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보이는 것에 얽힌 욕망


예스퍼 유스트(Jesper Just) ; 욕망의 풍경 전 (4.19-8.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선영(미술평론가)

  

한국에서 처음 전시되는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덴마크관의 전시 작가 예스퍼 유스트의 영상작품에는 전시부제 대로 ‘욕망의 풍경’이 있다. 그것이 합리적 이성이나 생물학적 욕구가 아닌 욕망인 한 그 원인과 목표가 불확실하며, 영상이라는 매체의 시간성이 이끌어가는 서사 또한 그러하다. 여성이나 남성이 나오는 그의 작품에는 ‘옛날 옛적에’, 또는 ‘모월 모일에’로 시작되어 ‘그래서 그 둘은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독자나 관객을 안심시키는 이야기 구조가 없다. 예스퍼 유스트의 작품에 선명한 서사의 불확정성은 관객의 불안감을 불안으로 방치하지 않고, 상상의 도약과 비약의 장으로 이끈다.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이 자연 생태계 못지않은 촘촘한 인과관계로 엮여있는 현대에, 간극과 균열만이 새로움과 실험이 가능한 시공간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그 틈을 적극 공략한다. 양쪽으로 또는 세로로 펼쳐진 대형스크린과 미디어박스 등을 통해 상연된 근 10여 년 간의 작품 13편은 관객에게 논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대신에, 어떤 이야기의 한 토막처럼 앞뒤가 생략된 듯한 강렬함이 특징이다.  


상영작들은 영화와 회화의 중간 정도에 있으며, 대사가 거의 없고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커서—러시아에서 개발된 신비한 음향을 내는 신시사이저 테레민으로 연주한 배경음악이 사용되었고, 테레민 연주자이자 음악감독 도릿 크라이슬러의 축하공연도 있었다--예술적인 뮤직 비디오 같은 느낌도 있다. 특히 미디어 박스에서 볼 수 있는 [환희와 천국](2005)같은 작품에서 평범한 트럭 운전사가 호젓한 장소에서 여장 남자가수로 변신하는 트럭 속 콘서트 장면은 매우 환상적이다. 그의 작품은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따라가기 위해 오랫동안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영화관에서의 수고로움, 그리고 한 장에 함축적 장면을 담을 수 있긴 하지만 서사가 취약한 회화의 약점을 동시에 극복한다. 음악적이지만 화면들이 그저 장식적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여러 매체의 장점을 한데 섞은 듯한 그의 작품은 타자의 욕망을 은밀하게 엿보는 쾌감에서 비롯된 여운이 있다. 



이름 없는 장관, 2011, 13.00min, 2 channels projected video installation_02


관객이 처음 들어선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이름 없는 장관](2011)은 마주보는 미술관의 양 벽을 스크린으로 삼아서, 양단간의 보고 보이는 시각적 대화를 이끈다. 휠체어를 타고 우거진 숲으로 잘 꾸며진 공원을 산책하고 아파트로 돌아온 중년여성은 관객의 예상을 깨고 두발로 벌떡 일어선다. 휠체어는 자연은 물론 이웃 사람과의 온전한 소통도 방해하는 듯이 보인다. 현대인들 각자는 바로 이러한 도피적이며 방어적인,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아니면 꿰뚫어 볼 수 없는 그녀만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사건은 기이한 쾌락 게임이다. 맞은편 아파트에서 젊은 남성이 그녀의 아파트에 빛을 반사하자 이를 본 여성은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는 경련을 일으킨다. 트랜스 젠더 연기자로 알려진 주인공이 왜 장애를 위장하는지, 청년의 정체는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이힐을 신고 산책하기 보다는 차라리 휠체어가 더 편해서일까? 공/사 영역에서의 상반된 행동 패턴은 육체적 장애가 아니라 정신적 장애일까?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지만, 장면들은 접촉 공포에 근거한 현대적 삶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장면 속 남녀는 관심을 가진 서로와 직접 만나 어떤 사건과 이야기를 만드는 대신에, 텅 빈 공간을 주파할 수 있는 빛과 시선으로 소통한다. 여성은 자신이 주시되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타자의 현존을 암시하는 저 멀리로부터 온 빛은 종교적 희열과도 구별될 수 없는 육체적 쾌락을 촉발한다. 욕망을 주제로 한 예스퍼 유스트 작업에서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는 열락(jouissance)의 몸짓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은 [주거지에서의 여정](2008), [크롬의 사이렌들](2010) 등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작품 속 여성들은 세련된 백인 여성이든, 슬럼가를 배회하는 흑인 소녀들이든, 손님을 기다리는 매춘부이든 상관없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과정에 의해 지금 여기와 다른 그곳으로 떠나며, 갑작스런 경련 같은 비정상적 증후는 이러한 이동을 위한 정신적 육체적 변환과정처럼 보인다. 



이름 없는 장관, 2011, 13.00min, 2 channels projected video installation_03


선실이나 자동차 같은 번쩍거리는 금속성 물건들은 미로와도 같은 공간탐색과 더불어 환상적인 성적 각본에 있어서 긴장 고조를 위한 보조수단이다. 최근의 작품 [이것은 욕망의 풍경이다](2013)에서도 목적을 알 수 없는 여성의 방황은 이어진다. 등산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장시간 깊은 산을 헤매다 복잡한 교차로가 있는 고속도로에 도달한 뚱뚱한 여성은 콘크리트 교각을 애무하며, 사방으로 차만 보이는 오랜 운전에 지친 중년 여성은 차에서 내려 교차로 부근의 황무지를 배회한다. 두 여성이 왜 주목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그 빈 터로 홀린 듯이 끌려가는지는 알 수 없다. 뚱뚱한 여자로 대변되는 통제되지 않은 자연은 계획된 질서에 의해 완벽히 지배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욕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장차림의 여성 운전자는 달리는 기계에 묶여있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층층이 꼬여있는 복잡한 교차로 또한 속도를 통해 공간을 지배하려는 문명의 욕망이 만들어낸 풍경 그자체이다. 


대체로 이 같은 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은 교통사고 밖에 없을 것이지만, 작가는 다르게 일어날 수 있는 환상적 사건에 주목한다. 밀봉된 일상 사이사이에는 예술적으로 탐색할 만한 무한한 층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예스퍼 유스트의 작품은 ‘왜?’ 라는 의문은 괄호치고 활활 타오르는 중간대목을 제시하며,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야기할 수 있는 중층적 은유의 게임을 즐기라고 권한다. 무의식 세계로의 여행을 연상시키는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면 빈약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있고 그 아래로 빈 깡통들이 널린 황무지를 배경으로 한 [라노](2010)가 상영된다. 묵시록 풍의 영화처럼,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장소는 햇빛 가득한데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으며, 지붕과 벽이 거의 파괴된 폐허 속에서 돌담을 쌓고 있는 뚱뚱한 여인의 행위가 초현실주의적 부조리함을 자아낸다. 그녀의 가망 없는 노동은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행위를 떠올린다. 햇빛을 반사하는 빗줄기에서 발견되는 돌발적 아름다움이 대재앙이 임박한 또는 대재앙 이후의 디스토피아의 풍경 같은 상황을 시적으로 반전시킨다. 한두 방울씩 물이 떨어지는 어두운 지하 통로는 보다 안전하고 합목적적인 장소일까? 



이것은 욕망의 풍경이다, 2013, 14.42min, 1 or 2 channel projected installation_02


다른 작품들처럼 아무 대사가 없다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작가의 상상력만큼이나 관객의 상상력을 요구함을 알려준다. 뒤로는 각자 앉아서 영상을 선택해 볼 수 있는 미디어 박스들이 설치되어 있다. 검정색 미디어 박스는 마치 바에 앉은 것처럼 아늑한 느낌을 주며, 이곳이 공공장소라는 것도 잠시 잊게 만든다. 여기에서 클릭해 볼 수 있는 작품들은 이 전시의 주된 축을 이루는 ‘여성 연작’ 이전의 초기작인 ‘남성 연작’이 포함되어 있다. [어느 멋진 로맨스: 삼부작](2004), [아무도 섬이 아니다 1,2](2004), [눈물로 모두 끝날 것이다](2006) 등에 등장하는, 주점이나 빌라 등에 앉아있는 남자들은 대개 늙고 지쳐 있으며 고독하다. 그들에겐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될 획기적인 사건이나 치유가 절실해 보인다. 예스퍼 유스트의 여성 등장인물이 왜 그러는지 불확실함--그녀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신 내림에 가까운 광기를 보여주곤 한다--에 비해, 남성들이 왜 그런지는 상대적으로 분명하다는 것은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과 밀접 할 듯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여전히 수수께끼에 쌓여있는 존재로, 남성으로 하여금 실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동인이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의 이론에 대한 해설서에서, ‘여성성은 어떤 실체화도 벗어나는 범주’라고 말한 라깡을 따라서 남성성은 가시적인 것에 근거하며 이것을 기초로 논리적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성은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며 파악이 불가능하며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수수께끼로 친다면 인간을 둘러싼 사물 또한 뒤지지 않는다. 미니멀리즘 이후에 부각된 사물성은 합리적 주체에 대응하는 도구적 대상이라는 관계를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물화 만큼이나 사물의 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대 특유의 경계소멸에서 비롯된다. 전시장 초입에 대형 LED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왓 어 필링](2014)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다. 그것도 조명 받는 대상이 아니라 조명하는 기구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댄스 영화의 제목을 빈 그 작품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드라마를 이끄는 것은 철수 직전의 야외무대 조명들이다. 무대의 주인공도 환호하는 관객들도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서 작가는 시작한다. 보라색 조명이 천천히 훑어 내리는 무대 주변 사물의 세부와 표면에 대한 심미적인 관심이 서사를 대신한다. 인간을 대신한 무언의 사물 극은 대사와 명확한 줄거리가 없는 그의 영상들을 예고한다. 인간이 같은 종족보다는 그를 에워싼 물건이나 분위기와 더 친숙해진 이래, 사진이나 영상은 회화나 조각 같은 오래된 매체보다 이 극적 변화를 더욱 효과적으로 증언해왔다. 전자매체는 서사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진행 한다. 영상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연주를 하는 예스퍼 유스트의 작품은 현대의 보편화된 시각적 관습인 영화의 문법을 축약적으로 활용한다. 영화의 메커니즘 중에서 그가 핵심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봄/보여짐과 욕망 사이의 관계이다. 영화는 보려는 욕망, 그것도 아무런 방해받음 없이 홀로 조용히 보려는, 그리고 봄으로서 전유하려는 현대 특유의 욕망에 부응한다. 


이것은 욕망의 풍경이다, 2013, 14.42min, 1 or 2 channel projected installation_03

스펙터클한 현대의 도시 환경 또한 그러한 욕망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 보려는 욕망은 그 욕망이 결코 만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품이나 예술로서는 무한한 자원이다. 각자 고립되면서 생겨나는 타자에 대한 궁금증은 집단적이고 상시적인 엿보기 문화를 고무한다. 보는 것은 보여짐 또한 의식하게 한다. 끝없이 타자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은 소외이지만, 동물처럼 본능에 의지해서만 살 수 없는 인간에게는 사회적, 언어적 환경을 비롯해서 타자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욕망 또한 타자의 시선을 매개로 한다. ‘여성 연작’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을 격발시키는 것도 타자의 시선이다. 영상은 타자에게 보여 지는 자신을 보는 거울이다. 그러나 봄과 보임 사이에는 언어처럼 분열과 간극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불행이지만 예술적으로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상상과 상징을 통해 이 분열과 간극을 메꿔 보려는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의 도전이다. 그것은 욕망 자체가 ‘항상 나의 바깥에 있으며’, ‘나에게 이질적인 어떤 것’(라깡)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과 관객을 막론하고 이처럼 보고 보이는 것에 충실한 이들은 사유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욕망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 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