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외연(外延) 속, 예술적 내포(內包)

최소한의 최대한 전 (2.28--4.27, 화이트블럭 아트센터)

 

이선영(미술평론가)

     

미술관 풍의 멋진 건물들이 많은 그림 같은 동네 헤이리, 그곳에는 많은 전시공간이 있었지만, 현대미술 쪽으로 활성화 된 곳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그곳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창밖으로 예쁜 풍경이 보이는 맛있는 와플 집이나 웨딩사진을 찍는 포토 존 같은 달콤한 소비문화가 점점 강세를 보이는 것 같다. 한때 미술 전시의 메카였던 인사동이 싸구려 풍이라면, 그곳은 좀 더 고급스러운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 문화와 예술은 명확히 구별되기 힘들지라도, 소비와 생산의 관계처럼 차이는 있다. 문화가 소비 시스템의 산물이라면, 예술은 시스템 자체의 생성과 관련된다. 그래서 황무지 같은 곳에 먼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고 난 후, 서서히 소비문화에 자리를 내주는 과정은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곤 한다. 소비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라면, 생산은 에너지를 투입해야하는 과정이다. 예술은 언제 결실을 맺을지 모를 무한한 투입의 과정이기에, 현실화되기도 유지되기도 힘들다. 현실 속 예술의 비좁은 입지를 생각할 때, 예술은 외적인 규모와 체계보다는 내적인 밀도와 강도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양이 질로 전화되는 순간, 언제나 예술적이라 할 만 한 것은 분명해 진다. 

 

헤이리에서 외관은 예쁘지만 굳이 들어갈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미술관 급의 전시 공간을 보유함과 동시에, 비중 있는 기획전을 꾸준히 펼쳐왔던 화이트 블럭 아트센터가 돋보이는 이유이다. 그곳에는 문화의 외연(外延) 속, 예술적 내포(內包)가 있다. 특히 이번에 열린 ‘최소한의 최대한’이라는 전시주제는 작은 기회도 크게 활용해야 하는 예술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이 전시는 예술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에 최대한의 세계가 담겨 있어야 할 당위성을 충족시킨다. 잠깐의 달콤함 뒤의 긴 공허함만 확대 재생산하는 스펙터클의 문화와 다른, 예술의 특성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참여 작가인 오윤석, 이강욱, 정승운은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작품의 인터페이스가 심플하고 매혹적이면서도, 그 내부에 많은 것이 접혀있다는 점이다. 그 밀도가 무식한 노동력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그 내부에 펼쳐진 세계들은 광대하다. 거기에는 ‘최소한’에 해당될 만한 형식들이 있다. 그러나 그 ‘최소한’은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한 공허한 파편이 아니라, 세계를 작품이라는 소우주에 오롯이 담아낸 충만한 단편과 관련된다.  

 


이강욱_Invisible Space-14024_mixed media on canvas_90x146cm_2014

    

미술관 초입에 설치된 이강욱의 작품은 미세한 입자들과 겹겹의 층들로 밀도 있는 화면을 구축한다. 시공은 하나의 화면으로 압축되고 서로 다른 것을 지시하는 기호들은 융합된다. 크고 작은 표면들을 도포한 작은 투명 구슬들 아래에 비춰진 세계는 세포질 같은 미시우주와 은하계 같은 거시우주이다. 그리고 양자는 한 화면에서 중첩된다. 양 극의 우주가 일치한다는 이러한 신비적 사고는 르네상스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은 신과 무한한 우주에 대해 감싸면서 감싸이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카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르네상스는 인간은 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자아는 세계에 대하여 둘러싸이는 동시에 둘러싸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강욱의 작품에는 현미경과 망원경 같은 과학적 시점이 포함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차원의 교감과 조응은 그 아름다운 세계의 원인과 목적이 있을 것만 같은 고풍스런 세계관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은 우주이고, 우주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유동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이 매혹적 우주에서 유기물과 무기물, 물질과 정신, 안과 바깥, 나와 세계라는 비유도 파생되어 나온다. 혼합매체로 이루어진 다층적인 화면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질서에 의해 줄줄이 엮여 있는 다차원적인 유비(analogy)의 그물망을 작동시킨다. 인간과 자연, 소우주와 대우주는 유비의 관계로 엮여지는 것이다. 주체가 객체를, 그리고 객체가 주체를 감싸 안는 이 유비의 세계관을 통해 예술가가 자신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확산의 또 다른 중심이 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우주적 실재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직관할 수 있다. 우주 속 미소한 존재인 인간은 언어라는 관념적 질서를 통해 세계를 전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예술로서의 이강욱의 작품은 하나의 중심을 반영하는 유리의 방을 넘어서, 다중심의 우주 또한 예시한다. 일정 간격으로 붙여놓은 손바닥만한 작품들은 미니멀리즘처럼 전체와 부분이라는 계층적 구조를 해체한다.  

 


정승운_공제선(detail)_가변크기_실위에유채_2014

    

빨래 줄처럼 공간에 늘어져 있거나 누런 종이에 죽죽 그은 선들로 이루어진 정승운의 작품은 그림이 가질 수 있는 최소의,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감축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회화로 번역한다면 이러한 형식이 될 듯도 싶다. 화가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너무 많은 의미로 선점되어 있는 캔버스에서 뽑아 낸 선위에 정승운은 ‘그림’을 그렸다. ‘한 알의 모래에서 하나의 세계를 본’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한 올의 실에 세계를 담았다. 줄 타는 광대에게 가느다란 줄도 길처럼 넓고 편하듯이 선위에도 그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설치미술이 아니라, 유화작품들이다. 남들은 잘 안 쓰는 재료와 괴상한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독특하게 건 것이다. 그림들은 중력에 자신을 의지한 채 그렇게 공간에 ‘걸려있다’. 줄 가운데에 가장 도톰하게 물감이 몰려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바탕 처리도 안 된 빈 캔버스 재료가 드러난다. 하나하나의 줄에는 하나하나의 작품, 또는 정념이 압축되어 있어서, 하나의 올을 선택할 때 마다 생생하게 되살려지는 특정한 시공간이 있다. 

 

정승운의 작품에서 하나의 줄은 하나의 세계이지만, 그 세계들이 어떤 특정한 관계망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벽면에 걸린 또 다른 작품들이 한정된 표면 위에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의 줄을 그어 보겠다는 규칙을 적용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집스럽게 관철시킨 하나의 규칙이지만, 그것은 어떤 선택도 피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캔버스를 이루는 구성 요소에 무언가 그리긴 그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종이 위에 연필로 무엇인가 빼곡하게 쓴 것 같은데,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작가는 최소한의 선택에서 최대한의 뉘앙스를 살려낸다.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었지만, 그 각각은 모두 다르다. 거기에는 반복 속에 차이가 선명하다. 이 무관계성의 세계를 통해 정승운은 인간의 많은 오류가 서로 구별되는 것의 동일시에서 옴을 깨우쳐 주는 듯하다. 사물의 질서와 사고의 질서의 동일화하려는 사고는 폭력적이다. 최소한의 선택에서 파생된 그의 작품은 침묵아래 놓인 사물을 손쉽게 관념으로 재단함으로서 생겨나는 폭력성을 피해간다. 

 


   오윤석_4분33초(hidden memories), 4분33초, single channel video, loop, 2012

 

멀리서 보면 표면을 단조롭게 도포한 단색 추상화 같은 오윤석의 작품은 극과 극이 만나는 카오스모스의 장이다. 그는 전형적인 그림 크기의 공간에서 시간을 가속시킨다. 빠른 속도가 오히려 정지 감을 낳듯이, 그의 작품에는 ‘극의 관성’(폴 비릴리오)이 있다. 시간의 가속화에 의해 공간이 축소되어 이것과 저것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이 세계는 비활성의 무질서에 머물지 않는다. 여러 차원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차원들이 융합되면서 생겨나는 것을 중시한다. 전시장 조명과 어우러져 고상하고 은은한 화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에서 침묵과 수다, 형상과 문자, 정지와 움직임, 관념과 몸,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 색채와 형태, 빛과 어둠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교차되어 이루어진 세계이다. 하나씩 끌어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은 중층적 화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경전을 필사한 것 같은 조밀한 흔적이다. 

 

오윤석의 이전 작업을 떠올려 볼 때, 요즘의 작품 역시, 쓰기와 종교적 수행을 일치시킨 사경(寫經)과 관련된다. 경전을 베끼는 고독한 수행자에게, 자연은 책이고, 책은 자연이다. 그림이 만약 소우주라면, 그의 작품은 또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상상했듯이 신의 서명(signature)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로 가득한 책으로서의 세상을 연상시킨다. 자연이 위대한 책이라면 ‘지표들은 복잡한 증후들’(에코)이다. 시간을 두고 겹쳐 씌여진 양피지 책처럼 단절과 연결을 반복하면서 무한한 해석을 추동한다. 전시장 벽을 무심히 장식하는 듯이 보이는 그림들은 무한한 해석을 낳는 유한한 표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hidden memories]이라는 제목은 주어진 시공간에 압축했을 파일들을 풀어볼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주어진 공간과 시간을 가득 채웠을 끝없는 쓰기는 투명한 의미가 아니라, 불투명한 질료로 변화된다. 물질이 에너지가 될 수 있듯이, 질료는 다시금 형태가 될 수 있다. 첨단과학에서 고도의 집적기술이 보다 큰 유연성을 낳듯이, 밀도는 서로 다른 존재 태들 간의 호환성을 낳는다. 

     

출전; ART: MU(국립현대미술관 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