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예술, 타자와의 대화
이선영(미술평론가)
1. 예술성과 대중성, 그리고 공공성
근대사회에서 발전된 분업화는 예술 또한 전문화시켰다. 공동체에 기반 한 공동사회가 개인에 기반 한 이익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은 전통, 자연, 타자를 배제시킨 일면적 발전이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분업화는 생산력을 높이고, 또한 그것이 진보라고 간주되었지만, 그것이 물질적 차원이 아닌 정신적 차원일 때, 생산력이나 진보의 개념 자체가 모호해 진다. 생산력이나 진보라는 개념은 순수 예술보다는 대중문화에 부합된다. 대량생산-소비 시스템에 기반 하는 대중문화는 문화적 우세종, 또는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다. 시대의 코드에 잘 맞춘 문화-예술 생산품을 전문인들이 분업화 시스템을 통해 대량 생산하는 것은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대규모 흥행작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된다.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도 그것을 구매, 향유함으로서 대규모 투자가 보상되는 대중문화는 취향의 통일을 전제한다. 집단적인 소비가 흥행을 가능하게 하며, 흥행한 것만이 그다음의 생산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 취향은 자발적이기 보다는 미디어의 조작에 의해 중독되는 것이어서, 결국은 대중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자본의 게임이기 십상이다.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문화는 소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편리한(?) 방식을 통해 더 큰 자극만을 바라는 수동적 대중을 낳곤 한다. 대중문화는 대중 또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대한 팝콘 그릇이 옆에 놓인 편안한 의자에 푹 파묻혀 눈이나 손만 움직이고 있는 시청자에게서 우리는 문화 소비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대규모 자본과 유통시스템, 전문인들의 협업에 의해 생산되는 문화가 생산하는 것들은 자극만큼이나 큰 권태를 불러온다. 수동성과 권태는 서로를 끌어들인다. 거의 손에 딱 붙어있다고 할 수 있는 손안의 단말기부터 건물 전체를 감싸며 번쩍거리는 미디어 파사드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에 보편화된 스펙터클 문화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충족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대량 소비만으로 문화적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예술의 역할이 요구된다.
예술 또한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관객을 소비자화한다면, 대중문화에 내재된 질곡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전시장에 쓱 와서 보고 쓱 나가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로 만든다고 하면서 작품을 복잡한 퍼즐로 꼬아 놓는다든가, 또는 장난감 수준의 단순한 상호작용에 머문다든가 하는 것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대중문화에 비한다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1990년대 문화예술계를 강타했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있는 키치 열풍은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이 대중문화보다 더 재미없고 더 무의미하다는 자각에 의해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풍자에 머물고만 네거티브 전략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1980년대의 근대적 계몽주의 문화예술 보다도 그 시한이 짧았다. 그러나 더 나은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술은 물론, 물질적 진보조차도 문제시될 수 있다. 더 많은 생산이 더 많은 쓰레기, 그리고 더 많은 억압과 빈곤 또한 낳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진보만을 보증하는 듯했던 근대의 역설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모순과 역설이 시작된 근대는 공동체 내지 전통적인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워진’ 예술가를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예술가상, 가령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 비사회적이며 괴팍한 성격, 사후에나 인정받는 저주받은 천재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재미는 있지만 가까이하기는 싫은 양면적 캐릭터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고립무원이 야기한 이러한 근대적 예술가상은 실제의 예술계보다는 대중문화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실제의 예술가들은 적은 자원으로 생산(또는 창조)을 해야 하기에 더 합리적인 경향이 있다. 실제의 예술가들은 시대를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시대와 통하는(또는 앞서가는)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현실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또한 현대사회 전반의 관료화 경향은 그에 걸 맞는 유형의 작가들, 즉 시스템을 활용하려는 고도의 전략가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예술의 소외 또는 해방이 낳은 결과가 대중문화에서 신화적 이미지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양자가 닮음 꼴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대중문화는 큰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 둘은 근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에 의해 함께 생겨난 쌍둥이 분체이다. 그 둘은 모두 생산과 소비의 현장이 구별되고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다수로부터 얻어낸 이익을 극소수에게 몰아주는 물신주의에 호소한다. 물신주의가 작동하는 바탕은 체계이기에 그 둘은 철저히 체계 영합적이다. 체계란 이런저런 제도로 나타나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체계는 시장이며, 매스컴은 물론 대학 같은 유사 공공 영역 역시 시장에 복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동일성 때문에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이 순수예술일 수 없고, 순수예술의 대안이 대중문화일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술성과 대중성에 더하여, 공공성이라는 대안적 가치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물론 사회적 가치를 외치는 공공성 역시 예술성이나 대중성을 강조하는 문화 예술처럼 동일성의 논리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그 부정적인 예는 국민을 앞세우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현실 정치인들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예술성이건 대중성이건 공공성이건, 동일자가 아닌 타자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예술에 있어 공공성은 물질적 고도성장만큼이나 소외가 증폭되기 시작했던 1980년대 이후, 아래로부터의 자생성 또는 위로부터의 제도화에 의해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이루어졌으며, 지방자치제의 발달로 인해 폭발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과 무의식마저도 체계적으로 코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필연적인 가치로 부상했다. 공적 제도에 의해 지원되는 공공 문화 예술은 사회-예술 보다는 문화-복지 같은 개념 쌍에 방점을 찍는 경향이 있다. 이 애매한 입지 속에서도 사회-예술 간의 의미 있는 관계설정을 꾀하는 이들의 활동들이 가늘게나마 이어져왔다.
2.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경우
2009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였으며, (사)한국미술협회가 중심이 된 마을미술 프로젝트 추진위원회의 공공 문화 예술 사업은 ‘마을’과 ‘미술’이라는 두 소외된 코드를 연결하고자 했다.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대도시가 중심을 이루는 현대사회에서 ‘마을’이나 ‘미술’은 모두 위기에 처해진 개념으로, 이 둘은 사회를 지배하는 동일자의 가치에 거슬러, 타자로서 만난 것이다.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출범한 당시에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서 선정된 21개의 프로젝트 중에서 몇몇 사업은 이후에도 진행된 사업의 범례가 되어 주었기에, 공공 문화 예술의 사회적 파급 효과를 논하는 이 글의 실례가 되어줄 만하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에서 밝힌 이 사업의 목적은 ‘생활공간 공공미술로 가꾸기’였는데, 그것이 공공 문화 예술의 목적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또한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몇 년 후에도 작동중인 공공 예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능성이 필수인데, ‘---가꾸기’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기존의 공공미술이 가졌던 장식성을 보존한다.
기존의 기념비적 공공미술의 약점인 상징이 빈약한 장식이 아니라, 주민과의 소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장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주민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제작된 잘 만들어진 장식은 상징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대중성과 기능성은 일회성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몇몇 작가들만의 자기만족적 공공 문화 예술에서 결핍된 요소 중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대안의 공공미술을 무늬만 좆아, 목적 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면서 도저히 현실 속에 서있을 수도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이 어떤 맥락에 놓이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함량미달의 작가들이 일단 기회부터 잡겠다는 생각으로 소화불량의 무리한 기획을 담당하여 그 폐해를 ‘공공적’으로 널리 알리는 경우도 있다. 행사를 위한 행사에 머물고 마는 그러한 부정적인 예들은 기성의 공공미술을 대변했던 ‘문패 조각’ 만큼이나 공해이고 낭비이다.
공공미술이든 대안의 공공 문화 예술이든 계속되는 시행착오는 공공영역에서의 문화예술에 대한 피로도를 축적시키고, 공공미술보다는 결국 뛰어난 개인에 의한 창작물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도 낳게 한다. 따라서 공공 문화 예술의 수행자들은 모처럼 사회가 부여한 기회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이자 동시에 사회의 일에 성실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에서 ‘---가꾸기’라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주민과의 소통에 기반 한 상징이 담겨있는 예로 작은 농촌마을인 전남 함평의 ‘선돌 할매의 산내리 별곡’(제작; 잠월 in 산내리, 대표; 김광옥)이 있다. 산내리는 20 여명의 어르신이 사는 작은 시골마을이었기에 긴밀한 소통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프로젝트는 ‘소망별곡’, ‘추억별곡’, ‘유희별곡’이라는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참여 작가들은 역사의 상흔을 안은 채 쇠락해가는 작은 마을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작품 [회상별곡]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활용하여 선돌 할매의 기억을 철판 구조물로 만든 작품이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같이 사라질지 모를 이야기가 견고한 매체로 다시 만들어져 후대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작품 [구리멍석]에는 마을주민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들어가 있다. [마을 방송국 on air]는 마을방송을 이용하여 새로운 소통방식을 이끌어내었고,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당산나무를 철조작업으로 재현한 작품 [당산나무]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만들어진 물고기, 장수풍뎅이, 톱사슴 벌레, 무당벌레, 나비, 하늘소, 매미, 초승달 등이 사시사철 떠있게 했다. 어느 마을에나 있었던 당산나무는 주민들 간의 소통 뿐 아니라, 이전 세대와의 소통—함평 양민학살의 역사적 기억이 있는 이 마을에서는 당산나무가 아닌 ‘선돌 할매’ 앞에서 동제를 지내왔다고 한다--이 이루어지는 신성한 장소이며, 타자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공공 미술 작업이 간과할 수 없는 소재(또는 영역)라 하겠다.
농촌지역에서 학교 또한 사라져 가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마을의 중심에 있었을 시골의 작은 학교는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곤 한다. 전북 완주에서 실행된 ‘폐교를 활용한 미술 놀이터 만들기’(제작; 완주 지역문화 자산 연구회, 대표; 진창윤)는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동창일 정도로 같은 추억을 담고 있는 폐교를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작품 [미술 창작 실]은 친환경 재료로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 체험 장을 만들었으며, 작품 [다문화 카페]는 농촌지역에서 많이 거주하는 이주 여성들을 위한 문화 사랑방이다. 그들은 이국적 타자라는 구경거리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작품 [마을 기록 전시장]은 마을주민들이 소장한 기록물들과 지역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주민들 공동의 추억이 담겨 있는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기억은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지속된다. 잊혀 진 것들과 쉽게 잊혀 질 수 있는 것들이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이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한다.
각종 인공구조물이 많은 도시에서 공공미술을 통한 또 다른 인공구조물의 첨가는 불필요함을 자아낼 만큼 동어 반복적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 자리가 텅 비워져 있거나, 아니면 인공물 대신에 나무라도 한그루 심어있으면 하는 바램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연에 파묻혀 있는 농촌 지역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 기능과 상징이 두루 만족되는 인공 구조물들은 일종의 랜드 마크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일대에서 진행된 ‘모심으로 미소짓다’(제작; 오늘 공공미술 연구소, 대표; 임재일)는 지역경관과 어울리는 기념비들이 세워졌다. 작품 [기운생동-꽃]은 마을의 삼거리에 화려한 꽃을 설치함으로서 대전과 갑사 방향의 삼거리에 이정표를 만들었다. 마을 입구에 조성된 [대나무 쉼터] 역시 마을의 상징이 되어준다. 대나무로 얽어서 만들어진 실제 크기의 나무는 이물감이 없으면서도 이 작은 마을을 알리고 기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대나무 쉼터, 2009년. (오늘 공공미술 연구소 제작)
그 밖에 학생 또는 마을 사람들이 그 위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모양의 스트리트 퍼니처인 [시가 있는 책]은 책이 상징하는 바, 즉 저자 또는 독자 간의 대화를 표현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장소와 그늘 막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작품 [추억의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정류장은 주황색 기둥에 녹색 아크릴 천정으로 산뜻한 디자인이 돋보이며, 그 천정에 마을의 의미 있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주의 ‘모심으로 미소 짓다’ 프로젝트는 주민들이나 관광객이 모이는 지점들을 주목함으로서, 공공미술이 공적인 영역에서의 만남의 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에서 인공구조물이 동어 반복적 공해가 되지 않는 방법은 현실의 굴곡 면과 잘 밀착키는 것이다.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에서 가장 성공적인 예로 꼽히는 부산 사하(감천)의 ‘꿈을 꾸는 부산의 마츄피츄’(제작; 아트 팩토리 인 다대포, 대표; 진영섭)에서의 작품 중 하나만 예를 들고 싶다.
사하구 감천 2동 인근을 ‘살고 싶은 공간’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겠다는 목표아래 설치된 10여점의 작품 중 하나인 [하늘 계단]은 팍팍한 삶이 느껴지는 가파른 계단 난간 사이사이로 자라나오는 듯한 생명 이미지가 돋보인다. 프로젝트가 실행된 동네는 한국전쟁 당시 팔도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가파른 산 위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삶의 터전으로 프로젝트 명에 있는 ‘마츄피츄’나, 산토리니 섬 못지않은 독특한 풍광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마을 풍광에 문화의 향취를 더함으로서 재개발이라는 획일적이고도 무지막지한 방식이 아닌, 보존과 재생을 위한 실험무대가 되어 주었다. 2009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의 몇몇 예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방어막을 치는 개인 작업을 벗어나, 타자와의 대화를 꾀하는 대안의 문화예술이라는 의미가 있다. 현대사회, 의식, 주체, 이성 등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타자들을 공공의 무대로 호출하는 것이다.
3. 공공영역에서의 타자와의 대화
농촌의 작은 마을 폐교나 도시의 산동네 등지에서 펼쳐진 공공 문화예술은 세계를 개조하거나 정복하겠다는 근대적 주체와 그 주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성의 원리를 해체하려 한다. 타자에 주목하다고 하면서 타자를 동일자의 언어로 옮기는 오류도 반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타자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무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문화 예술에서는 내가 결코 빠질 수 없다. 그 주체가 아무리 문제시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와 타자의 거리는 완전히 좁혀지지도 그럴 필요도 없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자신 안의 타자와도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나와 타자 사이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의 상호작용, 즉 대화이다. 대화를 통해 주체도 분명해 진다. ‘타자의 출현과 더불어 내가 타자를 영접하고 대접할 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이 성립 된다’고 주장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의 타자성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의 질문은 철학이나 종교, 윤리의 문제와 닿아있지만, 문화예술에서도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이란 일종의 언어이고 인간에게 언어의 습득은 타자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이 아닌 문화, 즉 상징적(symbolic) 질서 안에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상징적 질서에 포획된 인간에게는 억압과 동시에 자유가 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최초의 타자인 어머니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주체의 욕망을 표현하게 된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추후에 획득하는 이성과 노동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방식이다. 공적/사적 영역으로 분리된 사회에서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문화예술은 타자를 새로움과 신비로움을 겸비한 대안적 가치로 보지 않고 타자를 도구화하여 자신 앞에 쌓아두는 유아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는 공공 문화 예술은 세계를 도구화하지 않고 향유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러나 전자매체로 포화된 정보화 사회는 유아론을 더욱 널리 확산시켰다.
정보기기에 접근하는 시기는 거의 갓난 아이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정보화는 정보가 공기처럼 편재하는 기술로 진보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의 언어는 세계(타자)를 가리키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는 자기 참조적 문화를 번성시켰다. 레지스 드브레는 소통의 역사를 다루는 책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그림과 달리)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는 더 이상 외적 현실을 모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컴퓨터의 자기 참조적 이미지는 모든 지시물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이를 통해 메시지 없는 약호나 의미론 없는 구문이 횡행하게 된다. 레지스 드브레는 실재의 사라짐을 추동하는 영상적 시각이 서로서로 소통하고, 이제 그 자신에 대한 욕망 밖에 지니지 않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즉 미디어는 점점 더 우리에게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기증 나는 거울이 되었다. 거울 너머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거울 안에 갇힌 수인들의 세계는 얼굴 없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또 다른 전체주의 사회인 것이다.
A는 A임을 지시할 뿐인 동어반복의 문화 속에서 새로움이나 진보는 순간적인 기분 전환이나 이벤트로 끝날 뿐이다. 근본적 변화는 타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어느 시대보다도 미디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타자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전자거울을 통해 매순간 타자와 소통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 거울에 비춰지는 것은 자신일 뿐이다. 가상이 지배하는 일상을 벗어나, 종종 사건처럼 일어나는 실재와의 조우는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을 증거 한다. 가령, 세계의 종교 전통에는 절대적 타자(신)와 조우하는 체험을 기술하는 문헌이나 예술작품의 예가 종종 발견된다. 낯선 것이 되어버린 실재와의 조우를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분야 중의 하나가 공공 문화 예술이다. 공공 문화 예술은 얼굴과 얼굴, 몸과 몸의 만남을 통해 미디어에 의해 더욱 가속화된 타자의 사라짐을 극복하려 한다.
주체와 타자를 동시에 변모시킬 양자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기성의 미술이 견지했던 시각중심주의를 벗어남으로 가능하다. 공공 문화 예술의 현장에서 많이 발견되는 타자와의 대화는 세계를 알고 지배하려는 침묵의 시각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주목한다. 실제로 공공 문화 예술 현장에서는 시각적으로 명백한, 즉 객관적인 어떤 산물을 내기 위한 노력 보다는, 대화적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공공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커뮤니티 아트’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공동체적 체험을 중시한다. 물론 공동체는 선험적으로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영역에서 일어나는 문화 예술의 사건 속에서 일시적으로 그러나 강렬하게 형성될 수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잘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과정은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는 대화로 채워진다. 바흐친이 말하듯이, 대화적 상상력은 세계를 축제 화 한다. 그래서 공공 문화 예술 현장에서 함께 나누는 잔치나 축제의 개념은 매우 친숙하다.
시각은 타자를 대상화하지만 소리는 같이 공명한다. 시각은 하나의 시점으로 몰아넣지만 소리는 여러 방향에 들려오는 것을 긍정한다. 시각은 몸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소리는 몸을 의식하게 한다. 탈근대의 관점에서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정치학자 정화열은 [몸의 정치]에서 소리는 사방으로 나아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음조는 결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음조는 여기 혹은 저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즉 사방에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내포하고 둘러싸는 것이다. 침묵의 시선으로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유쾌한 대화는 해석들로 짜여 진 그물망을 이루며 지속된다. [몸의 정치]는 바흐친의 대화론에 주목한다. 바흐친에게서 존재한다는 것은 의사소통하는 것이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은 이질적이고 다성적인 언어, 담론, 음성, 의미 즉 이종언어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분과를 넘나들며 더욱 중요하게는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넘나든다. 대화주의에 의하면 나와 너는 혼자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우리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아와 타자가 함께 우리라는 관계를 형성하며 대화의 공동 참여자인 까닭이다. 반면 근대의 시각중심주의는 동일성의 논리에 기반 한다. 정화열에 의하면 동일성, 즉 identity는 i(eye)dentity로 분철되는데, 이는 동일성의 논리가 모호성 보다는 명료성을 추구하고 시각을 중시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대문자 I는 eye와 같다. 말하자면 시각중심주의의 근본적인 맹점은 나만 바라보는 사회적 건망증 또는 나르시시즘에 있다는 것이다. 미술계는 소통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자기만을 가리키며 자기만을 말하는 예가 넘쳐난다. 그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에 기반 하는 개인주의(또는 이기주의)와 뒤섞이면서 보편화되었다. 타자를 부정하는 나르시시즘적 시각은 자신 뿐 아니라 미술 또한 빈곤하게 하였다. 마을미술에서 나타나는 바의 공공 문화 예술의 사회적 의미는 이 닫혀 진 공간에 창문을 내고 신선한 타자의 바람을 불러들이는 것에 있다.
출전; 소동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