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시선 / 교차되는 눈들, 의식들, 현실들, 시선들



사람에겐 눈이 두 개가 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눈은 현실을 보고, 다른 한 눈은 비현실을 본다. 한 눈은 의식을 조망하고, 다른 한 눈은 무의식을 파고든다. 한 눈은 감각적 현실에 맞춰져 있고, 다른 한 눈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눈이 두 개인 것은 어쩌면 이중분열이며 다중분열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조건임을 증언하는, 몸에 새겨진 문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님 퇴화된 몸이 기억하고 있는 희미한 실낱같은 것일지도. 이런 사실은 논리적 비약이 아닌데, 우리는 공공연하게 눈을 의식에다 비유한다. 눈을 의식과 동일시하는 것. 


흔히 근대적 인간과 탈근대적 인간을 이런 눈을 빌려 구별한다. 근대적 인간에게 세계는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덩달아 그의 눈 역시 이로부터 통일된 전망을 읽어낸다. 바로 원근법이다. 반면, 탈근대적 인간에게 세계는 봉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조각나 있고, 덩달아 그의 눈 역시 이로부터 무슨 퍼즐 맞추기와 같은 파편화된 부분들을 보아낼 따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이 해체되는, 그리고 그렇게 세계가 붕괴되고 재편되는 지각변동의 와중에 그는,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변적인 지각 위에 서 있으니 불안정과 불안과 불편이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재밌는 것은 제3의 눈이랄 수 있는 미디어의 출현이 불러온 환경변화를 들 수 있겠다. 알다시피 미디어는 눈을 확장시킨다.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렇게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의식에 편입되면서 의식을 확장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의식이 확장되면서 현실도 덩달아 확장된다는 사실이다(의식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의식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허다한 현실들의 지층을 동시적으로(좀 더 그럴 듯하게 말하자면 공시적으로) 살고 있고, 겹구조화된 현실을 살고 있다. 그래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 오리무중에 빠진다. 미디어의 아이러니랄 수 있겠다. 


지금도 내 몸 위로 눈들이, 의식들이, 현실들이, 시선들이 교차하고 있다. 여기에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불편한, 그래서 주목할 만하고 의미 있고 흥미로운 시선들이 있고 현실들이 있다. 


이보람, 희생과 희생양.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문명화된 사회가 희생양 제도 위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예수를 그 전형적인 경우로 본다. 민중의 폭력욕망을 무마시킬 적절한 희생양을 찾고 내어주는 것에 모든 건전한 사회며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흔히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덕목으로 알려진 희생의 이면에는 이처럼 인신공양과 희생양이라고 하는 음울한 복선이 깔려있다. 세계는 폭력과 테러가 양산한 희생양들로 넘쳐나고, 인터넷은 희생양의 이미지들로 범람한다. 그 이미지들은 보기에 불편하다. 윤리적 공감과 도덕적 연대와 같은 참여를 요구해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이미지들을 불러다가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무심하게 소비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재가공한다. 하얗게 표백된 희생자며,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분홍빛 판타지, 그리고 여기에 삼면 제단화의 프레임과 빛의 방사와 같은 전형적인 종교적 도상을 도입해 희생자 이미지 위에 성화 이미지를 덮씌우는 것, 이 모두가 유심한 이미지를 무심한 이미지로 재가공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이 이미지며 현실을 아님 이미지화된 현실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증언한다. 


전채강, 사건풍경.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Guy Debord)는 현대인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산다고 한다. 바로 스펙터클소사이어티를 사는 것. 그렇게 어쩌면 세계는 스크린일지 모르고, 그 스크린을 사는 우리 모두는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현실을 영화처럼 살게 하는가. 무엇이 현실을 영화에서처럼 흥분하게 하고 설레게 하고 짜릿하게 만드는가. 바로 사건들이다. 마치 공허와 권태와 무료함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도 되는 양 현실은 온갖 영화적 미장센이며 사건들을 쏟아낸다. 화산이 폭발해 하늘을 온통 잿빛으로 뒤덮는가 하면, 여객기가 폭발해 수백 명이 죽었다. 해일이 일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가 하면, 폭우에 떼밀려온 자동차가 축대에 꽂힌다. 시너를 뒤집어쓴 남자가 분신자살을 하고 애기를 껴안은 여자가 옥상에서 몸을 날린다. 데모를 하고 진압을 한다. 누군가는 쫓고 다른 누군가는 쫓긴다. 이 일들은 다 현실인가 아님 허군가. 이 일들은 다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가. 어차피 현실이 영화라면, 이 모두가 다만 스쳐지나가는 풍경이며 사라질 풍경이 아닌가. 이렇게 작가는 현실이 영화가 아니라는, 도무지 영화일 수가 없다는 역설적 사실을 그리고 있었다. 

     

임주연,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스 브뉘엘(Luis Bunuel Portoles) 감독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아포리즘 <사랑의 단상>은 하나같이 모호한 그리고 중의적인 사랑의 언술에 대해서 전해준다. 사랑의 언술이 성립하기 위해선 관음과 노출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보고 싶은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부닥쳐야 한다. 여기서 관음과 노출의 주체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에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외적으로 볼 때 둘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는 나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기에, 나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기에, 나의 욕망이 되불러낸 것이기에 결국 또 다른 나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모든 사랑의 언술은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다. 심지어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할 때조차도. 그렇게 관음의 주체와 노출의 주체가 다를 때(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는 물론이거니와 하나일 때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옷을 벗는 것도 나고, 옷을 벗는 나를 바라보는 것도 나라면? 무슨 말인가. 나는 이중으로 분리되고 다중으로 분열된다. 바로 자기정체성의 문제라는 말이다. 관음이 성립하기 위해선 노출이 전제되어져야 하고, 자기관음(자기반성)이 성립하기 위해선 때론 자신에게마저 은폐된 무엇, 의외의 무엇, 그리고 그렇게 은폐된 채로 자신의 일부인 무엇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어쩌면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드러나 보인 자기의 흔적을, 존재의 흔들리는 흔적을 그린 그림일 것이다. 


이세준, 대체현실 혹은 증강현실.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이란 작가의 주제의식은 한눈에도 낭만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낭만주의는 현실이 아닌 내세에 필이 꽂혀 있었고, 유한이 아닌 무한에 경도돼 있었다. 그에게 현실은 다만 내세를 상기시키고 무한을 암시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낭만주의는 미디어가 온통 잠식하고 있는 가상현실 이전에 이미 대체현실이며 증강현실을 실현하고 있는 가상현실의 원형을 예시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현실이라고 했고 증강현실이라고 했다. 가상현실에 대한 기획이란 결국 감각적 현실을 대체하고 증강시켜줄 어떤 세계며 비전에 대한 갈망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감각적 현실을 어떻게 대체하고 증강하는가. 평면을 설치처럼 연출하는, 회화를 오브제처럼 사용하는 일종의 설치회화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자가 증식하고 무한 증식되는, 사실상 무한정 확장이 가능한 그림의 임의적인 한정을 연출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확장하고 증식되는 것은 형식만이 아니다. 의미도 그렇다. 그에게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곳이다. 주제에서 무한이란 다름 아닌 이런 토포스(위상학)의 표상이며 유비적 표현일 수 있겠다. 

         

최수진, 숨. 작가는 13살이 될 때까지 정상적으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경험은 숨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감적인 이해와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 내 체온을 거쳐나간 공기가 외부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공중에 뜨는 것을 감지할 정도로.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이 거의 감지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고, 그런 만큼 작가만의 남다른 아이덴티티며 멘탈리티를 형성시켜줄 계기이며 사건으로 봐도 되겠다. 살아가다 보면 숨 막히는 현실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모처럼 숨의 실체를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작가는 그렇게 숨의 실체가 또렷해지는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몰입을 그린다. 문제는 이처럼 또렷해진 숨 속에 모든 것들이 녹아든다는 것이다. 숲도, 나무도, 하늘도, 사람도, 원래 선명했었을 모든 것들이 숨 속에 녹아들면서 흐물흐물해지고 경계가 지워져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화해진다. 마치 존재며 세계 전체가 희부옇게 흔들리는 한갓 공기소(素)로 변질된다고나 할까. 작가는 그런 아니마(영기)로 충만한 세계를 그리고, 불안(아님 위로?)과 몽상이, 문학과 비전(아님 이미지?)이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세계를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감각적 현실이 재편되는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상상계?)를 그린다. 


이채은, 기괴한 숲과 매혹적인 리얼리티. 헨젤과 그레텔 이후 숲은 동화와 악몽이 그 경계를 허무는 비의의 원형이며 자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독일에서 숲은 그 이면에 휴식의 계기(부드러운 바람)와 죽음의 손짓(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으로 나타난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다. 작가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숲이 열어 보이는 비전에 사로잡힌다. 여기서 숲은 작가의 무의식인 것이고, 이로써 숲의 순례자는 곧 자신의 순례자(자기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이며 무의식의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의식의 층위로부터 찾아낸 추억과 상처의 편린들을 무슨 퍼즐조각이나 되는 것처럼 채집하고 짜 맞춘다. 그렇게 짜 맞춘 현실은 외적으로 보기에 판타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설핏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그래서 존재의 원형과 맞닥트리고 싶은 욕망이 작가를 숲으로 인도한 것이며, 여기서 숲은 보상과 처벌을 수행한다. 판타지를 내어주면서, 동시에 죽음충동으로 사로잡는 것. 죽음충동이란 숲의 재생능력을 의미하며, 휴식과 위안의 계기이면서 동시에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동화와 컬트, 꿈과 악몽, 휴식(아님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이 그 경계를 허무는 숲, 존재를 정화하고 갱신하고 재생하는 숲을 그려놓고 있었다.   

  

이도현, 진실한 눈.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다. 이런 미디어가 들어서 창작환경이며 생리를 바꿔놓고 있다. 화가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디어 한두 개쯤 무슨 전리품처럼 거느리기 마련이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 역행하는 것이 반드시 미덕이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디어에 가렸던 몸의 생리며 생태를 복원하는 구실일 수는 있겠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그 흔한 사진이나 이미지(재현된 이미지)도 사용하지 않는다. 몸 자체가 세계를 수신하는 하나의 미디어가 돼 습득된 이미지(지각된 이미지)를 재편집하고 재구성해 보여준다. 몸의 기억, 몸의 생리, 몸의 생태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인데, 학습되지 않은 그림의 직접성이 날것 그대로를 보듯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생경하고 낯 설은 의외의 비전을 열어 놓는다. 아마도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진실한 눈이란 주제의식은 바로 이렇듯 매번 자기를 의식의 영도지점으로 되돌려놓는 일이며, 처음자리로 소환하는 일이며, 그 지점에서 몸(몸의 눈)을 통과한 세계를 기록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상상계가 회복되면서 상징계가 재편되는 그림일지도 모르고, 상징계가 파열되면서 그 틈새로 실재계가 출몰한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 속엔 알만한 것들의 예기치 못한 접속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렇게 세계가 재편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