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금메달

 

이선영(미술평론가)

     

얼마 전에 끝난 동계 올림픽 기간 중 온 국민의 관심사가 쏠린 분야는 김연아 선수가 출전한 여자 피겨 스케이트였을 것이다. 온 국민의 카타르시스의 장이 되어야할 무대가 석연찮은 판정 때문에 통탄스럽게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당사자가 120%의 역량의 발휘했다고 자평했다는 점에서 아쉬움 없는 마지막 무대였으리라 믿는다. 김연아 선수에 몰린 대중의 관심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현실에는 스포츠 인구만큼이나 미술 인구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술은 스포츠만큼 뜨겁지 않다. 극도로 타자 화 된 미술 분야에서는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지는 이러한 큰 무대가 부럽기도 하다. 대중들이 게임 원칙을 공유하고, 같이 즐기며 땀의 대가가 충분한 보상을 받는 그 객관적이면서도 화려한 무대 말이다. 미술에도 금메달이 있을 수 있을까. 미술 역시 국내외를 통틀어 수도 없이 열리는 비엔날레나 그에 준하는 큰 무대들이 있고, 거기에 참여하는 소수의 선택된 작가는 나름 ‘국가대표’로 대접을 받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들이 만들어낸 산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공유되기 힘들다. 일반 대중은커녕, 미술계 종사자들끼리도 냉소적이다. 

 

예술 분야의 어려움이 그 구성원들의 극도의 피해의식을 낳고, 예술 분야의 그 자부심이 그 구성원들의 극도의 자기중심성을 낳기 때문이다. 미술 역시 탁월한 전문적 역량이 발휘되어야 하는 분야이면서도, 스포츠처럼 보편화될 기회가 별로 없다. 전설처럼 남아있는 서양미술사의 천재들을 되뇌이는 문화 교양 및 교육의 장, 또는 가끔 들려오는 스캔들 수준의 천문학적 작품 가격이 미술의 존재를 확인해줄 뿐이다. 한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다는 현대미술가 백남준도 그의 예술 자체가 이해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게임원칙이 공유되지 않으니 무엇이 혁신이고 창조인지 판단할 수 있는 관전 포인트나 관전의 즐거움도 누리기 힘들다. 산천에 꽃이 피고 지듯 누가 봐 주지 않아도 미술은 계속될 것임을 믿어야 할까. 그것은 단지 스포츠와 예술 분야의 차이로 수긍하면 되는 문제일까. 그러나 스포츠와 예술은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피겨 스케이트 부문의 경우, 기술점수 외에 예술점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양자는 모두 뛰어난 경쟁자 뿐 아니라 스스로와도 싸워야하는 고독한 게임이다. 생애 마지막 큰 무대에서 김연아 선수는 배경음악도 관중의 환호성도 모두 밤하늘별처럼 괄호 친 채 홀로 자신에 집중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자신과의 그 치열한 게임 이후에 환호하는 관중과 사회적 관심, 그리고 그에 따른 충분한 물질적 보상도 따라 온다. 결과의 화려함만을 부러워하는 이 심정에는, 가혹한 훈련과정이나 ‘관련업계’의 부조리 등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요즘 미디어에서는 실력이 아닌 파벌로 결정되는 체육계의 부조리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김연아 선수의 무대를 보며 새삼 느낀 것이지만,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는 플러스 알파의 영역, 즉 예술이라 할 수 밖에 없는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예술’이 현대적이라 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발레나 피아노 연주처럼 고전적이다. 여기에서 ‘고전적/현대적’은 가치의 우열이 아니라, 형식의 차이를 말한다. 고전적 예술은 정해진 아이템들이 있고 그 조합을 어떻게 탁월하게 수행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이루어진다. 물론 그 아이템들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서 아무나 할 수도 없고, 안무가 완성된 후 수 백번 수 천 번을 반복해서 연습해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난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감스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끝나서 후련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김연아 선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고전예술과 달리, 그 정해진 아이템이라 할 만 한 것이 없다. 미술을 미술로 규정하는 것은 ‘미술계’(아서 단토)의 인정이라는 느슨한 틀밖에 없다. 여기에서 거대한 사기의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현대예술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물론 그 어느 것도 무에서 창조되지는 않는다. 무한 자유를 구가하다 못해 소통 불능에 흔히 빠지곤 하는 현대예술 역시 세계로부터 수많은 원천을 얻는다. 그러나 예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이나 기량은 이제 장인이나 관련업계 종사자의 몫이 되었다. 현대 예술은 보편적 대중과의 교감이 가능할 만한 각종 규칙들로부터 자유롭지만, 너무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한 자유는 다시 예술의 발목을 잡는다. 예술 분야의 구성원들이 다른 분야만큼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만이(또는 그들 역시) 겪어야 하는 고난은 분업 사회의 부조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전에는 노동자, 지금은 예술가들이 겪는 고난은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편화된다. 소수의 문제는 다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인 노력이 결합되어 결정되는 직업의 세계에서 진정한 분업이 가능하려면, 서로 다른 분야의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한마디로 열심히(잘) 그린 그림으로 열심히(잘) 만든 빵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장정일 시인이 언젠가 썼던 칼럼처럼 ‘시를 쓰는 것은 왜 job이 될 수 없는 가’를 묻고 싶다. 이러한 어려움이 제도적 형태의 예술 직종에 대한 맹목적 욕망을 낳는다. 돈도 벌고 예술도 하다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두 가지가 동시에 충족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달리 현대사회의 소외가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안정을 택하든 불안정을 택하든 그 대가는 쓰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술의 자율성이 성립된 이래, 급격한 근대화를 이룬 한국사회에 몰아닥친 물신화와 쏠림현상이 예술에 매우 적대적인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은 지적할 수 있겠다. 눈가리개를 한 채 앞만 보고 달려온 경주마 같은 한국 사회에서, 옆길로 새는 것을 의미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부당한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 위영일이 창안한 캐릭터 ‘짬뽕맨’은 헐크, 슈퍼맨, 플래쉬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등 여섯 가지 만화 캐릭터를 조합한 것으로, 보다 나은 경쟁력을 위해 갖춘 자질들이 영웅을 넘어 괴물의 수준에 이르는 현대문화를 풍자하는 듯하다.)

 

한편 현대화를 통해 모든 부문의 제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예술 역시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된다. 예술인 복지제도부터 작업실과 전시에 대한 지원까지 모든 것이 어떤 기준의 통과를 요구한다. 이 기준의 충족을 위한 계의 구성원들의 노력이 가열 차졌다. 예술에도 어떤 공유된 게임원칙을 가지고 전력 질주를 하는 스포츠나 과학 분야 못지않은 경쟁이 있다. 스포츠 게임을 보면서 갑자기 예술이 생각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계의 그 경쟁은 너무도 치열해서 소수점 단위의 기록을 갱신하기 애쓰는 선수들에게서 비인간적일 만큼의 인간승리는 느껴질지언정,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는 점, 경쟁을 위한 경쟁이 마치 생산을 위한 생산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 같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한 동일성의 진리가 가장 잘 관철되기에 스포츠나 과학은 그렇게도 인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삶을 지배하는 이런저런 불공정 게임과 비교한다면 공정하다 못해 정의롭기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스포츠나 과학 분야에서 진보가 가능한 것은 다수가 공유하는 게임 원칙과 언어의 통일, 그리고 그것으로 가능한 생산력의 증가 때문이다. 그것들이 가지는 반복가능성, 호환성, 분업화에 용이한 방식 등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현대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매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지배적 패러다임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가령 가장 객관적인 언어로 보이는 과학 기술 역시 사회문화적 서사에 물들어있고, 그 필요가 선택(결정)되는 것도 정치경제학적인 맥락에 따른다. 과학은 물론이거니와, 맨몸으로 노력만 해도 될 것 같은 스포츠 역시 개인적, 국가적, 과학적 시스템의 총화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예술 역시 계의 구성원들이 거의 확정되다 시피 한 게임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그 경쟁에 몰두한다. 그래서 다양한 가치들이 꽃피워야할 예술계에서는 전에 없던 선형적 질서가 생긴다. 예전에는 미술대학이나 공모전 정도가 이러한 계층화의 몇 안 되는 예였지만, 요즘은 경쟁을 뚫고 취득해야 할 ‘스펙’의 아이템들은 많아졌다. 경쟁이 학교라는 틀을 벗어났다는 나름의 성숙을 기뻐할 틈도 없이, 무한경쟁을 낳는 ‘스펙’들의 최종심급은 결국 학교이고, 사실은 학교가 ‘스펙’들 간의 연동관계를 추동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의 예비고사/본고사 시절보다 무한히 다양한 대학 전형방식이 있지만, 경제력에 의해 기본적인 계층구조가 결정되는 경향은 더 강해지기조차 했다. 더 많은 의무사항이 생겨나고 그것을 취득하기 위한 경제력과 인내력의 게임이 예술적 영감과 창조의 자리를 차지해 간다. 그 아이템들을 한 바퀴 얼추 돌 때쯤 되면 파릇한 젊은 시절은 모두 가버린다. 성숙, 또는 철듦이라는 미명으로 지배 체계의 논리가 내면화되고 타자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는 세대가 된다. 전문 분야가 보편성을 획득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이런저런 제도의 특혜를 따내는 일로 대치되는 것이다. 스포츠나 과학 분야, 즉 게임 원칙이 공유되기에 명백히 그 진보를 측정할 수 있는 분야와 다를 수밖에 없는 예술 고유의 특징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포츠나 과학 분야만큼의 보편성은 확보하지 못한다. 이도저도 아닌 이 상태를 예술 고유의 불확실성 탓으로 돌리기는 싫다. 빅리그가 가지는 동질화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예술은 배리(pataphysics), 즉 ‘예외를 관장하는 법칙의 과학’(알프레드 자리)을 따라 자신만의 미적 유희로 동질적 게임원칙을 위기에 빠트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전; ART: MU(국립현대미술관 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