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공담, 우무길
화수공담. 그림이나 사진 등 조형작업을 놓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자리라고 했다. 수원에 지역적인 연고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고 했다.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원래 작가는 함께 일을 도모하기보다는 혼자 노는 각개전투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런 탓에 공적인 자리와 같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작업에 대해서 논할 기회가 별로 없는 편이다. 작업은 그저 개인의 몫이려니 하는 것이다. 이런 차에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여기에 외부 비평가들을 초대해 논의를 심화시키는 공론장을 작가들이 주도로 만든 것은 실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돌이켜 보면, 이런 자리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일회적 행사에 그치거나 지속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작가들 저마다의 개성이 강한 탓도 있겠고, 처음 의도했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지지부진해진 탓도 있겠고, 시간이랄지 경제적인 문제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임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갔으면 좋겠고, 지역에 기반을 둔 공고한 공론장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졌으면 좋겠다.
2012년 6월 이석기 작가를 시작으로 치자면 이제(2013년 6월 현재) 꼭 만 일 년이 된 셈이다. 아직은 더 지켜볼 일이다. 여기에 올해는 수원문화재단의 지원을 끌어냈다고 하니 좋은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사족이겠지만, 지원을 위해 급조된 아이템은 당연 아닐 것이다. 단순한 경제적인 지원으로서보다는 대외적인 인정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재단의 지원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소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최 측에선 재단으로부터의 지원을 계속 끌어낼 수 있도록 행사를 공고히 해야겠고, 여기에 맞춰 재단 측에선 실질적인 행사가 가능하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제사보다는 젯밥 소리를 듣는 것도 명실상부한 공론장 소리를 듣는 것도 전적으로 주최 측 하기에 달린 것이다. 대개 시작은 좋은 법이다. 지금보다는 앞으로를 기약해야겠기에 하는 소리다.
이번 논의 대상 작가는 우무길 작가였다. 작가에 대해선 몇 차례 전시관련 글을 쓴 적도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근황을 교환한 터여서 작가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아마도 책임패널로 초대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토론을 위해 작가가 재직하고 있는 창현고등학교 미술실을 찾았을 때 미술실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저 주최 측과 알 만한 사람들 몇몇이 자리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작가 개인에 대한 주목과 함께, 지역 작가들과 지역 문화예술 관계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아서 향후 미래가 밝다는 섣부른 생각을 해봤다. 논의 대상으로 올릴 작가를 선정하는 것은 첫 단추를 끼우는 것과도 같다. 이미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내지는 논의를 통해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겠다 싶은 작가 그리고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싶은 작가를 주의 깊게 선정해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은 본 행사의 지속가능성과 함께 성패를 좌우하는 초석일 수 있다.
작업에 대해서 말하자면, 작가는 원래 회화를 전공했다. 그런데도 정작 작가의 작업을 보면 평면보다는 입체, 회화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조각을 전공한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조각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처럼 장르적 특수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정의 형식으로부터도 그리고 재료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다. 그렇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형식의 지점들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조와 시멘트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로부터 스티로폼과 포맥스와 같은 인공 재료에 이르기까지 재료의 사용 폭이 넓은 편이다. 여기에 쭈쭈바나 패트병 같은 생활용품 쓰레기들도 거침없이 들어온다. 여기서 재활용을 통한 재생이라는,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개념이 유래한다. 형식을 보면, 용접(철조)과 깎아내기(목조)와 같은 전형적인 방법에서부터 거푸집을 사용해 조형을 캐내거나 유연한 재료를 사용해 형태를 덧붙여나가면서 확장시키는 식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 진폭이 넓고 유연한 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발굴과 공작성이라는,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또 다른 개념이 도출된다.
이런 형식이며 개념의 지점들이 뒷받침되면서 대개는 그 속에 끈 가닥을 포함하고 있는 집 형상이나 폐허화 된 건축물의 잔해 이미지 그리고 SF나 공상과학만화에나 나올 법한 미래도시 이미지가 조형된다(아마도 유토피아란 이런 미래도시 이미지에서 추상된 것일 터이다). 관계의 개념을 매개로 집으로부터 미래도시 이미지로까지 조형의 외연을 확장한 것이다. 이처럼 집이며 건축 구조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래도시 이미지를 조형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도시회화 내지는 도시유목 담론에 연동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작가의 작업에서 포인트는 공작성 자체로 보아야 하고, 그저 우연한 형태적 유사성만으로 작가의 작업을 도시회화 내지 도시유목에 연동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며, 적어도 도시에 대한 비판적 참여 내지 실천논리가 확인되어져야 하는데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논지였던 것 같다.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만, 단순히 도시를 소재로 한 소재주의를 경계한 것이어서 작가도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반성적인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무길_Color City0901 스티로폼+혼합재료 240X240X130cm 2009
그리고 근작에서 재료로 사용된 포맥스는 그 성질이 유연한 탓에 작가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마음껏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유연한 재료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생각이다. 머릿속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실현시켜준다는 매력과 함께, 자칫 공작성의 재미에 빠져 작업을 기계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재료 자체가 이런 문제점이나 한계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포맥스를 재료로 한 근작에서 이런 기계적인 느낌이나 인상이 드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실은 미덕이지만, 맹목적인 성실은 악덕이다. 예술은 그 생리가 특이하고 까칠한 것이어서 무슨 일처럼, 노동처럼 해서는 안 된다. 성실과 맹목적인 성실을 구분할 일이다. 작가가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어서 하는 소리다. 기왕의 성실한 기질을 생산적인 계기로 삼아 작업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실질적인 계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이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논의하자고 만든 자리여서 나와진 말들이고 생각들이다. 다시 하는 말이지만, 이 공론장이 제안과 시도에 그치지 않고 지역작가를 키울 수 있는 실질적인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종래에는 지역을 넘어서 미술계 전체가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진정한 공론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거듭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