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공(共)진화하는 기계들의 천국, 또는 지옥

 

이선영(미술평론가)

 

수직수평의 선들이 주를 이루는 기계적 형태와 건축에도 쓰이는 자재들이 활용된 이일의 ‘로봇-도시괴물’ 전의 로봇은 건축과 중첩된다. 그것은 근대 건축의 모토였던, 집은 ‘살기위한 기계’(르꼬르뷔제)라는 사고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밀고나간 상태를 말한다. 그의 이전 작업을 보면, 로봇과 킹콩이 결합된 [GOBOT]이 나오는데, 그 역시 동물을 기계로 간주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사고를 반영한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꽃을 든 낭만적 ‘고봇’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로봇이 되었지만(또는 기계로 도구화 되었지만), 결국 도시에서 죽어가는 자연의 운명을 예시한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동일자의 타자로 간주되어 억압받고 착취되었지만, 타자는 귀환한다. 동일자 자체가 타자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 ‘살기위한 기계’들은 물활론적 생명을 부여받아, 다시금 살아있는 자들을 유혹하거나 압박한다. 

 


아파트나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현대 도시는 기계들의 천국 또는 지옥이 된다. 이일의 ‘로봇-도시괴물’이라는 표현에는 로봇에 대한 부정적인 기미가 있지만, 비판만으로 작업을 이끌어 나가긴 힘들다. 괴물이든 아니든 로봇 형태를 만들기 즐겨하는 작가의 태도에는 로봇에 대한 소년 같은 로망이 담겨있다. 요즘처럼 ‘스마트한’ 시대에 작품 속 점, 선, 면 같은 기하학에 바탕 한 로봇들은 다소간 소박하다. 표면만으로는 기능을 알 수 없는, 미끈한 인터페이스를 앞세운 최신식 기계에 비해 아나로그에 충실한 형태는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기계는 경쟁자나 상위 포식자로 돌변하기 이전에는 장난감, 즉 친구였을 것이다. 다소간 고풍적으로 보이는 로봇들은 자연에 기반 한 전통을 밀어내고 구축된 근대 역시 곧 낡아지고 사라져 갈 것을 예견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로봇들의 진화단계나 ‘혈족’ 관계 등이 나타난다. 이 기계들은 인간처럼, 또는 인간과 더불어 공(共)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기계적 환경과 더불어 기계화되는 현대인을 비유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담는다. 벽돌 크기의 돌에 머리와 사지가 달려있는 [노예] 시리즈는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표준화된 생산물이며. 벽돌 쌓듯이 무엇인가 생산하는 기계임을 알려준다. 관절과 다리 부분이 둥근 구로 되어있으며 성별도 표시되어 있는 [오뚜기 로봇]은 벽돌 로봇보다는 좀 더 융통성 있는 형태의 진화적 단계—가령 육체노동자가 아닌 감정노동자—처럼 보이지만, 노예이긴 마찬가지이다. 그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들은 번호만으로 식별되는 철저히 익명적 존재이다. 큰 규모의 로봇은 보다 다양한 건축적 요소가 조합되지만, 수직/수평의 형식은 유지된다. 이러한 형식은 대지 위에 서있는 인간을 모범으로 하는 조각의 기본 문법과 동시에, 수평적으로 뻗어나간 도로들 위로 수직적으로 솟은 격자화 된 근대 도시를 연상시킨다. 인간과 환경은 수직/수평이라는 거친 기호화를 통해 그 실체를 텅 비워나간다. 이일은 이 텅 빈 실체를 과장된 몸짓과 반사면으로 위장한다.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아파트 옥상 같은 장소에 불쑥 솟아있는 구조물로부터 온 각진 형태가 자신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은 채 상대를 본다. 여러 크기가 있지만, 클수록 위압감을 준다. 그자체가 감옥처럼 보이는 몸통에는 관객이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유리와 철제 빔으로 이루어진 근대 건축물처럼, 건물이자 로봇인 철제 구조물 사이에는 거울이 있어서 상대를 비춘다. 현대적 구조물과 현대인은 닮은꼴을 이루며, 거울을 보듯이 서로를 반영한다. 배나 입 부분이 거울로 된 로봇에 비춰진 상대는 괴물에 잡아먹히는 것 같은 착각도 준다. 하나의 눈구멍을 가진 로봇들은 마치 외눈박이인 카메라처럼 기계적 무표정함 속에서 상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비롯한 공격적 의도를 감춘다. 작품 [도시괴물]은 2m 73cm의 키로, 거의 갤러리 천장에 닿을 듯 크다. 수직의 선들이 강조된 사각 몸통들의 구성요소는 여러 개의 건물이 합체된 기념비적 규모이다. 

 

두 발은 괴물 도시로 들어오는 관문처럼 만들어졌으며, 그 꼭대기에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자식처럼 생긴 한 쌍의 귀여운 로봇은 도시괴물의 유년기를 보여준다. 자연이 압축된 녹색구슬을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년 로봇의 머리엔 왕관이 쓰여 있다. 왕 같은 소년이 괴물과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따름이다. 몸집만 성장하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이다. 기계가 처음부터 악역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 같은 역사의 특정시기에 기계는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징했고, 제2의 자연인 도시를 구조화하는 모델을 자임했다. 20세기 미술사에서 이탈리아의 미래파, 러시아의 구성주의, 독일의 바우하우스 운동은 그 극명한 예이다. 기계는 예술가에게 단순히 합리적 기능을 넘어서 자극적이며 흥분을 자아내고, 더 나아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수단이었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수직 구조물은 대지로부터 탈주(초월)하고, 더 많은 태양광선을 끌어들여 활기차게 돌아가는 현대적 삶을 구현할 것이었다. 콘크리트와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기계적 단순성은 유연하고 경쾌한 삶을 예시했고, 그것은 혁명과 전쟁으로 파괴된 구세계를 일소하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였다. 그러나 혁명과 전쟁의 폐허 속 구원자와 선구자를 자임한 모더니스트가 기획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가 구축되었을까.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더 많은 다수의 디스토피아로 전락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근대화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증폭된다. 사각 또는 원 파이프, 구, 스텐 선 등, 이일의 작품을 이루는 금속 재료들은 그자체가 자연이 아닌 근대 산업혁명의 산물이며, 수직수평의 날카로운 윤곽선은 계획된 목적을 합리적으로 수행하는 기계를 모델로 한다. 어떠한 부가적인 장식 없이 철과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표면은 바우하우스가 믿었듯이 ‘이성과 객관성의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색과 갈색으로 이루어진 이전의 세계를 백색의 세계로 변화’(데 스틸 그룹)시키고자한 기계미학의 창조자 및 추종자들에게 기계는 임박한 미래의 가치였다. 이러한 선구자들과 생산력의 진보를 향한 역사를 통해 미래는 현실이 되었다. 이일의 로봇은 골조와 피막으로 이루어진 근대건축을 모델로 하지만, 모더니스트가 믿었던 바의 순수한 결정체와도 같은 빛나는 경쾌함이 아니라, 그들이 무너뜨린 구세계보다 더 추레한 물질 덩어리로 다가온다. 직선적 요소나 큰 덩치는 유연성과는 거리가 있으며, 뭔가를 감추는 불투명한 표면은 불길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건물-괴물-퇴물은 합리적 이성으로 출발한 이상이 비합리적 현실로 귀착된 계몽의 역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살기 위한 기계’를 주장했던 건축가 르꼬르뷔제의 이상인 ‘흰색의 세계’, 즉 ‘빛과 공기에 담긴 수직의 도시’는 최초의 짧은 창조적 시기를 거친 후, 곧장 단조롭고 위험한 괴물도시를 세계 곳곳에 양산했다. 

 


그 도시에 살아야하는 인간은 어떠한가? 기계화가 처음부터 인간성 상실을 결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기계미학의 선구자들은 투명한 기계적 공정이 비인간성보다는 합리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을 낳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생산력은 혁명을 이루고 진보가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공통적 신념이었다. 근대 건축과 디자인의 산실인 바우하우스는 ‘규격화는 결코 개인의 로봇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각 개인을 지나친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고차원적인 장에서 자유롭게 조형력을 증진시킨다’(그로피우스)고 강조하였다. 근대적 기계화는 현대의 정보사회에 와서 코드화로 연동되는데, 이는 이질적인 개체들을 동일화한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화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지구상의 다양한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상호경쟁으로 몰고 가는 공간의 수축과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세계를 말하며, 바우하우스의 통찰력은 살인수용소들을 설계하는데 동원되었고, 형태가 기능뿐 아니라 이윤을 따른다는 법칙이 지배적이 되었음을 비판한다. 

 

또한 하비는 시공간 압축의 가속화가 주체와 객체 모두를 비워놓는다고 말한다. 사회관계는 구체적인 시공간이 사라지는 것처럼 추상적으로 변한다. 문제는 진보를 가늠하는 기계를 통한 생산력의 혁명이 계급의 차이를 철폐하지 않고 더 크게 했다는 점, 즉 사회는 ‘자유롭게’ 구성하는 자와 그 구조에서 적응해야 하는 부자유스런 다수로 나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구조란 결코 중성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합리주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결코 합리주의가 될 수 없다. 근대의 여명기에 예술가는 자본가 및 혁명가들과 더불어 이와 같은 계몽주의적 기획에 사회의 전위로서 동등하게 참여했지만, 전체주의로 변해가는 근대사회에서 점차 타자화, 주변화 되었다. 이일의 작품에는 기계에 대한 양가감정이 있다. 기계는 예술가에게 붓과 빨렛트같은 표현수단이 될 수 있고, 작업공정에 편리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 또한 기계화된 사회의 일원이다. 역사는 개체의 차원에서 반복된다. 

 


친구에서 경쟁자로, 그리고 억압자로 변모해가는 로봇과 도시의 양상은, 개인의 성장이라는 시간의 축을 따라가 보면 분명해진다. 자신에게 로봇 장난감을 사주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처럼 혹사당해왔음을 이제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되자 새삼 깨달았으며, 동일한 운명이 자신에게도 닥치리라는 예감이 있다. 상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도시괴물]은 근대라는 거인을 형상화한다. 이 거인은 자신의 발밑으로 다 들어오라고 명령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기처럼 보이는 육중한 두 팔은 가만히 있지 않을 기세이다. 양팔을 벌린 또 다른 도시괴물들은 하나의 유일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따르라고 압박한다. 그것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기준을 하나의 성상처럼 고정시킨다. 다른 작품들에서 팔은 십자가 같은 고문대의 형상을 취한다. 이일의 무표정한 로봇 괴물들은 이러한 ‘보편적’ 기준의 강요가 사회생활 뿐 아니라 예술계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아닌지 알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의 공통적 규칙 대한 불편한 자의식의 발로이다. 몸통과 팔을 이루는 수직 수평의 선들은 분절화 된 시간과 격자구조의 공간으로 시공간을 재배열하고 압축해왔던 근대적 과정을 각인한다. 대량생산된 것을 자르고 조립하는 그의 제작 방식은 현대의 생산양식과 구조적으로 동형적이다. 작품 [노예]나 [오뚜기 로봇]은 무엇(또는 누구)과도 호환 가능한 부분으로 환원된 인간의 위상을 알려준다.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인간은 더 이상 이전의 인간이 아니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미래의 인간이 기계공학, 가상현실, 생물학, 또는 에너지, 정보, 생명체를 통해 신이 되고자 한다고 예견하였지만, 낙관론을 제거한다면 이러한 예측은 인간 자체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기계적 형상을 한 이일의 작품은 탈(Post) 인간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이지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은 예술가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