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속의 미로, 미로 속의 길
이선영(미술평론가)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듯이,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막 생겨난 빈자리가 사라진 것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한다. 특히 있는 듯 없는 듯 잔잔하게 존재했던 것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며, 부재의 흔적은 더욱 확실해진다. 우리는 소중한 것이 곁에 있을 때의 진가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서야 젊음은 의식되며, 죽을 때가 되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을까 말까이다. 이러한 한발 늦은 깨달음이 깊은 회한을 낳는다. 이 깊은 쓰라림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그처럼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살지 않을 텐데....큰 욕망과 기대를 따라 살지 않았어도 아쉬움은 늘 남는다. 최숙의 작품은 기대와 후회를 낳는 인생의 여러 길에 대해 말한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여러 불리한 여건에 의해, 예술가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의 길에 집중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남들 다가는 대로를 더 빠른 교통수단을 타고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경쟁적 삶보다는 우회로거나 미로인 다른 길을 개척한다.
최숙은 길 아닌 것 같은 데서 길을 본다. 또는 길에서 길 아닌 것을 본다. 분명한 것은 희미해지고, 희미한 것에서 분명해지는 것을 찾는다. 그녀가 낚아 올린 가장 큰 역설은 밑바닥에서 삶과 예술의 비전을 발견한 것이다. 추상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고양을 꾀한다. 아스팔트에 그어진 교통 신호가 시간의 지남에 따라 균열을 내고, 면으로 된 선이 얼룩덜룩한 형상으로 변모할 즈음 또 다른 의미로 변모될 형상의 포획은 더욱 활발해진다. 최숙은 ‘인생의 길을 찾는 여정을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고심하던 어느 달밤, 무심히 발아래 아스팔트 횡단보도 틈새로 난 균열을 보았다’(작가노트) 2012년 개인전 이후 좀처럼 붓을 못 잡고 있던 터에 안산의 갈대 습지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발견한 길의 균열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맨 처음에는 반듯하게 그어졌을 기하학적 도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닳아져서 가까이서 보면 무정형 패턴으로 변모한다. 아스팔트 위의 차가운 선은 인간의 흔적을 각인한 따뜻한 무엇이 된다.
그것은 단단한 것이 깨지는 부정적인 선이기 보다는 펼쳐지고 접혀지는 유기적 주름에 가깝다. 기하학적 도형은 유기체를 이루는 작은 덩어리들로 굼실거리며, 내부의 균열은 물론 외곽선조차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추상적 체계의 산물 같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그리고 자연이 다시 만들어 낸 길로 변형된다. 흙을 인공적 재료로 뒤덮고 그 위에 선을 그은 익명적 체계의 의지는 모호해지고, 아무런 목적 없이 떨 군 시선은 어떤 의미를 향해 모여드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을 주도하기보다는 그림을 따라가다 그림을 만난다. 그러나 이러한 조우에는 조절 또한 있다.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된 아스팔트의 하얀 얼룩 역시 발견된 그대로라기보다는 선택하고 확대하며 다른 것과 결합하여 변형시킴으로서, 작품이 우연과 카오스로만 귀착되는 것을 방지한다. 최숙은 그것을 ‘무의도적 의도’라고 말한다. 얼룩으로 변한 선에서 영감 받은 작품에는 미시우주와 거시우주,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 두루 발견된다.
아스팔트에 그어진 선의 균열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들은 그 최초의 출발을 상상 못할 만큼 변화무쌍하다. 정확한 의미를 지시하는 반듯한 기호는 수수께끼의 사물과 자연적 요소로 해체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 의미와 목적은 불확실해지지만, 시간의 흐름을 타고 빠져나온 에너지는 잠재적인 것을 다시 현실화시키는데 사용된다. 작품 [업고업고 업히다]에서 뭉글거리는 하얀 얼룩들은 업고 업히는 듯한 군상으로도 보이며, 다양한 형상들이 우글거리는 얼룩들은 미지의 생명체로 자라날 세포처럼 보인다. 작품 [포옹]에서 두툼한 하얀 얼룩들이 서로 포옹하는 듯한 군상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변모가 가능하기 위한 끌어당김과 밀쳐냄이라는 힘을 보여준다. 작품 [dream bird(몽조)]에서 균열과 지워진 부분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군상을 이룬다. 세포나 구름 같은 형태소는 어떠한 형상으로도 변모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그것은 일종의 줄기세포인 셈이다. 그래서 최숙의 작품 속 아스팔트의 하얀 얼룩은 네거티브 공간 속의 포지티브한 형태, 심리적 투사에 의해 완성되는 게슈탈트이다. 숨은 그림처럼 찾아내 읽을 것이 풍부하다.
해체된 형태에서 길어 올린 형상은 깊은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도약을 예시한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바닥상태에서 도약으로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몰입의 과정을 통해 공허함을 충만으로 역전시킨다. 피상적 삶이 그냥 덮어두고 억압하는 것을 불러 일으켜 직면하게 한다. 이러한 직면은 잔인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실감과 박탈감을 주는 삶에 대한 예술의 주요 전략은 한술 더 뜨기에 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시작이 움트는 극적 드라마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종종 일어난다. 삶에서 비롯된 슬픈 탄식이 리듬을 타면 어느새 노래가 되고, 깊은 고통은 희열로 변모될 수 있다. 일상을 이루는 잡다한 흥밋거리가 그저 빈 시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지불하는 자잘한 소비로 이루어져 있다면, 고통과 희열의 변증법은 진폭이 더욱 크다. 이 죽음에 가까운 낭비는 생산(그리고 그것의 짝인 소비) 중심의 사회에서 또 다른 교환의 방식을 간취한다. 예술은 제의나 종교처럼 이러한 상징적 교환과 관련을 맺는다.
하얀 얼룩 위의 균열이 어디선가 힘을 받아서 솟구치는 듯한 작품 [심연]은 중력을 극복하는 가벼운 춤의 궤적을 그려낸다. 작품 [아담의 길]에서 희미한 운무 속에서 격렬한 춤을 추는 듯한 사람들은 삶이 그들을 흔드는 것보다 더 과격하게 스스로를 흔듦으로서 또 다른 중심을 잡는다. 달리는 자전거는 정지하는 순간에만 취약할 뿐이다. 불균형은 균형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자세일 뿐이다. 의미를 향한 응집은 최숙의 작품을 우연이나 사물로 환원되는 것을 저지한다. 놀이와 카타르시스의 장이지만, 광인이나 아이들이 더 잘할 수도 있는 마구잡이 분탕질이나 맹목적 무의식의 장은 아니다. 작품이란 최대한 열려있어야 하지만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로드’에 ‘컨트롤이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정신없이 놀다가도 다시 길로 오거나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보다 먼저 전공한 심리상담사로서의 직업에서 비롯된 어떤 절제나 삶에 대한 균형 감각으로 보인다. 이런 저런 얼룩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화와 연결될 수 있는 인간들이 내재해 있다. 작품 [직면]처럼 추상표현주의적인 얼룩으로 보이는 작품조차도 그렇다.
물질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인간적 의미와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형상으로 거듭난다. 2013년 초여름부터 시작된 ‘the road’ 시리즈는 작가로서는 견디기 힘든 공백기 중에 불현 듯 발견한 영감이다. 그것은 모두들 앞만 보고 위만 보고 나아갈 때, 밑바닥을 주시하는 이의 비참하고도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밑이란 깊은 절망, 묻혀있는 무의식, 불투명한 몸이라는 공간적 위상을 내포한다. 이 삶의 밑자리는 바닥을 친 후에 튕겨오를 방향성을 예시한다. 방향타 중의 하나는 우연을 필연으로 고양시켰다. 최숙의 작품에서 우연과 필연의 관계는 자연과 인공의 관계로 전이된다. ‘the road’ 시리즈에 영감을 준 아스팔트길의 하얀 얼룩 자체가 인공이 자연화 된 모습이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는 비현실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는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최숙의 작품에서 길속의 미로, 미로 속의 길은 인공의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로서 미로는 악무한이 아니라 즐길만한 우회가 된다, 이 우회로는 예술이라는 대안의 길이기도 하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