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재현된 시각적 소유의 역사

 

이선영(미술평론가)

     

고은컨템포러리 사진미술관에서 열린 ‘당신의 필요와 요구’전은 이제 막 허리 세대의 사진가 대열에 진입한 신은경의 최근작과 이전의 몇몇 작품이 망라된 전시로, 작가적 이력의 중간 점검 정도 되는 위상을 가진다.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들을 펼쳐놓는 전시라는 사건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흐르는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화할 수 있고,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부분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체크할 수 있다. 작가는 3개 층으로 구별된 전시장에 각각 하나의 시리즈를 설치하여 다채로움과 통일성을 함께 꾀한다. 이 전시에 의하면 신은경은 우리와 시대가 담겨있는 공간들에 주목해왔다. 사진 스튜디오나 웨딩홀, 실내에서 바라다 보이는 자연경관, 교외의 전원주택 단지들은 촘촘한 수직수평의 추상적 좌표계 속에 끼어 살고 있을 뿐인 도시인들이 꿈꾸는 이상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상적 공간은 플라톤주의 이래 재현의 역사를 정교하게 발전시켜온 유럽의 방식이 지배적이다. 지하 전시장에 전시된 알약 사진들은 다소간 의외로 보이지만, 그것은 전시부제인 ‘당신의 필요와 요구’가 집약된 실체로 다가온다. 눈에 넣기 쉽게 연출된 실내외의 공간이 몸의 연장이라면, 삼키기 좋게 만들어진 알약들 역시 몸과 연관된다. 신은경의 작품에서 몸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한다. 

 

ⓒ신은경, 사적경관, 정동진 하슬라아트월드, Pigment Print, 71x200cm, 2014

 

필요를 넘어선 약은 독이 된다. ‘필요와 요구’에는 늘 기준의 문제--얼마만큼의, 그리고 누구의 필요와 요구인가--가 잠재해 있다. 개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미화하기 위한 과장된 세트장, 그 세트의 연장에 다름 아닌 교외의 주택들이나 경관에는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는 사회적 요구와 욕망이 내재한다. 욕망이란 결코 완전하게 충족되지 않고, 일련의 항목들로 계속 추가될 뿐이며, 한정된 현실 속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고착된다. 그 공간을 만들거나 현재 향유하는 주체가 생략된 채 공간만을 주시함으로서 욕망을 추동하는 물신의 순수한 면모가 드러난다. 사진 자체가 촬영을 통해서 대상(피사체)을 주체 앞에 가져다 놓는 가상적 소유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필요와 요구’는 적절한 형식을 찾았다. 순간적으로 시공을 저며 내는 사진적 형식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지 못한 시대착오적 공간들을 들춰낸다. 그것들을 선택했다는 것 외에 특별한 추가적 조치 없이 사실들은 그 가상성이 폭로된다. 신은경이 사진을 통해 수집한 욕망의 공간들은 실제이면서도 환상적이다. 다큐멘타리 사진으로 작업 이력을 시작한 작가에게 사실 자체가 가지는 압도적 생생함, 그것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사진 기술은 중요하다. 

 

정제된 형식에는 뭔가 환상적인 것이 있다. 그녀의 작품은 허상들이 가지는 실재성, 실제가 가지는 허상성에 주목한다. 연극무대처럼 보이는 삶의 세트장이 분명히 실재하는 장소라는 인덱스로서의 증거가 있으며, 여기에 사진의 진면목이 있다. 작가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사회 현상들을 직접 찍은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사실에 충실하게 찍은 사진은 직접적이기 보다는 은유적이어야 했다. 사실만을 위한 사실, 신비만을 위한 신비는 동어 반복적이다. 차이가 교차하는 지점이 중요하다. 가령 90년대 말,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을 찍은 [가마미 해수욕장] 시리즈는 평범한 일상 속 평범치 않은 분위기가 자유로우면서도 과격한 앵글로 포착되었다.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소재 선택과 사진 형식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이다. 그러한 작업 태도는 불혹을 앞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시장 1층에 자리한 스튜디오와 웨딩 홀 사진들은 사건의 배경일 뿐, 그자체로는 주목되지 않는 실제에 집중한다. 화려한 양탄자와 커튼, 벽난로와 그림 등이 구비되어 있는 국적 불명의 실내, 그 한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공간 자체가 그 초상이다. 

 

유리구슬이 층층이 드리워진 화려한 샹들리에와 아기 천사들이 노니는 천정화, 그리고 꽃으로 장식된 웨딩홀에도 장면의 주인공이나 하객은 안보이지만, 세속적 행사에 성스러움을 부여하려는 과도한 욕망이 만들어낸 공간 초상이다. 일과적 행사를 위해서 소비된 공간은 감추어진 소비자들의 모습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가보면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이 키치풍의 공간은 가볍게 찍혀진 것이 아니라, 사진적 기술이 동원되어 정밀하게 찍혀있다. 이를 통해 ‘공간의 무의식’(발터 벤야민)이 유출된다. 여기저기에서 참조한 출처가 불분명한 코드들로 그럴듯하게 섞어 놓은 그 장소들에는 키치처럼 이런저런 욕망을 두루 만족시켜야 한다는 ‘필요와 요구’가 담겨있다. 전시장 2층에는 실내를 벗어나 탁 트인 바깥으로 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한 것은 공간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이다. [사적 경관] 시리즈는 동해안의 유명관광지의 호텔이나 모텔에서 찍은 풍경이다. 발코니를 통해 보이는 산과 바다는 그곳에 꼭 가봐야 할 이유를 알려주는 듯하다. 시공간의 축을 따라 소비의 행렬을 이어가는 관광코스의 선택에 있어 사진만큼 결정적인 것이 있을까. 관광 소비자는 사진을 통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그곳에 도착해서도 주로 하는 일이란 사진을 찍는 것이다. 

 

ⓒ신은경, 전원의 변모, Pigment Print, 128x160cm, 2013 (2)

 

인간은 자신이 속해있는 곳 뿐 아니라, 전방으로 뻗어나가는 시야를 통해서 가상적 소유의 공간을 확장하려 한다. 공적이라기도 사적이라기도 하기 힘든 이 과도적 공간 속에서 방문자는 공간의 구매를 통해 창밖 너머의 풍경을 잠시나마 전유한다.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풍경 앞의 주체는 잠시나마 전지적 시점을 유지한다. 보여 지기만할 뿐, 볼 수 없었던 소시민들은 맘껏 둘러보게 된다. 시각을 통한 소유는 지배적 시점과 연관된다. 모던한 형식의 철제 발코니가 바다풍경을 기하학적으로 구획하는 작품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선으로 변화무쌍한 실재계와 비교되곤 하는 바다를 일정한 형식으로 조각낸다. [사적 경관] 시리즈가 실내에서 연장된 실외풍경이라면, [전원의 변모] 시리즈는 경기도 양평과 청평 등지에 많이 있는 전원주택을 찍은 것이다. [사적 경관]이 정작 경관을 가능하게 하는 건물자체는 생략되어 있다면, [전원의 변모]는 보여 지는 지점에서 바라본다. 작가는 공간적 위상을 달리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안팎으로 확장되는 욕망의 그물망을 가시화한다. 오랜 세월 삶의 굴곡을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이라기보다는, 부동산 투자의 감각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우후죽순 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집이라기보다는 세트장처럼 보인다. 

 

집들은 지상에 굳건히 세워진 실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곳에 잠시 놓아둔 축소모델처럼 찍혀있다. 지상의 영원한 안식처를 선전하는 부동산 광고 사진이라면, 결코 그렇게 강물에 휙 떠내려갈 것 같은 방식으로 찍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산과 강 사이에 자리하고,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다. 전시된 작품 중, 무려 7미터 길이의 파노라마 사진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또는 반복적으로) 욕망하기에 비로소 욕망이 욕망으로 성립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은 중산층의 로망이 현실화된 것이다. 풍차가 있는 건물에는 ‘파라다이스’라는 상호가 보이는데, 앞뒤로 산과 강을 끼고 있으며 그 앞에 어떤 장애물도 없는 햇빛 잘 드는 그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이다. 실내와 실외를 찍은 사진들을 더 보기 좋게 해주는 액자는 사진의 프레임을 반복하며, 저기 있는 것을 이 앞에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한다. 지하 전시장에서 액자는 수집된 것을 깔끔하게 담아서 정렬하는 상자 같은 역할을 한다. 신은경의 이전 작업에서, [the shop] 시리즈는 공간 안에 놓인 물건들을 통해 상품을 매개하는 또 다른 상품으로서의 공간을 부각시킨바 있다.

 

지하 전시장의 [하루 필요량] 시리즈는 창문이나 거울을 통한 소유라는 비유는 상자라는 좀 더 구체적인 공간적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비타민, 아미노산, 마그네슘, 아연 등 의학에 의해 필수 영양소로 지정된, 환자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건강을 위해 보통 사람들도 흔히 복용하는 알약들을 찍은 시리즈이다. 그것은 몸에 좋다는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보석 같은 결정체에 해당된다. 인간이 부재하는 풍경에 그 공간을 소비하는 인간이 잠재해 있듯이, 색도 형태도 다양한 광 물질적 형태는 화면 가득히 확대되어 부재하는 인간을 암시한다. 사진으로 수집되어 나열된 사물들은 또 다른 인간의 초상이다. 알약을 하나씩 찍은 것은 마치 증명사진처럼 보인다. 이런저런 모양새와 성격—그것은 사진 옆에 적어놓은 매뉴얼에 나타나있다—을 가지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부류로 간주되는 그것들은 추상적 공간에 위치 지어진, 또는 흩뿌려진 추상적 인간들이다. 알약같이 극도로 축소, 정제된 형태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항목들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게 하며, 과도한 욕망에 내재된 병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신은경의 작품에서 우리 몸을 둘러싸는 공간은 이런저런 모양새로 수집, 조합, 나열되고 급기야는 알약 같은 하나의 점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정면으로 포착된 경관 저편에 찍혀있는 무한 소실점에 비유할 만하다. 

 

ⓒ신은경, Photo Studio-chair, Digital C-Print, 94x119cm, 2006

 

연극적 무대장식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들은 사진보다 더 오래된 회화나 연극무대의 시각적 관습이 포함되어 있다. 안 쉬르제는 [서양 연극의 무대장식 기술]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무대장식 기술은 원근법을 따라 공간을 재현하거나 구성하는 기술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공간 재현의 역사는 무대장치의 역사와 밀접하다. 가능한 한 현실과 다르지 않은 재현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점은 근대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도 지속되었고, 영화와 사진, 텔레비전, 그리고 정보혁명 시대의 가상현실에서도 계속 작동한다. 신은경의 작품에서 정면에서 찍은 사진 스튜디오나 웨딩홀은 원근법의 바탕이 된 이탈리아 극장처럼 이상적으로 정리된 세상에 대한 재현이다. 그 공간의 한 가운데 있는 피사체와 그 무대 맞은편에서 그것을 소비하는 이상적인 관객—전통적 무대를 가능하게 했던 스폰서인 왕,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소비자--의 시점은 원근법적 무대에서 작동하는 시각의 장치와 같다. 안 쉬르제는 원근법으로 된 허구의 이상적 모델은 왕에 의해 조직된 세상의 질서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이탈리아식 극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발전된 사고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현실과 허구, 극장과 세상 사이를 반영하는 균형과 일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이데올로기는 매우 강력했다. 이러한 동형성에 의해서 극장은 마치 15세기에 이상적 도시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왕의 세계를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을 지향한다. 공간을 이상적으로 소비하는 주체는 왕(또는 신)처럼 전능한 시점을 획득한다. 이탈리아식 무대 장식 기술은 중앙 집중적 권력을 위해서도 활용되었으며 자연으로도 확대된다. 자연으로부터의 원초적 공포를 극복한 근대인은 자연에 소유 및 지배의 의식을 투사했는데, 그것이 정원이나 풍경화를 탄생시킨다. 신은경의 작품에서 자연 또는 인공의 무대로 가시화된 원근법 맞은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관객(=소비자)는 오랜 시각적 관습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것들은 재현된 공간의 이상적 질서를 은연중에 현실적 질서와 중첩시킨다. 신은경의 작품은 이러한 환상의 장치를 사진이라는 매체 역시 물려받았음을 보여준다. 공간 소비자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세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만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데 현대의 비극이 있다. 오늘날 그 중심은 가차 없이 흔들리고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은 특정한 세계관이 장착된 ‘정치적 풍경’이다. 

 

 
ⓒ신은경, 하루필요량, Pigment Print, 110x100cm, 2013

 

마르틴 바른케는 [정치적 풍경]에서 미술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풍경화에서 그러한 시점을 찾아낸다. 토지 소유주에 의해 주문 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풍경들에 재현된 영토는 권리, 의무, 관할, 직능을 나타내는 기호가 각인된 정치적 그림으로 읽혀진다. 성채와 영토, 열려진 궁전의 회랑과 풍경이 서로 마주보이는 관점 또한 지배자의 이상이 관철된다. 마르틴 바른케는 초창기에 풍경화가 토지 소유를 증명해주는 토지 대장의 역할을 담당했고, 현대의 유명한 관광명소 역시 이전에는 군사 시설로 공간을 장악하려는 시선이 내재해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적 공간과 풍경을 찍은 사진에 ‘사적’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신은경의 작품에는 투명한 관찰과 기록이라는 행위에 잠재된 정복자의 특권적 시점, 즉 소유에 얽힌 시각적 욕망의 역사가 생생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원근법이라는 시각적 질서는 현실에 대한 상징적 질서와 중첩되며, 이 역사적 체계는 소유에 바탕 하는 개인의 권리를 보증한다. 회화나 사진을 비롯한 조형예술의 언어 역시 상징적인 질서에 속한다. 이 상징적 질서는 주체를 주체로서 성립시킨 만큼이나 주체를 억압한다. 작가는 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명백히 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우리의 상징적 우주를 문제 삼는다.

     

출전; 포토닷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