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현대 사이의 연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공식적인 바깥과 사적인 안으로 대조되곤 하는 현대인의 삶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개인의 연장으로서의 가족, 이렇게 연장된 단위들이 이해관계를 통해 느슨하게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삶의 기본전제가 아니라, 목표가 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생물학적 욕구와 심리적 요구에서 출발한 인간관계든, 상징적 욕망으로 추동되는 이해관계든 그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공/사적 영역에서 긴장을 느낄 수 없는 부류란, 안과 밖을 상보적으로 통일시킨 행복한 삶과 둘 다 망가짐으로서 경계자체가 와해되어버린 불행한 삶일 것이다. 상보적 통일이래도 결국은 공적인 삶의 성공을 통해 사적 영역이 보호되고 유지될 뿐이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그 반대의 방향(사-->공)은 극적 사건이 되어 대중문화나 예술의 소재가 되곤 한다. 예술처럼 공/사적 영역의 역량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삶은 그자체로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다. 더구나 사적 영역의 담당자로 간주되어온 여성이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안 Interior_와이어끈,철망_가변설치_2014, 송은아트큐브 전시전경.
최성임의 ‘미묘한 균형’ 전은 작품으로만 환원된 어떤 자율적 전문 영역에서 달성되는 조형적 균형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는 완성도 높은 형식미가 있지만, 그것은 작품의 표피적 인상에 불과하다. 한 영역을 배제시킨 ‘조형적 균형’이란 공/사적 영역간의 모순을 타자에게 전가시킨 일방적 게임일 공산이 크다. 그러한 위선적 게임은 종국에는 자기모순에 봉착하여 자신이 희생시킨 타자만큼이나 고갈된다. 해결되기 힘든 영역들 간의 모순이 더욱 격화되기 마련인 현대 예술에서, 휴일의 소풍 같은 여유로움은 발견하기 힘들다. 조화와 화해보다는 긴장과 모순으로 점철된 현대예술(가)의 그 특유한 초상은 예술이 짊어져야하는 원죄가 아니라, 사회에 편재하는 불행이 예술에 전가된 결과일 뿐이다. 최성임에게 균형은 보다 절박한 요구, 즉 작가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미묘한 균형’이라는 전시부제는 이 조건이 어떤 도덕적, 사회적 당위에 의한 자명성이 아니라, 미묘하게 따라서 예술적으로 성취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작가가 잡아야할 미묘한 균형은 일상과 작업 사이에 있다. 일상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 또한 삶에 귀속되는 것이지만, 양자는 결코 동일시되지 않는다. 일상과 예술의 동일시가 아니라 일상에 대한 예술이 중요하다.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을 동일시하는 손쉬운 선택이 대중 추수주의적 ‘예술’이나, 예술 관련 업계의 ‘견고한’ 직장에 대한 선망을 낳는다. 이 전시는 그 모두를 거부한(또는 거부된) 상황에서의 미묘한 균형은 무얼까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법이 있다. 작년에 열린 ‘은신처’ 전(갤러리 소머리 국밥)과 ‘missing home’ 전(정다방 프로젝트)처럼, 이번 전시에도 ‘집’이 등장한다. 요 몇 년간의 최성임의 전시에 자주 등장하는 집은 ‘여성-가정’이라는 ‘자연스러운’ 연관 고리로 엮이지 않는다. 사실 여성(남성도)이 가정에 충실하려면 예술을 그만두는 것이 맞다. 예술은 역량과 의지를 가진 이들이 전력을 다해 가까스로 성취하는 것이지, 삶에 덧붙여진 장식이나 잉여가 아니다.
최성임에게 집은 작업이 시작된 일상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 즉 원형적이고 존재론적인 영역이다. 이 전시에는 두 채의 ‘집’이 경쟁하듯이 서 있다. 색깔이나 형태면에서 대조적인 하나는 [겉]이고 다른 하나는 [안]이다. [안]은 흔히 빵 봉지를 묶는 금색 줄 수천 개를 위아래로 연결해 무대의 안과 밖을 구축한다. 그 안에 금박지를 붙인 나무로 지붕 또는 밭고랑 같은 형태가 놓여있다. 뾰족한 지붕은 집의 상징적 얼굴이며, 밭고랑은 텃밭을 일구듯이 보살피고 키우는 삶을 나타낸다. 그 주변을 직사각형으로 감싸는 번쩍이는 금색 줄은 어떤 과도함을 말한다. 금색은 ‘일상의 빛깔’로 호출된 것이다. 금색의 본래 기원인 고귀함에 대한 역설적 반전이다. 중세시대의 성화처럼 온통 금빛 우주를 채우는 사각형 구조는 일상의 테두리를 장식하는 황금빛 액자가 된다. 귀한 것을 흔하게 사용했을 때, 화려함과 성스러움은 천박한 물질주의로 전화한다.

겉 Exterior_폴리카보네이트, 쇠파이프, 나무_가변설치_2014, 송은아트큐브 전시전경.
일종의 연금술이 행해졌지만, ‘현자의 돌’ 대신에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는 현자를 겨냥한다.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것은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반짝거리는 것으로 변모시키는 스펙터클의 문화이며, 그것은 모조와 현혹의 장이다. 하얀 빛으로 가득한 중성적 공간인 [겉]은 [안]의 끈적거리는 속물적 기운을 일소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구조에서 연상되는 기계적 기능주의와 기술지상주의, 명확함과 투명함, 순결과 청결은 추상적이고 공허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도 예술 또는 삶의 미묘한 균형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반면 [안]의 금색은 일상으로부터 오는 ‘반짝이는’ 영감이자, 누추한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때 많이 활용된다. 근대에 탄생한 황금빛 키치는 추상적 관념으로 고갈된 현대 예술에 꾸준히 영감을 공급해왔다. 금색 줄은 작가가 최초에 영감을 받은 금줄 무늬 벽지로부터 온, 일상을 장식하는 값싼 모조물을 상징하며, 그것을 위아래로 묶는 수행성은 일상을 지배하는 기계적 리듬을 패러디 하는 무한 반복이다.
그러나 최성임의 작품에서 반복은(그리고 반복이 행해지는 일상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영겁회귀의 사상, 즉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삶의 가장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을 정도의 성취적 삶을 살아야 한다’(니이체)는 긍정의 사상이 포함된다. 작가의 현재를 있게 한 모든 과정은 긍정된다. 여기에서 예술과 삶은 양자택일 중의 한 사항이 아니다. ‘영원히 이루어지는 회귀’는 동일한 중심이 아니라, 약간의 차이를 둔 곳을 향한다. 일일이 손으로 묶어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를 연결하는 금줄도 완벽한 수직이 아니다. 5도 정도 어슷한 수직선은 그 반짝이는 꼬임으로 정중동의 느낌을 준다. 일상의 기계적 반복은 예술의 반복적 수행에 의해 차이를 형성한다. 그것은 구별되는 것들을 연결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작가를 옭죄였던 아파트의 싸구려 벽지 무늬는 장맛비처럼 대지와 집이라는 삶의 터전을 침수시킨다. 수천 개의 금색 줄들은 일종의 무대 막을 만들지만, 공적인 상연의 무대가 되기도 불완전하고, 그렇다고 그 내부를 완벽히 가리지도 못한다.
그것은 무대처럼 한 면만 강하게 들어가는 조명 빨로 어둑한 구석을 만들며, 전시장 벽면에 떨궈진 그림자는 무한한 주름을 만들어낸다. 삶의 터전을 감추면서 보여주는 금색 무대 막과 전시장 벽 사이에 붙은 드로잉과 사진은 일상과 예술 간에 설정된 반복과 차이가, 끝없이 밀고 밀리는 해안가의 파도 사진, 매번 다시 구축되고 허물어지는 설탕벽돌집, 매번 다시 씌여지고 지워지는 글자들로 형상화된다. 특히 둥글둥글하거나 뾰족뾰족한 선들을 집적한 섬세한 드로잉은 반복과 차이의 결정체로 다가온다. 폴리카보네이트라는 임시건축용 재료로 구축된 하얀 집 [겉]은 삶의 터전을 둘러싼 황금빛 [안]과 정 반대의 이미지이다. [겉]은 견고해보이지만, 껍데기만 덩그러니 서있는 양상이다. 6미터 높이로 지어진 이 ‘집’은 무색무균의 실험실이나 세속과 단절된 성소를 떠오르게 한다. 그 안에 있는 하얀 설탕은 삶에 에너지를 공급할지언정 그자체로는 정제된 추상이며, 마치 의료기기나 실험 도구처럼 보이는 유리 용기에 의해 실체화된다. 각설탕으로 만든 집을 녹여낸 작가의 이전 작업을 떠올려본다면, 그것은 구체로 상승해야 할 추상적 상태를 말한다.

from The Golden Blanket_ 종이에 연필_47x64cm_2012
예술적 실험의 모범이 되는 과학적 실험이란 모든 외적 조건을 차단한 채 정해진 몇 가지 항수와 변수의 조합을 통해 그 보편성과 생산성을 보증 받는다. 여기에서 기본요소로의 환원은 필수적이다. 인간을 포함한 어떤 생물체의 서식도 허락지 않을 냉랭한 빛으로 가득 찬 무색무취의 공간은 유치찬란한 일상의 낙진들로 가득한 [안]과 대조적이다. [안]은 어떤 위치에 서면 한눈에 광경이 들어오는 인간적 규모를 가지지만, 정면적 시선이 통과하는 지점 외에 다른 들고나는 구멍이 차단된 [겉]은 어디에서도 전체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겉]은 전시장 계단 위에서 보면 천정만 보이고 아래에서 보면 몸통 일부만 보인다. 현대적 삶을 지배하는 추상적 체계는 이처럼 있으면서도 없다. [안]과 [겉]은 그 단어의 의미만큼이나 대조를 이루지만, 작가는 이 안팎의 대조를 통해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안과 겉은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차이는 유지되면서도 연결되어야 한다. [겉]과 [안] 사이에, 상단에 레몬색을 칠해 감지하기 힘들만큼의 차이를 암시한 선반 형태의 작품 [두개의 문]은 차이나는 것의 미묘한 균형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최성임의 작품에서, 깔끔한 형식을 갖춘 [겉]에 필요한 것은 내실이며, 잡다한 것이 느슨하게 병렬된 [안]은 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온전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안]과 [겉]이 다 필요하다. 그래서 양자는 서로를 요구하면서, 그렇게 나란히 서있다. 최성임의 ‘집’은 온전한 하나가 아닌, 그것이 되기 위한 조건과 여정을 다룬다. 불완전한 [안]은 아늑한 은신처가 아닌 감옥이 되고, 불완전한 [겉]은 합리적 구조가 아니라 불모의 추상적 체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안도 바깥도 아닌 중간의 지대를 설정하였으며, 드라마는 이 잠재적 공간에서 벌어진다. 이 잠재적 공간에서 집은 주체 안에, 주체는 집 안에 기거하는 존재의 지형도가 펼쳐진다. 그러나 작가가 관객에게 전하는 미세한 힌트를 감지 못한다면, 그것은 접혀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안]이든 [겉]이든 집을 이루는 요소들이 선택, 취합된 구조는 구별되는 것들이 이어지는 장이다. 겉과 안이라는 공간적 비유는 일상과 예술, 인공과 자연, 세속과 성스러움, 세계와 나, 동일자와 타자, 삶과 죽음 등의 비유로 확장된다.

from Missing Home_ 사진_14x9cm_2013
최성임에게 ‘집’은 자신이 포함된 무한한 존재의 사슬을 가능케 하는 다산적 지점(또는 시점)이다. 그것은 어느 한 항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양자 간의 끊임없는 이행과 순환을 말한다. 특히 이 전시에서는 강력한 두 구조 사이에 있는 작은 사진과 드로잉, 그리고 사물의 역할이 크다. 그것은 우주화 된 공간 바깥의 존재들을 말하는 것으로, 구조를 가능하게 하고 구조간의 관계를 가늠케 하는 미지의 미세한 영역이다. 여기에는 서로를 서로에게 열어놓는 트임이 있다. 그것이 가지는 잇는 역할은 작가의 이전 작업과 현재 작업 간의 잇기에도 해당된다. 이 매개의 지대는 일상성과 현대성이라는 구별되는 가치의 관계망이 활성화된다. 파도, 드로잉, 글자, 텃밭, 무엇보다도 8천 번 이상 행해진 반복된 노동이 있는 [안]이 일상이라면, 어떤 인간적 온기도 배제한 채 드높이 솟아있는 기념비적 구조물인 [겉]은 비까번쩍한 현대가 연상된다. 일상성과 현대성은 한 몸이 돼야 할 두 요소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일상성과 현대성은 오늘날 시대정신의 두 측면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시작된 이래 늘 상 있어왔을 법한 일상성에 현대라는 역사성이 부여된다. 일상성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로부터 비롯된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상품의 세계가 전개되기 이전까지는 일상성의 지배가 없었다. 상품의 세계는 진부한 현실을 변모시키기는커녕 진부성을 한층 강조했다. 소비조작의 관료사회에서 더 이상 드라마는 없고, 다만 사물들, 확신, 가치, 역할, 만족, 직업, 일, 상황, 기능 들이 있을 뿐이다. 최성임의 작품에서, [안]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황금색 줄이 상품 포장재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소비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지만, 반복되는 소비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영원히 유예될 뿐이다. 진부함이 소비되는 일상은 무의미의 집합체로 다가 온다면, 이익과 연관된 새로움이 생산되는 현대는 의미의 집합체로 다가온다. 작가는 일상과 현대, 그 한 몸의 두 얼굴을 대면시킨다. 일상성과 대조되는 현대성은 새로움과 진보를 향한 과감한 모험과 실험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현대성의 지고한 목표도 결국은 상품의 생산이다. 상품은 다시 일상으로 피드백 된다. 현대의 많은 상품처럼 현대미술 역시 시장에 의해 고갈된다. 시장으로 대표되는 제도는 어떤 과격한 형식의 현대미술도 기꺼이 수용함으로서, 이를 순화시켰다. 르페브르는 일상성과 현대성은 각기 서로를 드러내고 은폐하며, 서로를 정당화하고 보상한다고 본다. 철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가 일상성을 다룬다는 것은 결국 일상성(그리고 현대성)을 생산하는 사회,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그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숙고하는 것은 단지 일상을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형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일상으로 회귀하지만, 일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일상이 근대 철학의 중요 주제인 자연, 신, 인간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하찮은 물건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하면서, 현대가 실체 없는 진리인 철학적 소외에, 진리 없는 실체인 일상적 소외가 대응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이중적 소외는 현대미술이나 이론의 상황에도 대입할 수 있다, 그래서 최성임의 전시가 보여주는 일상에 주목하는 예술은 현재의 일상에는 부재하는 어떤 충만성을 세상에 이끌어낼 가능성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