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탄생을 위해 파괴되는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오래된 극장, 그 텅 빈 무대 위에 정사각형 틀의 그림들이 서로를 맞대고 서있다. 세상이라는 무대 안의 무대, 그 무대 안의 또 다른 무대들... 최수정은 여러 겹 드리워진 틀(frame)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틀이 거듭될수록 거울이나 창으로서의 투명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현실과의 접점을 최소로 한 자족적인 우주들, 현실과 평행한 세계--[평행세계]는 2009년 노르웨이에서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가 구축된다. 구축은 해체를 전제한다. 작품/무대는 허구이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는 무엇이다. 다만 그러한 현실성을 위한 조건은 일시적이다. 무대는 곧 막을 내리는 것이다. 시한부일 수밖에 없는 강렬한 감정에 기대어 일시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그 환영은 삶이라는 황량한 사막을 건너게 하는 오아시스의 신기루 같다. 신기루는 신기루에 불과하지만 신기루의 역할이 있다. 단순히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 아니라, 삶에서 불현 듯 솟아오르는 강렬한 것이 수렴, 발산되는 인터페이스라는 맥락에서 예술의 현실성을 찾아야 한다. 


확산희곡_돌의노래 무대 전시전경, 2013년.


2013년 [확산희곡-돌의 노래] 전이 열렸던  삼일로창고극장의 무대 안팎에는 연출자도 배우도 안 보인다. 무대장치 또는 배우처럼 관객을 내려다보는 그림들, 그리고 빛과 소리는 불특정 방문자를 향해 작동된다. 상대의 안부를 묻는 전광판의 문장, 모르스 부호로 만들어진 음, 불꽃놀이 영상 등은 메시지를 송신하는 기계들이다. 주체 없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듯한 우주, 거기에 부조리와 신비가 있다. 무대 양옆의 둥근 창에서 무대를 주시하는 원숭이나 그림 속 광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작동되는지 모호한 이 우주의 무심한 관찰자이자, 부조리를 가속시키는 장난꾼(Trickster)같은 존재다. 그 전시에서 [mineral painting](2013)이라고 붙여진 시리즈는 하나의 단위처럼 기능하는 정사각형 프레임을 가지며, 그 한가운데에 복잡한 굴곡 면을 가지는 광물이 떠 있고, 세상에서 발췌하거나 작가가 창안한 작은 이미지들이 흩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안팎을 휘돌며 출렁이는 색색의 궤도가 공간을 휘젓는다.


찻잔 속 회오리 같은 움직임은 바깥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인다. 이 출렁이는 궤도는 코스모스를 카오스로 해체한 원인인지, 아니면 현재의 혼돈을 질서화하기 위한 힘인지 불확실하다. 중심을 잡아주는 광물을 뺀 나머지들은 모두 제자리를 잃고 생성 또는 소멸하는 과정 중에 있다. 중심의 광물질은 공간에서 방황하는 시선들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무언가 잘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반석같은 위상은 아니다. 이 중력의 중심은 화면의 구성요소들을 무한의 공간으로 흩어지게 하지는 않지만, 안정적 질서의 바탕이나 출발이 되지도 않는 것이다. 허공과 중심의 중간에 걸쳐 산포된 이미지들은 여러 힘에 반응하면서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을 따름이다. [mineral painting] 시리즈는 한 장 한 장 보면 작가가 좋아하는 천정화 구조를 닮았다. 그것은 ‘위, 아래, 그리고 양옆이 없는’ 그림이면서, 환영의 효과가 극대화된 구조이다. 정사각형의 일률적인 프레임, 광물질 핵, 출렁이는 궤도 같은 일련의 구조들은 그 안팎에 배치된 요소들과 더불어 사건을 만든다. 


Soojung Choi, Mineral Painting, 2013, Acrylic, embroidered and mixed media on canvas, 130x130cm

입구와 출구가 불확실한 붕 뜬 공간에 흩어진 작은 이미지들은 불온한 짝짓기를 거듭하면서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복잡한 연주로 이루어진, 매번 달리 들리는 음악 같은 상태를 지향한다. 여기에서 들려오는 잠재적인 음악은 즉흥성이 강한 재즈부터 샘플링과 믹싱으로 이루어진 전자 음악에 이르는 폭을 가진다. 물감 사이사이에 이끼처럼 돋아있는 색색의 실뭉치는 또 다른 차원을 추가하면서 카오스모스의 세계에 동참한다. 실뭉치는 캔버스 곳곳에 출몰하면서 화면의 평면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이질적 덩어리를 이미지로 바꾸면 바로 그림이 될 것이다. 자기닮음성(self similarity)을 가진 프랙털 도형처럼, 다른 각도에서 찍힌 사진처럼, 다른 악기로 변주된 멜로디와 리듬처럼 그렇게 각자의 세계들을 확장해 나간다. 그것은 시점과 종점을 가지는 직선적 확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만이 되돌아오는 영원회귀의 세계를 말한다. 하나의 중심이 없는 영원회귀는 다원적인 우주를 예시한다. 


실뭉치는 천으로 이루어진 캔버스의 연장이자, 그 위를 덮는 또 다른 물감처럼 나타나고, 그림을 이루는 수많은 이질적 요소 중의 하나로 자리한다. 그림이지만 꼴라주나 몽타주의 방법론이 내재되어 있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떨어진 운석같은 광물질  안팎에 배치된 각 요소들 사이에는 도약과 비약, 불연속성이 팽배하다. 그것은 사이비 인과론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 쉼표를 제공한다. 간격 없음은 요즘 구상하고 있는 [무간도(無間圖)]처럼 지옥이 될 것이다. 한편 간격이 너무 크다면 지루한 유토피아--상상은 어떤 거리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장 보드리야르는 유토피아에서 실재와 상상의 거리는 최대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실재와 상상의 거리가 사라진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말한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 최수정의 그림에서 간격은 쉼표이자 변화를 위한 잠재적 조건이다. 그것은 작품을 이루는 모든 유한한 형식체계가 근본적으로 속해있는 무한을 언뜻 보여준다. 작업실에 가죽처럼 정련된 검은 캔버스가 그렇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모순과 역설은 스며든다. 


 Soojung Choi, Mineral Painting, 2013, Acrylic, embroidered and mixed media on canvas, 130x130cm

모순과 역설을 피하기 위해 유한한 형식체계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은 추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낯선 바깥을 향해 구멍을 뚫으며(punk) 길들여지지 않는 힘들을 유통시킨다. 최수정에게 천으로 덮인 일정한 규격의 프레임은 도약과 비약을 야기하는 우연과 파편들을 그러모아 한데 합쳐놓을 수 있는 안정적인 구조이다. 그림은 무수히 다양한 기원을 가진 어떤 이질적인 것들을 병렬, 충돌시켜도 너끈히 품어준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화가이다.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재현적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서사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현대 소설의 방식과 같다. 누보로망의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는 자신의 새로운 소설이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있거나 이 세상에선 너무 낯설어 부재하거나, 아니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행위, 짝을 잃은 조각들, 굳어진 몸짓들과 연결되지 않은 대상들의 파편들, 허공 속의 질문들, 결코 논리적이게 끝과 끝을 꿰어 맞추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나열되는 극히 짧은 순간의 노출 등’을 추구한다고 쓴 바 있다. 


근거 없이 나열된 불연속적 요소들로 가득한 최수정의 작품 역시 다양한 불가능성들이 노출되고 연출되는 장이다. 이러한 노력들로 부터 ‘여러 연속들, 분기점들, 단절과 계속, 논리적인 난점들, 장면 전환들, 다양한 결합 관계들, 분리 또는 중첩 등등의 그 복합된 체계들’(알랭 로브그리예)이 생겨난다. 이러한 파편성은 어떤 유기적 전체의 죽음을 전제한다. 누보로망의 작가처럼 최수정의 작품에도 유기적 전체, 즉 익숙한 일상 속 인간적 세계의 죽음이 있다. 파편들은 사랑(인력) 또는 증오(척력)에 의해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거기에는 질서를 무화시키는 어떤 강력한 힘이 관통된다. 그것들은 환영적 화면 깊숙이 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떠돌면서 작은 힘에도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러한 위태로움은 끝없이 출렁이는 세계 속의 스릴 만점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이전 세계가 무너지고 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 사이의 시공간은 활력적이면서도 퇴폐적(decadent)이다. 이 무정부주의적 시공간에서 굳이 어떤 질서를 찾는다면, 편집과 분열의 순차적인 반복이다. 무정부주의적 시공간의 주인공은 가면을 쓰거나 분장한 광대이다. 


Soojung Choi, Mineral Painting, 2013, Acrylic, embroidered and mixed media on canvas, 130x130cm

작가는 가면이 회화와 유사하다고 본다. 한 표면 위에 덧씌워지는 또 다른 표면으로서의 가면 뒤에 숨겨진 본질은 없다. 이 텅 빈 주체가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세계에 잠시 머물다가 그 무대를 내려와야 하는 운명에 걸 맞는 주인공 아닐까. 이러한 비어있음은 변신을 위한 조건이다. 카프카의 세계처럼, 변신할 수 없다면 탈주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저는 자유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의 출구만을 찾았습니다’는 카프카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림 속에는 광대를 비롯한 이런저런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표정이 드러나는 얼굴은 거의 없다. 그것은 인간만을 위해 창조되지 않은 세계에 과도하게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는 기성의 사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탈 인간주의(post humanism)의 세계이다. 그림이 설치되거나 그림 안의 고립되고 인적 없는 장소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 그것은 뒤늦게 우리의 망막에 도달한 먼 거리의 별빛처럼 이미 사라진 곳(것)일지도 모른다. 1977년에 발매된 퀸의 앨범에서 시작된 [과거의 현재의 미래(Future of the Present in the Past)](2011)는 구겨진 시공간같이 복잡한 시제를 예시한다. 


퀸의 옛앨범처럼, 먼 나라의 낯선 하위문화에 시간의 간격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초현실주의적 체험을 위한 최적의 기회가 될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이국의 버려진 필름은 제목처럼 [저쪽너머]를 보여준다. 바랜 색감 속에 일순간 멈춰진 시공간은 분명한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없는 곳(유토피아)처럼 보인다.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없는, 그러나 작품을 통해서 다시 현재하는, 그래서 또 다른 이미지의 삶을 시작한다. 타자에 의해 꿈꾸어지고 만들어졌으며 반영된 세계들을 섭렵하면서 작가 또한 그러한 타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최수정의 작품 속 광대, 또는 가면 쓴 것들, 그림이라는 무대의 배우들은 그러한 얼굴 없는 타자를 말한다. 작품 곳곳에 편재하는 광대의 이미지는 일상적 삶에서 뿌리 뽑힌 자이지만 다중적인 자아를 가진다. 일상적 질서가 전도되는 무정부주의적 시공간의 주인공이다. 기존의 세계를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는 단계에서 광대는 창조자/예술가 역할을 맡는다. 


 Soojung Choi, Mineral Painting, 2013, Acrylic, embroidered and mixed media on canvas, 130x130cm

인류학자 로제 카유와는 [인간과 성]에서 축제는 우주의 초기 단계인 태고, 즉 창조적인 힘을 지닌 시기를 다시 실현시킨다고 말한다. 축제는 신성이 부여되는 시간을 재구성하여 초자연적인 것과 다시 접하게 함으로서, 인간을 초월적인 에너지에 접근시킨다. 이러한 축제는 한시적인 무대 또는 작은 화면이라는 상자에서 벌어지는 마술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다. 축제 같은 전도된 세계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어릿광대는 질서정연한 상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과 반대역할을 맡는다. 무정부주의자의 왕인 광대는 권위의 공백기에 나타나서 금기들을 위반한다. 카유와에 의하면 어릿광대가 하는 일이란 엉터리로 흉내 내는 것으로 그의 서투름이나 멍청함이 엉뚱한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속임수나 장난질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릭스터는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가면은 난장(亂場)의 세계로 들어가는 도구이다. 가면을 쓰는 행위는 타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서 자신의 한계로부터 벗어난다. 


인류의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현재의 인간 조건은 트릭스터가 신의 창조 작업을 방해한 결과로 간주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의하면, 트릭스터는 신처럼 세계를 조직하고 완성시키고자 했지만, 그의 실수와 결점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완전하게 이루어 진 것이 없다. 결국 그는 고통과 죽음 등, 신이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신화적 존재가 된다. 카유와에 의하면 어릿광대의 흉내내기(Mimicry)는 모든 장난 밑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진실, 즉 예측할 수 없는 우주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악한 우주와 무기력하게 허우적거리는 제물들, 이들 희생자들의 수난이 웃음과 두려움을 준다. 현대의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이러한 방식이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우주와 대면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연이 지배하는 설명할 수 없는 우주-무대, 여기에서 인간 운명의 부조리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직면한 인간의 공통된 무기력을 표현한다. 광대/예술가에게 마법의 원 같은 무대는 새롭게 탄생하기 위해 파괴되는 세계를 위한 장이다. 

 

 Soojung Choi, Mineral Painting, 2013, Acrylic, embroidered and mixed media on canvas, 130x130cm


출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