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잇다
연결_전개 전(2013년 11월 12일-2014년 2월 28일,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제3,4,5 전시실)
이선영(미술평론가)
‘연결_전개’ 전은 7명의 국내외 큐레이터가 만나서 선정한 7명 작가의 작품 16점을 선보인 전시이다. 다수의 큐레이터가 참여한 국제전이면서, 영상 설치가 중심이 된 이 전시의 기획 의도는 ‘새로운 차원의 융․복합이 가능해진 시대’에 ‘시공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연결_전개’라는 전시개념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시공간적 좌표를 지금 여기에서 맞추어보려는 시도이며, 비슷하면 비슷한 만큼 다르면 다른 만큼 어떤 흐름으로 펼쳐진다. 지구화된 시대의 현대성을 공유하며, 국제적 명망이 있는 7개국의 참여 작가들은 이미 공유하고 있는 현대 미술 언어가 있기에 ‘연결’과 ‘전개’가 가능했다. 그들의 작품은 각자의 특수한 경험에서 기원하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시각적 문법은 보편적이다. 서로 공유하는 국제무대의 경험에 의해, 개별적 차원에서 이미 접합되기 쉽게 가공되어 있는 것이다.
국제 언어로서의 현대미술은 자국어에 기반 한 서사 예술보다는 보편적이며, 몸에 직접 작용하는 음악이나 무용 보다는 특수하다. 또한 대중문화의 주된 수단인 미디어를 통해 익숙해진 시각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데 한 몫 한다. 다른 시공간적 맥락에 있는 것들을 한데 엮어서 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가장 미술관다운 방식이라 할 것이다. 19세기에 현재와 같은 형태의 미술관이 성립된 이래, 미술관은 20세기의 비약적인 정보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상의 진귀한 것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보여주는 주된 제도였다. 이러한 가능성을 더 극대화 한 것이 ‘상상의 박물관’(앙드레 말로)일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 또는 한권의 책속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 정보혁명 시대의 미술관은 엄청난 가능성에 열려있다. 우리의 일상에 편재한 코드화된 소통을 넘어서, 아우라를 물씬 풍기는 실물을 마주하게 하는 미술관은 세상에 보여 진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고 찬찬히 읽어 보도록 한다.
킴 존스(미국)는 길거리에서 행했던 퍼포먼스의 산물을 전시한다. 작품 [양동이와 부츠가 있는 머드맨 구조물]에서 흙이 잔뜩 묻은 구조들은 베트남 전쟁 때 참여했던 작가의 경험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전쟁의 상흔에 대한 치유의 메시지가 있다. 진흙과 나뭇가지 등으로 분장하여 거리를 방황하는 ‘머드맨’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주술사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경계를 넘나드는 전능한 존재인 샤먼은 현대예술가의 정체성으로 선택되었으며, 미술관 벽에 거칠게 그려진 [전쟁 드로잉]은 세상에서 그리고 인간 자신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두 세력 간의 대결을 펼친다. 키시오 스가(일본)는 서로 다른 물질들 사이의 관계성을 관조하도록 한다. 아연판, 돌, 콘크리트 벽돌, 청동 파이프 등으로 전시장을 종횡무진 가로 질러 얽어놓은 날선 구조물에 관객들은 접근하지 못하고 볼 수만 있다. 자연과 인공의 구조물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이루지만, 굳건한 상호결속이 아닌 가느다란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 이 취약한 구조들은 인간이 망쳐 놓을 것 같은 위기감을 준다.
양민하_2013_엇갈린 결, 개입(Intervention, Misalignment)_프로젝터,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조~
제5전시실 외벽에 설치된 양민하(한국)의 작품은 자연과 일견 대조 관계에 놓인 듯한 테크놀로지가 그 정점에서 오히려 자연과 닮아 감을 표현한다. 작품 [엇갈린 결, 개입]은 벽과 바닥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선의 흐름을 보여준다.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은 빛의 흐름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인간이 단지 기술에 대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 속에 잠겨있는 새로운 환경을 상징하며, 이때 기술은 자연의 또 다른 차원으로 나타난다. 자연의 구조적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기술은 ‘실재로부터 과정으로’(화이트헤드) 방점을 이동시켰지만, 그 관계라는 것 역시 허구가 아닌 ‘실재계’(라깡)에 기초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술이자 예술의 산물인 양민하의 작품은 자연처럼 영겁의 시간적 산물인 결을 가진다. 리 밍웨이(대만)는 서로 다른 것들의 관계인 소통에서 치유의 계기를 강조한다. 작품 [움직이는 정원]은 어둡고 차가운 돌바닥이 갈라지면서 형형색색의 꽃이 나오고 관객들은 그 꽃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뭔가 행할 수 있다. 작품 [소닉 블로썸]에서는 관객에게 치유를 부르는 듯한 성악가의 육성을 들려온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의 정점에 놓인 꽃이나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천상의 소리 같은 것들은 소통이 치유가 되기 위한 조건, 즉 인간의 가장 소박하면서도 근본적인 감성을 건드린다.
타시타 딘(영국)의 작품 [필름]은 영상을 실어 나르는 필름을 높이 6.5m, 넓이 3.8m의 기념비적인 크기로 확장한다. 이 초대형 스크린에 흐르는 영상들은 마치 움직이는 회화 같다. 디지털 코드가 지배적인 현재를 거슬러, 흑백 필름 위에 여러 색을 입히고 가위와 아교로 편집한 이 소리 없는 이미지는 영화와 그림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장르와 장르 사이의 간격들은 연결과 전개를 만들어낸다. 마크 리(스위스), 아마르 칸와르(인도)의 작품은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연결망을 소재로 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보르헤스)는 태곳적부터의 상상은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이 보편 내재화되면서 현실성을 획득했다. 생태계는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었지만, 그 또한 긍정적 가능성과 부정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어둠 속의 빛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크 리와 아마르 칸와르의 작품은 네트워크화 된 세계의 명과 암을 변화무쌍하게 또는 잔잔하게 비춘다.
Marc Lee_10.000 moving cities_same but different_2013_interactive Net-Based Installation_ dimension variable_Courtesy~
마크 리의 [10,000개의 움직이는 도시들]은 관객이 선택한 도시를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상호작용적인 작품이다. 어두운 공간 속에 놓여 진 크고 작은 입방체들은 그자체가 하얀 스크린이 되어 관객의 검색에 의해 호출된 도시의 시청각 자료들로 뒤덮인다. 한 도시가 다른 도시로 건너뛰기 전 그 사이의 시공간에 하얀 입방체에 드리워진 그물망들은 우리가 사는, 또는 지나쳐 왔던 도시들의 가상성을 문득 드러낸다. 도시의 소음은 침묵과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은 거대 빌딩을 스크린으로 삼아 흐르는 정보들이 특징인 스펙터클의 시대가 세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아마르 칸와르의 시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작품은 그 나라의 근대화를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모순의 산물이라는 점이 공감을 자아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전통은 세계화를 통해 접속된 힘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제3국의 인간과 자연을 시장과 자원으로만 간주하는 제1국의 행태와 이에 저항하는 민초들이 [최상의 숲]과 [범죄 현장]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된다. 벽 뿐 아니라 오래된 책도 스크린이 되며, 전시장 가득히 설치된 다양한 씨앗들은 완전한 코드화를 통해 수탈할 수 없는 실재를 예시한다. 무엇인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질을 없애고 양화시키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어둑한 전시장은 합리적으로 분류된 것들이 낱낱이 보여 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상 또한 어떤 확실한 기승전결을 가지는 플롯을 가지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빠른 접근과 파악에 대항하여, 약자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은 느릿함과 흐릿함이다. 예술 또한 빠른 상품의 순환주기에 불과한 속도전에서 몸을 뺀다. 그리고 맹목적 생산을 위한 속도에 의해 버려졌던 타자적 가치들과 연대한다. 자연의 순리에 기반 하는 토착문화는 동질성을 강제하는 물질문명에 대한 대항 가치로 재발견 된다. ‘연결_전개’전은 영상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하지만, ‘분리되고 분할된 것들을 다시 이어주는 복합적 사고’(에드가 모랭)인 종교의 본래 의미, 즉 ‘다시 잇다(re-lier)’를 실천한다. 지구화 시대의 제3의 종교를 주장하는 에드가 모랭이 말하듯이, 이 ‘종교’는 ‘심연과 미지를 향해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합리성을 완전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 전시의 다국적 작품들은 그러한 ‘이어주는 사고’를 향해 연결되고 전개된다.
출전; ART:MU(국립현대미술관 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