 중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말로 한 복음서는 시작된다. 황용진 역시 언어를 화면에 도입하며 새로운 시기를 열어간다. ‘창세기’를 테마로 한 개인전에서 그는 밀납으로 만든 반투명하며 깨끗한 화면을 선보였다.
<ADAM>(120x244cm, 1999>과 <EVA>(120x244cm, 1999)는 이 전시의 대표작이다.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자태를 잘 알려진 성화에서 인용한 이 작품은 인체의 테두리에 심을 박고 그 안에 밀랍을 부어 성형한 것이다. 신체에는 군데군데 마치 침구도(鍼灸圖)의 혈(穴)처럼 아담은 검정색, 이브는 적색의 큰 점들이 산재해 있다. 황용진은 인체의 밖에 있는 여백에 영어 단어를 써넣었는데, 그것들은 아담의 경우, ‘LABOUR’, ‘FREE’, ‘OBLIGATION’ 등이고 이브의 경우에는 ‘BEAUTY’, ‘JEALOUSY’, ‘DEPEND’와 같은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상징어라는 점이다. 노동과 자유, 망각은 남성에 어울리는 단어이며, 아름다움, 질투, 의존하다 등등은 여성에 어울리는 단어다. ‘말씀’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인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화육(化肉)을 의미한다. 성서적 의미에서는 인류 최초의 남성에게 붙여진 이름이 ‘ADAM’이다. 황용진의 언어 그림은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해 나간다. 그것은 도상에 대한 언어의 유희와도 같다. 그것은 가령, <Adam's Apple>에서 ‘role’, 'desire’, ‘sex’이며, <Eve's Rose>에서는 ‘attraction', ‘beauty’, ‘sex’로 대응관계를 이룬다. 그의 <Horse 9901>(60x60cm, 1998)은 마치 언어학에서 의미론의 교본을 연상시킨다. ‘clean animal’, ‘cow 14’, ‘horse 9901’ 등등의 단어와 함께 소와 말의 그림이 개념적으로 간명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황용진의 그림에서 단어나 어귀의 등장은 이때부터 비롯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풍경화 시리즈 이후에 그것은 필요에 따라 등장한다.
Ⅵ. 소와 사슴 시리즈를 거쳐 언어 작업이 지나자 황용진에게는 새로운 소재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자연의 풍경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그에게 다가왔을까?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릴 때의 우리 집 앞뒤로 있던 언덕 모양의 들판을 좋아한다. 그 순수함을 머금고 있는 땅! 그렇게 멀리 보이지도 않는, 그렇다고 그렇게 가깝게 있지도 않는 땅의 모습인 풍경들, 숲이 우거져 있지 않고 그렇다고 황량하지도 않은 그런 땅, 개발의 옷이 아직 보이지 않는 아주 고요한 땅, 가만히 보고 있으면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때로는 느껴지는 풍경, 또한 밝고 경쾌한 풍경이 아닌 새벽이나 해질녘에 보이는 어둑하고 조용한 그런 풍경만이 내 눈에 들어온다. 다른 풍경은 어쨌든 별로다.”
황용진, 작가노트 중에서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황용진이 유달리 새벽이나 해질녘의 어둑하고 조용한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은 작가로서의 특권인 고유의 미적 취향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나 자신의 언어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만들어진 것과 그것에 대한 해석의 관계를 고려할 때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만들어진 작품이 기존의 어떤 것을 연상시킨다거나, 독창성이 없을 때 그것은 때로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용진의 경우에 가령 그의 풍경화가 18세기 서양 로코코 풍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법을 차용했기 때문인지 등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 그런 풍의 그림을 그렸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황용진 풍경화의 이 특이한 분위기는 첫째 개인적인 취향에 기인하며, 둘째 어느 정도는 제작기법과 재료에서 온 것 같다. 그것은 우선 그가 캔버스에 부착한 한지 특유의 흡수력과 표면 질감에 기인한다. 그의 그림은 한지에 미디엄을 발라 번질거리는 느낌을 나게 한 후, 그 위에 판화 잉크를 발라 전체를 덮은 뒤 닦아내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톤의 조절이 특유의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천 년대 중반의 몇 년 동안 이 화풍에 몰입했다. 그것은 어렸을 적 고향에서 봤던 새벽녘이나 해질녘의 싱싱한 숲의 비경을 연상하며 그린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원초성에 대한 동경의 소치다.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의 순수함, 그 본원성에 대한 회귀의 욕구가 이 작품들 속에 서려있는 것이다.
‘언어 그림’이 풍경 시리즈에 앞서 이루어진 것은 풍경화에 언어가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용진은 풍경화 시리즈를 그리면서 풍경화에 꽃, 인간, 간략한 약도, 단어나 문장 따위를 삽입시켰다. 그의 풍경화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개념적 풍경화’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 이유는 이 글의 모두에 밝힌 것처럼 그가 70년대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미술을 개념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고 다루는 행태는 그와 동년배의 작가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왁스로 덮여진 큰 꽃을 그리고 여백에 ‘freedom of yellow life’, ‘beauty is vitality’와 같은 문장을 써넣는 행위는 그림을 개념적으로 접근한 한 예이다. 그는 이 방식이 지닌 상투성을 극복하고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예의 풍경화와 결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가 시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전시장 벽면 전체를 뒤 덮은 대형의 풍경화다. 숭고미가 느껴질 정도로 광대한 들녘을 묘사한 이 작품 위에는 ‘like weeds’와 같은 어귀들을 담은 휘황한 네온사인이 덧붙여져 있어 언어에 대한 관심이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Ⅶ. 근자에 들어서 황용진은 또 한번의 변모를 꾀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변모가 있는데, 하나는 2006년도에 자연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래에 시도하고 있는 ‘자연과 문명의 대위법’이다. 우선 전자에 나타난 큰 변화는 색채감이다. 이전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청색, 노랑, 녹색 등을 사용하여 과감한 터치로 자연 대상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들에 이르면 이전의 풍경화에 나타난 섬세한 묘사가 사라지고 대상을 크게 파악하여 단순화시키고자 한 작가의 관점이 두드러진다. 강렬한 노랑과 순도 높은 청색의 선명한 대비를 꾀한 <Good Morning-Dawn06>(117x91cm, 2006), 노랑색으로 물든 산을 어두운 자주색과 대비시킨 <Small Vitality on Yellow Field>(91x73cm, 2006), 녹색의 계조(gradation)로 산을 표현하고 이를 흰색의 등대와 짙은 청색의 하늘과 대비시킨 <Oh! Sunny day>(117x80.3cm, 2006) 등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두 번째는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한 풍경에 일련의 문명의 상징물들을 선명하게 대비시킨 근작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서 길게 언급했던 어두운 분위기의 풍경화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화잉크가 아니라 유성 물감이나 아크릴 칼라로 그린 점이 다르다. 아무튼 소재나 풍경의 내용은 이전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 놓여진 대상들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를 선정하여 숲이나 들녘, 벌판 등등 의도하는 분위기에 적합한 상황을 설정하여 문명의 부산물들을 대비시킨다. 그 방법은 가령, 영문판 원서들을 쌓아놓고 그 위에 시계를 올려놓는다든지, 책 더미 위 허공에 커피 잔을 띄워놓는다든지, 여러 대의 승용차를 허공에 흩트리거나 겹쳐놓는다든지, 겹겹이 쌓인 햄버거 위에 코카콜라 컵을 올려놓는다든지 하는, 일련의 배열법이다. 초현실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방법은 이전에 꽃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낯선(異化:alienation)’ 느낌을 자아내던 기법과 어느 정도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싱싱한 생명력을 지닌 자연의 풍경과 문명의 산물들을 대비시키는 이 전략은 일종의 상투형(cliche)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용진이 구사하는 이 방법은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작업의 지속적인 진행에 의한 논리적 귀결이란 점에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가 서로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자아내는 다양한 풍경을 배경으로 햄버거, 매혹적인 여인의 벗은 사진이 담긴 병, 의자, 새, 신문지, 목걸이가 걸린 마네킹, 책, 승용차 등등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단지 초현실적 느낌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순수한 자연과의 대비를 통하여 사물의 생생한 존재감을 표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을 하나의 기호(sign)로 파악, 문화 내지는 문명을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인간‘에서 시작해서 자연을 거쳐 이제 다시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화두로 끌어안은 황용진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은 그림을 통해 사물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