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 거울
김성연 전 (2.28--4.20, 성곡미술관)
송동 전 (3.22--4.18, 송원아트센터)
이선영(미술평론가)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 중견에 해당되는 두 작가의 전시에는 우연찮게도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의 이미지가 강력하다. 그리고 물에서 파생될 수 있는 자기 반영이 있다. 송동과 김성연의 작품에 등장하는 물과 미디어는 거울처럼 무엇인가를 비추긴 하지만, 명확히 비추지 않는다. 그것은 흐려진 거울이다. 모든 것이 물이 되는 송동의 이미지, 아웃 포커싱된 김성연의 이미지에는 제멋대로의 상상에 따라 조각난 현실을 끼워 맞추기나 지배적 언어로의 환원이 아니라, 실재계의 침범이 있다. 이러한 범람으로 인해 현실과 상상, 상징의 경계는 와해된다.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이 실재계는 송동에게 죽음으로, 김성연에게는 대양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무한으로 현시되는 실재계는 삶을 끝없이 위협하면서도, 한계 지어진 삶을 더 강렬하게 살아가도록 자극한다. 송동 전에서 물은 재난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테러나 쓰나미같은 거대한 재난의 이미지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는가 하면, 죽은 영웅들 역시 그러하다. 두 개 층을 연결하는 침대들의 탑은 생과 사가 압축된 무대이다. 한 층 전체를 에워싸는 울렁거리는 플라스틱 거울은 재난 및 죽음의 이미지와 관객을 연결한다. 죽음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는 것이다.
김성연의 전시에는 파도치는 바다와 그 한가운데의 섬이 편재한다. 부산을 기반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작가의 이력을 반영하는 섬 이미지는 송동 전과 같은 죽음이나 재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허무감보다는, 그것을 이겨내려는 강고한 의지가 느껴진다. 눈비내리고 파도치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섬은 결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으며, 자신을 스쳐간 안팎의 사건을 나이테처럼 묵묵히 기록한다. 송동과 김성연의 작품에서 물은 보다 깊은 변화무쌍한 현실이며, 그 위에 인간과 그 흔적들이 떠 있다. 그것은 실재계 위에 떠 있는 시스템이라 할만하다. 송동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이미 알려진 것으로, 세계인이 공유하는 정보이다. 인재(人災)는 물론 천재 역시 그 자체의 진실 보다는 사회적 의미가 중요하다. 재난이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붕괴를 말하며, 영웅을 영웅이게 하는 것 역시 시스템의 결과이다. 김성연의 작품에서 섬은 세계에 맞서는, 또는 상호작용하는 주체의 상징이다. 주체는 현대의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듯이 체계--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의 산물이다. 이 두 작가에게 거대한 실재계 위에 떠있는 시스템(사회, 주체)은 끝없는 위기와 도전을 일깨운다.

송동, 송원아트센터 전시 전경
송동 전에서 나무 침대를 가득 쌓아서 만든 미로를 헤쳐 나가 만나는 벽면의 모든 모니터에는 물결치며 사라져 가는 이미지들이 현전한다. 바닷물이 기화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순환 계 속의 물은 생명의 기원이기도 하지만, 소멸의 상징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의 신화와 종교 속에는 물과 관련된 생멸의 서사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송동의 작품 속 물의 이미지를 주도하는 것은 죽음과 해체, 공포와 허무이다. 얼마 전 우리에게도 일어났던 해상 사고는 모든 것을 다시금 그 원초의 혼돈 및 무질서의 상태로 되돌리는 파괴적 흐름을 일깨워준다. 생명을 주는 것도 물이지만, 갑작스럽게 그것을 거둬가는 것도 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질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을 펼친 저서 [물과 꿈]에서, ‘물은 항상 흐르며 떨어지며 그리고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고 본다.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의 한쪽 끝에는 죽음이 있다. 송동은 ‘최후의 저장소’라 제목 붙인 ‘예술가의 자술’에서, 인간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말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최후의 저장소’를 표현한다. 부재를 환기하는 빈 나무침대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압축한다. 작가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처음 일깨운 것은 유년시절에 겪은 대지진이다. 그 이후 마오쩌뚱을 비롯하여 ‘위대하게 살았고, 영광스럽게 죽은’ 영웅들의 죽음이 그를 스쳐갔다. 부모님 또한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죽음은 작가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여러 죽음 중, 송동이 주목하는 것은 준비되지 못한 채 맞는 갑작스런 죽음이다. 지하 전시장 벽에 일렬로 설치된 무성 단채널 영상 [비정상적인 죽음] 시리즈에서 물결과 함께 사라지는 초상들이 모두 그런 죽음을 맞았다. 체 게바라나 마랄린 먼로같은 스타들은 예기치 못한 죽음을 통해 전설이 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죽음은 그들의 단편적인 초상사진을 더욱 깊이 각인시킨다. 그 초상들이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왔던 영웅들이라면, 작품 [재난과 공생하다]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말 그대로 재난의 현장--문화대혁명, 탕산 대지진, 테네리페 참사, 911, 이라크전쟁, 일본 쓰나미--이다. 그 가운데 설치된 수많은 침상들은 시간적으로 쌓인 것이기도 하지만, 재난의 참상을 알려주는 동시적 죽음을 가리킨다. 푹신한 침구들은 없는 딱딱한 나무골격들은 피와 살이 이미 해체된 해골을 떠올린다. 작가가 수집한 1960, 70년대의 나무침대 60개는 ‘60갑자’, 즉 끝없이 되돌아오는 주기를 상징하는데,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재난의 편재성과 그것의 불가피함을 말한다. 침대가 ‘생과 사가 교차하는 환승역’(송동)이라면, 물에 잠긴 재난의 이미지 또한 그렇다. 1층에 조성된 거울의 방은 방문자를 죽음의 연속 선 상에 놓는다. 거울 위에 노란 네온으로 쓴 한자어는 ‘슬픔과 기쁨의 교집’이라는 의미이다. 삶과 죽음처럼 기쁨과 슬픔도 한 몸의 두면이다. 침대 탑 위의 박제된 한 쌍의 두루미는 이승을 떠난 이가 타고 간다는 새이다. 원본과 복제를 무화하는 무한 반사의 공간 속에서 두루미는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넘나든다.

김성연, [야간비행], 싱글채널 비디오 스틸 이미지. 2005-2014년.
성곡미술관 제 1전시실에 들어간 김성연 전의 관객은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 때문에 당황한다. 그곳은 어두워야 더욱 명료해지는 미디어의 우주이다. 단채널 영상 작품 [야간비행]은 어둠과 악천후 속에서 바닷새들이 날라 다닌다. 맹렬한 속도감은 이 비행체가 생물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게 한다. 그것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왜 날아가는지 알 수 없다. 자연이 그들의 몸에 입력해 놓은 어떤 방식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본능에 따른 움직임은 맹목적인 듯하지만, 자연 법칙에는 필연성이 있다. 우리 인생은 이성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간취하고 주체의 의지와 의도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기왕에 태어났으니 잘 살아야 할 뿐, 삶의 의미란 생각만큼 명료하지 않다. 예술의 의미는 더 하다.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자체가 신기할 때가 있다. 예술계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작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맞서면서, 그러나 보다 크게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서 존재하는 섬이나 새가 있는 작품들에는 작업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냉정한 직시가 있다. 거기에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모험에 찬 도정, 즉 야간비행 같은 삶과 예술이 있다. 김성연은 개인작업 뿐 아니라, 부산지역에서 오랫동안 대안적 미술활동에 헌신했던 이로, 삶 자체를 예술과 최대한 중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섬 Painted World’이라 붙여진 전시부제는 섬처럼 존재하는 예술, 또는 예술가에 대한 비유가 있다. 제 2전시실에는 단채널 영상부터 디지털 프린트에 이르는 섬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이 자못 화려하다. 섬이라는 명백한 참조대상으로부터 출발했을 색색의 변주는 그 실존적 무거움을 걷어내고 뭉게구름처럼 띄워놓는다.
바다라는 무한한 실재계에 떠있는 섬은 명백히 주체의 상징이다. 개인, 또는 인간의 역사는 거대한 자연의 좌표계에서 극도로 상대화된다. 그의 작업이 무한한 실재의 몫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우주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라는 허무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성연이라는 작은 섬에서는 다양한 사건이 벌어진다. 섬은 또한 인간 사회를 압축한다. 시스템으로서의 주체와 사회에도 실재의 몫은 있다. 예술은 자연 그자체 보다는 주체와 사회에 내재된 실재에 주목한다. 실재는 시스템과 상호작용한다. 실재계는 우리의 무의식과 몸에도 있으며, 예술은 이 실재와 연동된다. 폭죽 터지는 거대도시의 배경음을 대신하는 폭격 소리는 성장 지상주의 사회에 내재된 공격과 파괴본능을 들춰낸다. 부산의 산복도로 풍경을 스펙터클하게 잡아내 물탱크 등 몇몇 지점을 손본 디지털 프린트 작품은 인간계를 새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대도시의 빽빽한 삶 또한 갈매기와 노니는 한적한 섬과 그 생태가 다르지 않다. 포장지를 활용한 평면과 오브제들은 아웃 포커싱 된 수직수평의 선들이 발견된다. 평면이라는 회화적 조건을 색다른 방식으로 변주한 이 작업들은 그리기에 대한 메타적 언급이다. 회화와 미디어를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은 한 작품에 두 가지를 공존하게 했다. 실재는 그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포장된 채 코드화된다. 인간 또한 그 거대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중 삼중으로 덧씌워진 채 흐릿해진 실재는 평면도처럼 다 까발겨진 상태라도 모호하다. 제2의 자연이 된 미디어의 운무가 가득하다. 김성연의 작품에서 명백해질수록 모호해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예술도 사회도 그러하다. 그러나 파도치는 대자연은 변함없다.
출전; 아트 인 컬처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