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아, 몸의 정치학, 위반의 정치학
오줌과 침과 피가 흐르는 살 혹은 몸. 여자가 선 채로 오줌을 눈다. 보통은 남자가 서서 누고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서 눈다. 통상적으로 그렇고 상식적으로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여자는 왜 서서 오줌을 누면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 반문은 통상과 상식에 대한 반문이다. 생물학적인 몸 구조가 차이나는 자세의 원인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작가는 이보다는 통상과 상식이 원인이라고 보고 그 원인을 문제시한다.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저렇다거나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사실을 결정짓는 원인은 타고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보다는 관습적인 경우가 많고, 작가는 바로 그 관습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그대로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성결정론과 비결정론, 배설과 쾌락의 문제, 금기와 위반의 문제, 그리고 정상성과 비정상성 논의에 연동된다.

장지아_고형상자_혼합오브제_2007
작가는 그렇게 여자가 눈 오줌을 수거한다. 그리고 오줌나무를 만들었다. 투명한 유리 플라스크가 링거 병을 대신하고 영양제나 피를 수혈할 때 사용하는 투명 비닐호스로 나뭇가지를 대신했다. 그리고 플라스크와 비닐호스에 피 대신 오줌이 흐르게 했다. 알다시피 오줌은 생리현상의 부산물이고, 의학은 생리현상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오줌나무에는 유사의학이 포개져 있다. 그리고 오줌나무 자체에 주목해 보자. 나무에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줌나무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순수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나무지만, 동시에 성을 매개로 한 그리고 생리현상을 매개로 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장지아_오줌나무_설치_2007
그렇게 작가는 상상력을 가동시켜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으로 오줌 꽃을 만들었다. 어항과 같은 수조에 이런저런 오브제들을 세팅해 놓고, 수조를 오줌으로 채웠다. 그리고 오줌을 건조시키면 소금 결정체가 오브제의 표면에 하얀 꽃처럼 피어난다. 그래서 오줌 꽃이다. 아닌 것과 아닌 것과의 결합이 피워 올린 꽃이다.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오줌처럼 혐오스런 물질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여기서 작가는 혐오와 호감, 호와 불호, 미와 추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든다. 그 자체로 혐오감을 주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며 존재 같은 것은 없다.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감정은 상대적이고 양가적이다. 그 원료가 오줌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오브제를 보면 영락없는 소금 꽃이고 성에꽃이다. 여기에 그 꽃이 다름 아닌 오줌 결정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꽃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는가. 꽃에 대한 호감이 불현듯 오줌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기라도 하는가. 작가는 바로 그런 문제, 곧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상대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그리고 두 남녀가 키스하고 있다. 키스는 혀와 혀가 교환되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혀 대신 캐러멜 같은 음식이 교환되고 있다. 혀 대신 캐러멜? 혀도 이물스럽지만 캐러멜은 혐오스럽다. 아님, 혀는 사랑스럽지만 캐러멜 그것도 상대가 질겅질겅 씹은 캐러멜은 밉다. 반전이다. 사랑인줄 알았던 행위가 불현듯 혐오감으로 변질된다. 혀와 혀가 교환되고 침과 침이 교환되는, 그리고 여기에 침이 진득하게 묻어 허물 허물해진 캐러멜이 교환되는 이 장면은 키스일까. 아님, 키스에 대한 환상이 허물어지는 순간일까. 누군가의 키스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누군가의 쾌락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여기서 키스와 캐러멜은 이데올로기의 유비적 표현이 된다. 주체에게 이데올로기는 혁명이며 의미며 쾌락이지만 객체에게 이데올로기는 착취며 무의미며 고통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의식에서 의식으로 전달되는 이데올로기를 입에서 입으로, 혀에서 혀로, 침에서 침으로, 몸에서 몸으로 교환되는 것으로 전유한다. 그 전유를 통해 의식에 내어준 몸의 정치학을 복원(아님 복권?)한다. 그리고 침은 좋을 때도 흘리고 먹을 때도 흘린다. 여기서 작가는 감정을 생리현상과 결합시킨다. 에로티시즘을 카니발과 결합시킨다(내 혀를 받아먹어라?).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서 신체분비물은 오줌과 침을 경유해 피에 이른다. 처음에 작가는 소 한 마리가 흘린 피를 앞에 두고 난감했다. 여전히 따뜻한 피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생명의 것이었을 온기와 생기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꽤나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생기가 기억으로부터 가실 즈음에 작가는 그 피를 되불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되불러낸 피로 벽돌을 만들었다. 벽돌 한 장 한 장은 보잘 것 없지만 집을 짓고 문명을 짓고 세계를 짓는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피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생명의 에너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 기하학적 도형을 만들었다. 수학으로 대변되는 기하학적 도식이 수술을 위해 살에 금을 긋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수학으로 대변되는 이성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런저런 오브제를 만들었다. 꽤나 심각할 수 있는 피로 만든 오브제를 통해 마치 장난감이라도 만들 듯 심각한 것을 유희적인 것으로 상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이것들을 만드는 내내 작가는 피 칠갑을 했다. 소 한 마리가 흘린 피에다가 작가의 하혈이 더해지면서 작가는 그야말로 피와 자신이 혼연일체(무아지경?)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자신이 들어서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순간과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매개처럼 느꼈다. 그 경험은 혹 정화며 자기정화가 아니었을까. 소의 피를 앞두고 처음에 느꼈을 죄책감을 속죄하는 심정이었고,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며 경험이었을 것이다. 피가 불러일으키는 죄책감과 피를 통한 속죄의식에서 어쩌면 예술의 기원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원형적인 제의의식의 희미한 그림자가 엿보인다.
사랑의 도구와 고문의 도구. 한 여자가 매를 들어 한 남자의 엉덩이를 내려친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에서 감지되듯, 그렇게 내려치면서 발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엉덩이에 여자는 연민을 느낀다(실제로 이 작업은 그 포즈와 형태가 피에타를 상기시킨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 매질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다? 혹 남자는 매질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이 작업에서 작가는 혹 가학과 피학,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랑과 폭력, 사랑과 고문의 모호한 경계와 나아가 아예 공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감정을 더 고조시키기 위한 스킬에 대한, 아님 사랑의 표면과는 다른 이면에 대한, 아님 아예 사랑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오리무중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라는 영화(루이스 브뉘엘)도 사랑의 단상이라는 저작(롤랑 바르트)도 있지만, 사랑의 기호는 가장 애매하고 중의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실제로 여자가 손에 든 매의 표면에는 중세의 고문 그림이 아로새겨져 있다. 사랑의 도구(그리고 기술)는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즐길 수 있다. 고문의 도구도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괴롭힐 수가 있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에선 사랑과 고문이 공모하고 쾌락과 고통이 합치된다.
그리고 작가는 노마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한 중국의 한 지방에서 한 꾸러미의 고대 외과용 수술도구 세트를 얻는다. 예나 지금이나 수술도구는 가장 잘 생긴 오브제들에 속한다. 정교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표면에 현대에는 없는 미세 장식마저 부가돼 있는 골동품들이다. 수술도구는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여기서 작가는 엉뚱하게도 수술도구들을 고문도구로 탈바꿈시킨다(여기서 작가는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고, 또한 그 관심은 현실에 연유한 것인 만큼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수술도구의 정교한 생김새에 맞춰 어떤 식의 고문에 사용된 도구인지에 대한 일종의 가상의 상세표를 만든 것이다. 수술도구도 몸에 대한 것이고 고문도구도 몸에 대한 것인 만큼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말마따나 이번에도 도덕적 선입견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고문은 객체에게 고통인 만큼 주체에게 쾌락의 도구인 것이고, 따라서 쾌락의 강도가 도덕의 계율을 위반할 수도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쾌락의 도구(그리고 기술)와 고문의 도구, 수술의 도구와 사랑의 도구는 그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들어진다. 그 도구와 기술의 애매한 경계며 나아가 아예 공모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장지아의 작업은 성과 광기, 성과 권력, 정상성과 비정상성, 불경과 위반, 금기와 터부, 배설과 욕망,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로티시즘과 엑스타시, 쾌락과 고통, 가학과 피학, 의학과 고문, 폭력과 성스러움, 그리고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 같은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거대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미시담론의 층위로 분화해내는가 하면, 미시담론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층위에서의 경험을 거대담론의 층위로 통섭해 들인다. 그렇게 존재가 아로새겨진 몸의 정치학을 가로지르고 위반의 정치학을 가로지른다. 작가의 작업은 특히 젠더 이후 간과된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몸을 부각하고 육질을 부각하면서 이 모든 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호출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호출된 지점 지점들을 감각의 층위에서 일어난 일이며 생생한 사건으로 다룬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현실성을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