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우주의 상징

 

이선영(미술평론가)

     

천안예술의 전당 미술관의 기획전인 ‘예술, 봄을 만나다’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아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을 주제로 한 전시로, 13명 작가의 36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 전시에서 꽃은 예술과 봄을 매개한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에서 발산되는 감각적 쾌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의 상징성이 너무나도 자명하여, 꽃은 진부한 소재이자 주제로 치부되곤 하지만, ‘태양아래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에서 진부함은 또 다른 도전의 장이 될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진부함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은 일상적 사물, 특히 키치나 캠프의 미학 등에서 잘 나타나지만, 자연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꽃은 자연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고 그래서 미술의 소재 사상 가장 많이 그려져 왔지만, 자연의 그러하듯이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꽃은 봄의 전령이자 희망의 예견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폭설로 대란이 날만큼 겨울의 위세가 당당한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은 올 것이고, 이러한 계절의 주기성은 일상의 기계적 반복과는 다른 경이로움을 준다. 

 

그러나 꽃은 짧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사라지며, 또 다른 부활을 준비한다. 그것은 대우주의 주기를 압축적으로 반복하는 경이로운 소우주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식물이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한다고 말한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살아있는 우주의 표명으로서 식물이 가지는 힘은 우주적 삶의 현현이다. 식물의 여러 부분 중에서 꽃은 만다라 같은 대칭형 구조를 가지며, 무수하게 접혀진 미로를 통해 그 깊숙한 내부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고대적 심성에서 자연과 상징은 공존한다고 보는 엘리아데는 어떤 의미 있는 존재나 행위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이 하늘의 원형을 지니거나, 행위가 원초의 우주론적 행위를 반복할 때에 한다고 본다. 직선적 세계관에 바탕 하는 근대를 넘어서려는 문화적 움직임이 생겨난 이래, 순환적 세계관은 대안으로 다가온다. 거짓된 새로움과 역사(주의)의 압력에 대항하여, 삶의 순환과 반복을 강조하는 영원회귀의 사상은 식물, 그 중에서도 꽃에 집약될 수 있다. 

 

꽃 한복판에 있는 중심은 자연의 실재를 나타내주기에 충분하다. 그 중심은 어떤 하나의 체계 속에 구조화되기 시작한다. 화면 한 가운데 꽃한송이를 클로즈 업 하는 김상철의 작품은 부분이 전체가 되는 자족적 우주를 표현한다. 꽃 한가운데의 보이지 않는 중심점은 그림틀로서만 한정을 지을 수 있는 중성적 바탕에서 빅뱅을 하는 듯한 활기를 퍼트린다. 화면 가득히 꽃의 무리를 담은 박일용과 박희숙의 작품은 그 양적 규모로 도취적 느낌을 자아낸다. 우주적 꽃은 일상적 차원에서 꽃병으로 갈무리된 모습으로 전유될 수 있다. 꽃을 담는 그릇(器)은 원초적 수용기(코라)로 그 내부로부터 생명력이 부풀어 오르며 급기야는 터져버린다. 여기에서 꽃은 폭발하는 에너지의 총화라고 할만하다. 씨앗이 죽어 새싹이 나듯이, 꽃망울의 터짐은 새로운 세계를 연다. 가국현, 정영모, 오경택의 작품에서 꽃병 속의 꽃은 한정 지워진 전체에서 임계점을 지나 밖으로 폭발한다. 이 소리 없는 이미지에는 폭죽이 터지는 듯한 잠재 에너지가 풀려나온다. 

 

한 두 송이가 꽂혀있는 김동석의 작품은 동양화 같은 균형과 조화를 보여준다. 꽃다발을 그린 박상국의 작품에서 인간에게 소유된 꽃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고정된다. 강구철, 박동인, 현남주의 작품에서 꽃은 실재에서 도출된 추상으로 패턴화 된다. 꽃의 생명력은 형태와 색채의 리듬으로 재배치한다. 원형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꽃은 핵심적인 구조로 압축된다. 꽃은 생물학적으로는 양성이지만, 인류의 상상력 속에서 여성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것은 재생산의 영역에 묶여있는 여성이 문명(문화)가 아닌 자연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풍요의 원천으로서의 자연=여성이라는 상징화는 억압과 숭배를 동시에 발생시켰다. 하얀 꽃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테이블 보 앞에서 하얀 드레스입고 양산을 바치고 있는 여인을 그린 김일해의 작품은 원형적 미의식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여성이다. 화사한 꽃나무를 배경으로 외출하는 여자를 그린 신철의 작품은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설레임으로 봄과 여자의 관계를 표현한다. 

 

꽃과 (젊은)여성은 미의 집약체이다. 사람들은 미술과 미학을 몰라도, 꽃과 여성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고대 이래로 건강한 젊은 신체에서 쾌와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보편적이었다. 동양에서도 회춘(回春)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봄꽃은 젊음이고 아름다움이다. 전시장은 다양한 꽃이 다양한 양태로 피어있다. 꽃(그림)을 봄이라는 계절의 주기에 맞춘 이 전시는 제의의 후예로서의 예술의 위상 또한 알려준다. 제의 또는 축제와 달리,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그 이후에 생겨난 예술은 참여적 요소보다는 관조의 요소를 강조하게 되며, 그것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액자 안에 안치된 꽃그림이 미술의 관객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인류학과 종교학에는 여름과 겨울의 싸움이라는 제의와 축제의 예를 수없이 보여준다. [종교사 개론]에 의하면 겨울의 패배를 알리는 제의는 만물이 비롯된 때에 벌어졌던 원초적 행위의 반복이다. 그것은 식물의 생식력과 생명력을 촉진하는 하나의 제의로, 봄의 도래를 알리는 우주적 사건의 경축이라는 공통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 

 

봄의 출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의는 자연의 재생과 새 삶의 시작, 즉 새로운 창조의 주기적 반복을 명백히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제인 해리슨은 [고대 예술과 제의]에서 의례에 있어서 시기적 고정성과 정기적 반복, 곧 주기성의 두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이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것은 식량의 수급 때문이라는 원초적 진실이 깔려 있다. 인류학자 프레이져가 말하듯이 ‘사는 것과 살게 하는 것, 음식을 먹는 것과 아이들을 낳는 것, 이런 것들은 과거로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다. 이러한 욕구를 인정한다면, 계절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태도는 식량 공급을 걱정하는 정서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렵과 농경 이전에, 숲속의 도토리에서 최초의 식량을 구했던 인류에게 꽃은 열매의 전조이면서, 가혹한 시기인 겨울이 지나갔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그래서 겨울을 물리치는 봄 축제는 매우 중요했고, 꽃의 피어남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적 주기를 알려준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은 죽음을 전제하고, 피어남은 또 다른 죽음을 준비한다. 

 

가냘픈 꽃들은 그 짧은 순간을 강렬하게 증거 한다. 그것은 제의의 출발이 된 신성한 것의 희생, 또는 죽음으로서 신성해지는 어떤 존재를 알려준다. [고대 예술과 제의]는 이러한 신성함이 원시인에게 곧 특별한 힘과 생명을 주었다고 말한다. 제의를 통해 특별한 생명과 힘 전체가 강렬하게 소망되었다. 죽음과 소생의 반복을 제의적으로 재현함으로서 인간은 ‘우주적 생명의 원천과의 재접촉’(엘리아데)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 우주적 모태로의 회귀를 말한다. 꽃은 삶과 죽음, 새로움과 낡음의 영원한 반복적 이행과 전환을 상징한다. 엘리아데는 봄이 우주적 삶의 부활이며, 따라서 인간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한다. 모든 재생은 그때마다 새로운 탄생이며, 재생되는 형태가 처음으로 나타난 신화적 시간으로의 회귀이므로, 사람들은 우주 창조의 원초적 행위를 반복한다. 따라서 꽃은 영원히 축성될 것이고, 또한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속의 차이)는 존재의 무한한 연장이나 지속이 아니라, 해탈을 말한다. 꽃은 덧없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깨달음을 주는 도상으로 승화된다.

 

출전; 천안 예술의 전당 미술관(천안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