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자율적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꿀 때 누군가는 예술을 떠올린다.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예술을 떠올리는 이들이 예술가가 되고 예술애호가가 될 것이다. 여행, 독서 등등...자유롭고 자율적으로 행해진 것들은 꼭 예술작품은 아니어도 최소한 예술적이라 여겨진다. 자연 그 자체 보다는 사회의 제도에 의해 더욱 격화되는 생존경쟁의 장에서 자유롭고 자율적--여기에서 자율을 자유와 같은 반열에 놓는 것은 유희와 무위만큼이나 제작과 생산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일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자신들이 꿈꾸는 자유와 자율을 위해 삶의 무대를 괄호 치는 이들도 있다. 몽상가들이나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사이비 초월을 일삼는다. 그러나 정신적 초월을 주장하는 이들일수록 현실적인 이해관계에는 밝으며, 현실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에도 회의적이다. 몸은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남겨두고 ‘자유로운’ 정신만으로 예술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 반쪽의 진리에 모든 것을 실으려하니 그들의 예술은 침울하고 무겁기만 하다.
맞적수가 없어진 지배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율과 자유란 자본의 소유를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술보다는 그들이 몸 담그고 있는 당면한 현실적 가능성을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사상이 처음부터 소유에 기반 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온다. 그러나 소유란 배타적이고 독점적이다. 남들이 다 원하기에 나도 원하며, 그렇기에 가지기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현실적 경쟁력을 갖춘 체제이다. 그러나 관료화된 사회에서 자율성이 개인의 이기주의에 의해 닫혀버릴 때 사회는 위협받는다. 공동체로부터 위임된 권리가 지배적 권력이 되어 군림하는 상황 그자체가 바로 위험하다.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고 자기만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전용되는 도구화된 이성은 현대라는 상시화 된 ‘위험사회’(울리히 벡) 속에서 돌발적(그러나 필연적)인 사고가 발생해야 비로소 조금씩 구조조정이 될 뿐이다.
예술가로 말하자면 지배구조를 재현하고 생산하기 보다는 저지르고 탈주하는 자에 더 가깝다. 자율과 자유는 바깥과 타자로 열려있어야 하지만, 거대체계는 모두 같은 것을 욕망하도록 추동된다. 비대해진 구조는 공동의 이익보다는 자기 재생산을 위한 기제에 불과한 과정을 은폐하며, 자신을 정당한 권력으로 합리화하곤 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즉 자유민주주의가 ‘주체로서 호명한’(알튀세), ‘자유의지’를 가진 ‘분리될 수 없는’ 개인은 다름 아닌 소유와 계약의 권리를 지닌 중산층이었다. 자율성이란 시민적 자유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올리비에 르불은 [언어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상정하며, 국가에 대해서는 무질서나 외국의 침략에 맞서 그 자유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재산을 다른 모든 것들의 기초로 삼는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오크 패널에 유채, 1533년, 영국 내셔날갤러리
(삶에 대한 교훈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여러 가지 물건들은 이 정치적 주체들의 소유물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면서 처음부터 그것을 소유권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만큼이나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생각을 넘어설 뿐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환상의 기반이 된다.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자신이 독자적인 주체라는 환상, 즉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과 결단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남이 원하는 바를 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올리비에 르불은 생각이 이미 생각된 것 속에 스스로 자리 잡는 현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익명적 사고이며, 주체 없는 담화라고 말한다. 담론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하는 미셀 푸코는 주체에 대한 개인화 기술이야말로 전체로서의 근대국가에 필수적인 프로젝트였다고 폭로한다.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를 대상화시키고 스스로를 주체로 구성하면서 외부적인 통제 권력에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근대에 일어난 주체화의 과정이었다.
‘왜곡된 의식’(칼 만하임) 또는 ‘이해관심에 따다 다니는 환상’(피에르 부르디외)으로서의 이데올로기, 특히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타자의 부자유를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같은 것을 욕망하는 경쟁적 삶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이 요구하고 야기하는 소비적 삶 또한 지속가능하지 않다. 잉여가치의 소유와 축적을 통한 타인의 지배는 생산력의 눈부신 발전만큼이나 추악한 현실을 생산해왔다. 시장이라는 유일한 판관만이 존재하는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예술가 역시 다른 상품판매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판매를 통해 자율과 자유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시장 참여자들이 직면해 있는 소비/생산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 관계를 피해갈 수는 없다. 여기에는 늘 어떤 도약이 필요하며, 이러한 도약에 진정 예술적인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영감이든 시대와의 행복한 만남이든, 이러한 도약을 위해 자율과 자유가 필요하다.
판매자는 소비자만큼 자유롭지 않다. 소비자 역시 무한히 추가되는 자신의 욕망에 걸 맞는 소비하기 위해서는 결코 자율적이거나 자유롭다 할 수 없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안 써도 안 되는 소비사회는 마약 같은 악순환에 기초한다. 물론 그 악순환의 에너지 공급원이 되는 것은 약자이다. 자국 내의 약자들의 각성은 타국의 희생자로 이어진다. 세계화는 좀 더 많은 이들의 노동력을 전면적으로 착취(또는 활용)한다. 현대적 삶은 촘촘하게 매뉴얼 화 되어 있어 삶에 필수적인 노동 또한 점점 지루해진다. 언제라도 누구와도 교체 가능한 노동자들의 조건은 가혹하다. 노동에서의 합리화란 개인을 다른 개인으로, 인간을 기계와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합리화란 중립적이기 보다는 분열된 계층의 한편에 더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예술은 각 개인의 차이를 가능케 할 자율과 자유를 주장한다.
예술작품의 유통이 상품만큼 대량적이지 않다는 것은 소외이지만, 동시에 자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자율적으로 생산된 것들이 자유롭게 교환되는 사회에서 예술을 결코 특권적인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현실 사회 속에서 예술가들은 타자의 극단적인 모습을 취한다. 예술은 축복과 저주의 차원을 포함하여, 자유와 자율의 가능한 모습을 예견한다. 예술 또한 물심양면으로 치열하게 생산되는 것이지만, 그 산물이 다른 생산품처럼 타자를 억압, 지배하지 않는다. 다양성과 차이가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고 상찬되는 예술은 자유의 진정한 가치에 걸 맞는다. 여기에서 이견은 분란이 아니라, 다양함을 낳는다. 하나의 가치를 다양한 가치로, 거대 구조를 연동하는 자율적 단위로 쪼개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합의보다는 이견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안의 불편함]에서 합의란 이견을 없애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합의는 하나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최악의 경우, 극단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절대적 타자의 자리를 부여하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예술적으로 그토록 매섭고 날카로웠던 전위들이 제도화를 통해 사회에 통합된 것은 그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어줌으로서 도전과 위기를 관리하는 체제의 능력이었다. 그러한 분할을 기반으로 합의는 유지된다. 이항대립과 흑백논리는 지배적 체제를 받쳐준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자신과 닮은 ‘적의 생각’(레이몽 아롱)일 뿐이다. 남/북 뿐 아니라 동/서에도 선명히 그어져 있는 분할구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배적 체제와 당파들은 그렇게나 서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이견을 만들어낼 수 있는 행위가 진정으로 미적인 행위이고 정치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예술은 지배적 합의의 정치를 거부하고, 다르게 감각되고 생각되며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러나 삶과 예술이 아직 통합되지 않은 사회에서 예술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윤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지배적 체제와 달리, 따로 잡아 둔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삶과 예술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공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일만큼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작업은 늘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 사이에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한 채 가까스로 존재한다. 현대예술의 개념화 이후 논리적으로는 누구나 예술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그것을 지속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처한 어려움과 극도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 매혹되고 헌신한다. 그것이 인생의 한 시기나 특정한 계층에 한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이상이다. 자율성이란 획득되기 힘들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치 있으며, 그 이상을 오롯이 간직하는 예술은 소중하게 여겨질 만하다. 우상과 성상의 시대를 지나 근대에 예술이 탄생했을 때부터 자율성이란 예술의 내재적 가치였다.
그 발생적 역사와 논리의 상호작용에 의해 예술은 자율적이고, 자율적이지 않다면 예술이 아니었다. 아도르노부터 그린버그까지, 자율적이어야 비로소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 주장도 제기되었다. 좌파들이 정치적인 것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예술을 사회의 계몽이나 혁명의 도구로 삼기 전에, 계몽이나 이윤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분명 더 효과적인 방식은 따로 있으며, 그것은 예술 내부에 있다. 거꾸로 예술이 자율적이기 위해서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자율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가치라면 말이다. 예술이 자율적이어야 정치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자율의 개념을 매체와 형식에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예술만의 유토피아는 곧 동일성의 논리에 갇혀 버린다. 그러나 안토니오 네그리가 [혁명의 시간]에서 물었듯이, 몸들의 자율보다 더한 자율이 무엇인가. 이 맥락에서 우리는 몸의 자율이 없이 예술의 자율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예술 언어의 혁명만으로 다른 혁명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예술사조와 이론들이 있어왔지만, 그것은 세계를 간편하게 언어로 환원했을 때나 가능한 순진한 생각이다.
반대로 정치가 예술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정치 특유의 분파적이고 전략적이며, 승자독식적 사고방식은 정치와 예술이 하나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불식시킨다. 그래서인지 현실 정치인들에게서 예술적인 모습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율화된 예술 제도의 한켠을 차지하고서 만족해하는 ‘전문’ 예술가들만큼이나 매력적이지 못하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모든 그럴듯한 가치들처럼 당위이자 이상이었지 당면한 현실은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 늘 유예되었고, 힘들게 쟁취해야 하는 가치였다. 자율성을 위해 자율적이지 못한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적 가치였다. 그래서 ‘자율성의 형태는 항상 동시에 타율성의 형태’(자크 랑시에르)였던 것이다. 자율성은 보다 크게 자치(自治)로 확장되어야 한다. 개인은 물론 대중이나 민중을 뛰어넘는 다중(多衆)의 자치로서의 자율성 말이다. 이 확장된 자율성 속에서 삶과 예술, 그리고 정치는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예술은 단지 예술을 넘어서 ‘삶의 형태’(자크 랑시에르)가 될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