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윤진섭(미술평론가)
도대체 저 우직한 끈기는 어디서 오는가? 최근 쿤스트독 갤러리에서 열린 심수구의 개인전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2002년 인사동의 가나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의 서문을 쓰면서 그와 인연을 맺은 나는 그 이후 몇 차롄가 그의 개인전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평아트센터와 박영덕화랑의 개인전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가 우직스러울 정도로 싸리나무에 집착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싸리나무는 심수구의 유일한 조형 재료다. 싸리나무를 모으고 잘라 나무판자에 붙이는 일이 작업의 가장 큰 골격이다. 작두로 싸리나무를 썰어 일정한 길이의 파편을 만드는 일이 예사 수고가 아닐 터인데도 그는 묵묵히 그 일을 해낸다. 작품의 구상은 일의 성격상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루어지겠지만, 짐작컨대 작업이 진행되면서 그 구상은 약간 옆길로 샐 것도 같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겠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작업은 공작적 성격이 강하다.
수많은 싸리나무의 절단된 단면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심수구의 작품은 애초부터 변주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와 같은 평자에게도 궁금한 사항이었다. 그의 작품은 초기부터 그것이 나무라는 오브제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규격화된 사각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사각의 오브제는 비록 그것이 굴곡과 돌출, 혹은 깊이가 있는 이랑을 지니고 있어도 캔버스와 같은 사각의 전통적 문법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실험성은 반감되었다. 물론 그는 그런 약점에서 탈피하기 위해 곧 사각의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마치 조각품처럼 둔중한 양괴를 지닌 <이사짐처럼>(137x72x64cm, 2006)에서 볼 수 있듯이, 싸리나무의 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처럼’이란 어사는 심수구의 작품에 있어서 특유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일종의 비유법이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한 리뷰에서 썼듯이, 사물의 본질을 향해 직설적으로 쳐들어가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회로를 이용하는 방식에 가깝다. 실상 직설에서 우회로로의 이행은 수순으로 보면 순리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2002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연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허상과 실재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그것은 촉각적인 것이면서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그 촉각성이 사라진다고 하는 사실, 즉 시각의 한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이 수많은 싸리나무의 단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본 그의 화면은 허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망막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어서 ‘처럼’이라는 비유적 어사를 써서 망막적 효과의 한계를 비켜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눈처럼’ 보인다고 할 때, 그 풍경은 ‘눈’ 그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숲처럼’은 숲이 아니라 숲처럼 보일 뿐이다. 심수구의 작품 <눈처럼>(282x58cm, 2006)은 눈이 아니라 그냥 나무일뿐이다. 단지 그 풍경의 모습이 나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제목을 참조하여 싸리나무의 단면을 눈으로 간주한다.
심수구의 이번 <풍경> 연작은 어떤 면에서는 허상의 문제를 다뤘던 초기작으로 회귀한 측면이 없지 않다. 말하자면 긴 우회로를 거쳐 다시 초기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업에 임한 그의 고민이 무엇이건 간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나에겐 이렇다 할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싸리나무에 전매특허를 부여하기에는 그의 문제의식이 치열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의 열정과 기질을 잘 아는 나로서 발상의 전환과 함께 또 한 번의 도약을 부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