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2014년에 있었던 3회 개인전 부제인 ‘머무르다’는 2012년에 시작된 것으로, 작가에게 잔잔한 감흥을 주었던 자연 앞에서의 머무름을 표현한다. 자연 앞에서 머물렀듯이 작품 앞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감흥을 느끼길 바란다. 예술로 굴절된 감흥은 최초의 감흥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복 속의 차이는 시리즈처럼 진행되고 있는 작품들, 그리고 그 작품들을 제작하는 방식에도 관철된다. 이도연의 최근 그림들은 1. 2호 붓만 사용된다. 크지 않은 캔버스를 정방형, 장방형으로 확정하고 작은 점을 찍듯이 집약적으로 진행한다. 작은 붓터치를 반복하다 보면 무념무상에 빠져들고, 무엇을 그리는 지도 잊어버리는 몰입을 체험한다. 이러한 수행성은 작업과정 자체를 묵상의 시간으로 만들지만, 이도연의 작업 동기는 자연에서 비롯된 충만한 체험을 기억하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기억된 광경 역시 매우 평범하다. 작가는 유별난 곳을 그리지 않는다.

이도연, Memory, 캔버스 위에 유화, 73x117cm, 2013
쉽게 발길을 닿는 주변에 있는 평범한 곳, 누구나 다 오고 가며 봤을 법한 그런 보편적 장소이다. 작가는 잔잔한 대상을 잔잔하게 그린다. 유별남이 아닌 평범함이기에 더욱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도연은 튀어야 생존할 수 있는 현대미술의 장에서,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생활화된 작업패턴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외부적 압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필연적으로 긍정된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도 사실이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작가는 먼저 자연에 의지한다. 대상 뿐 아니라 방법론 또한 그렇다.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시점도 종점도 확인할 수 없는 무한한 붓터치는 자연의 무한함, 그리고 자연에서 감지된 무한한 뉘앙스에 상응한다. [memory] 시리즈에서, 햇빛과 바람 속에 화면 가득 펼쳐지는 유채 꽃밭, 튤립 꽃밭, 버드나무 잎 새들은 어떤 대상인지는 알아볼 수 있지만, 정확한 재현에 방점을 찍지는 않는다.
이도연의 풍경은 결국 심상의 풍경으로,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현실로부터 왔지만 비현실적이다. 2012년 파리의 레지던시에서 했던 설치작업은 요즘 그림의 그러한 특징들이 발견된다. 작품 [being]은 벽 위에 목탄으로 같은 종류의 식물 들을 그려놓았는데, 개체 안에서 반복되는 요소가 개체 밖에서도 반복된다. 그것은 어떤 원형에 근거한 모사라기보다는, 허상들의 반복이다. 녹색 점들과 하얀 점들로 가득한 풀숲, 그리고 거기에 언뜻 언뜻 드리워진 그림자와 드러난 흙들이 있는 [푸른 기억], [memory] 시리즈에서 큰 나무는 밑둥들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인적을 대신하는 것은, 홀로 자연을 배회하는 이의 시선과 인간의 형상을 닮은 듯한 자연의 암시이다. 이러한 풍경에는 풀숲을 밟는 소리나 풀잎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심상의 풍경인 만큼, 삭감은 필연적이다. 기억을 도와주는 사진처럼 선택과 집중은 필수이다.

이도연, Being, 벽 위에 목탄, 300x497cm, 2012

변형 캔버스 작품은 그러한 선택과 삭감이 더욱 강조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생략되고 캔버스 바깥의 벽면이 새로운 하늘과 땅이 된다. 건물 모퉁이를 따라 잘린 캔버스와 잔디 비탈길을 어슷하게 잘라 놓은 캔버스에서 여전히 자연은 전면에 있다. 그것은 원초적 자연이 아니라, 반쯤은 인공화 된 자연이다. 건물 위를 타고 있는 담쟁이들은 깊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뿌리줄기들은 문명이 자연을 좀먹고 있는 현대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한다. 변형캔버스 이외의 작업에서는 어떠한 건물도, 사물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선호하는 장소만큼이나 계절도 분명하다. 만물이 알몸을 드러내는 스산한 겨울 대신에, 파릇파릇한 기운이 도는 계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은 봄 또는 가을인데, 여름내 성숙한 생명들이 휴식을 준비하는 시기인 가을 역시 봄 같은 분위기가 있는 때가 있다. 이러한 오르막과 내리막 사이의 닮음은 주기적 시간을 예시한다. 대지에 뿌리박은 식물만큼 시간의 주기를 잘 드러내는 것도 없다.
이도연의 작품은 그러한 순환의 법칙이 매우 가까이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 봄 길가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개나리를 그린 작품 [memory]는 세 점을 나란히 걸어서 관객 또한 그 작품을 시작하게 했던 작가와 마찬가지로 산책자로 만든다. 정오의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여린 잎들은 그것을 둘러싼 온 땅, 공기, 햇빛, 바람 등 온 우주의 도움을 받아 또 한번의 생의 주기를 시작한다. 꽃이 피고 낙엽지고 이듬해 또 그렇게 새순을 내어 이렇게 현전할 것이다. 이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이도 저 새순들과 더불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극히 짧은 순간 불현 듯 다가오는 현존의 체험은 일상을 규정하곤 하는 기계적 반복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고갈만을 야기할 뿐인 헐벗은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깥을 봐야 한다. 바깥에서의 충만한 체험은 어딘가에 반드시 담겨져야 했다. 그것이 이도연에게는 회화였다. 평범할 수도 있는 한 장면은 그렇게 경이와 신비로 재탄생한다. 그녀에게 현대미술을 특징지어왔던 새로움과 충격은 보다 근본적인 층위로 이동한다.

새로움과 충격은 처음과 끝을 가지는 단선적 시간(역사)관에 전형적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를 내일은 순간적인 기분전환들 속에서 파국적 종말을 향하곤 한다. 근대적 사고에 전형적인 방식과 달리, 근원을 향해 주기적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적 시간관이 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무한한 횟수로 존재했다’(니이체)는 깨달음이다. 이도연의 자연 풍경을 니이체 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꽃이 피는 ‘이 단 한 사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원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단 한순간의 긍정으로 인하여 모든 영원한 시간이 동시에 선하게 되고 구제되며 정당화되고 또한 축복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과 비교하자면, 화업이 자신에게 필연적인 것이 되기 위해 긍정해야만 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원한 회귀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질 들뢰즈는 [니체, 철학의 주사위]에서 영원회귀는 변형과 연결된다고 본다.
이도연의 작품은 순환하는 자연이 소재가 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붓질의 방식이나 화폭의 형식이 순환적이다. 가령 그림에서는 잘 쓰지 않는 정방형 캔버스의 활용은 외부를 내다보는 창이 아니라, 묵상을 야기하는 만다라 같은 형식으로 다가온다. 이 유한 속의 무한에서 중심으로의 여정은 시작된다. 전면적으로(all over) 찍혀진 색 점이 보여주듯이, 중심은 부재하거나 매번 바뀔지도 모르지만, 중심을 향한 향수는 남아있다. 매번 회귀는 일어나지만, 동일한 중심으로 회귀는 아니다. 니이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것은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라, 차이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영원회귀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고 본다. 영원회귀는 모든 것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다양한 모든 것, 차이나는 모든 것, 우연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것은 변신들, 소통하는 강도들, 차이들의 차이들, 들숨과 날숨의 숨결들로 반짝이는 세계이다. 영원회귀에서 정지화면은 새롭게 살아 움직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근원을 향한 향수는 종교적인 향수라고 보면서, 종교적 인간은 세계가 생성의 상태에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본다. 그것은 거룩하고 강력한 시간, 곧 근원의 시간이며 실재가 창조되고 처음으로 완전히 표현된 평정한 순간이므로, 인간은 주기적으로 그 근원적인 시간에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주기성과 반복을 가지는 이러한 시간은 영원한 현재로 구성되어 있기에 무한히 회복가능한 근원의 시간이다. 종교적 인간은 거룩하고 파괴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주기적으로 침잠할 필요를 느낀다. 예술 역시 종교처럼 근원에 대한 향수를 가진다. 이도연에게 그러한 향수는 기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근원으로의 회귀는 머나먼 과거나 심층의 무의식을 재현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근원으로의 회귀는 ‘현재로의 회귀’(옥타비오 파스)이다. 생은 ‘현재의 매순간순간에 완벽하게 존재’(니이체)하기 때문이다. 이도연에게 회화는 그러한 지금 여기를 증거 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매체가 된다.
출전; 문화공장오산 레지던시 프로그램